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보건정책과 관련된 예산을 삭감하면서 미국에서 정규의료체계 대신 이른바 '대안의학(유사의학)'이 급속히 확산하고 있다.
대안의학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예방접종(백신) 기피 현상과 근거없는 식단을 맹신하는 흐름이 나타나면서 감염병이 증가하는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이 2026년 6월23일 미국 워싱턴 D.C. 법무부 본부에서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UPI통신=연합뉴스
21일 가디언을 비롯한 외신을 종합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보건 정책과 예산 삭감으로 미국 내 여러 감염병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과학자들의 공직 진출을 위한 시민단체 314액션의 쇼네시 노턴 회장은 가디언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인사들이 보건 및 과학 예산을 담당하니까 재앙이 발생했다"며 "식품 안전 감시, 백신 프로그램 등과 관련된 예산이 모두 자의적으로 삭감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여러 전염병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노턴 회장은 미국 의료체계 붕괴 원인으로 먼저 트럼프 행정부의 로버트 F. 케네디 장관이 꼽힌다. 케네디 장관은 유명한 반백신론자로 2025년 2월 취임 이후 백신 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전문가가 아닌 자신의 측근을 여러 요직에 앉혔다.
이후 미국에서는 기생충 감염 등 여러 질병이 확산되고 있지만 예산 삭감과 안일한 대처로 보건당국은 질병과 어려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 미시간주 등 5개 주에서는 올해 6월 중순부터 전국 최대 규모의 복통과 설사를 유발하는 사이클로스포리아 기생충 감염 사태가 발생했다.
보건당국은 감염 규모와 확산 상태를 가늠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1년 전 주 및 지방 보건 부서의 예산을 114억 달러(약 16조8700억 원) 삭감하고 사이클로스포리아균 및 식품 매개 질병 조정을 담당하는 프로그램의 권한을 축소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사이클로스포리아 기생충뿐 아니라 홍역도 확산되고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에 따르면 7월9일 기준 미국 내 홍역 환자는 2231명으로 2025년 총 환자수인 2289명을 넘어서 또 다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할 것이 확실시 된다.
케네디 장관은 2025년 4월 홍역이 유행하며 예방접종을 받지 않은 아이 두 명과 성인 한 명이 숨지자 홍역 유행 보고 관련 연설을 진행하면서 "아직 홍역 예방주사가 안전한지 입증되지 않았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홍역 백신은 1960년대 사용 승인을 받기 전 수천 명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임상 시험을 거쳐 충분히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케네디 장관은 2019년 6월 홍역 백신 사용 반대를 지지하기 위해 섬나라 사모아를 들린 적이 있는데, 이후 같은 해 9월 사모아에서는 홍역이 창궐해 5700명의 확진자가 나오고 8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 백신 반대, 과학적 근거 없는 식단 : 인플루언서들의 배만 불린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서는 백신 반대 운동과 과학적 근거에 기반하지 않은 식단,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는 보조제 판매가 만연하다.
본래 백신 반대 운동은 홍역 예방주사가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주장에 기반했으나, 이제는 여러 질병에 대비하기 위한 예방접종은 물론 주사제 자체에 관한 공포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비영리 언론 프로퍼블리카는 지난 5월6일 "부모들이 백신과 주사, 약품에 관한 공포로 저렴하고 손쉬운 비타민K 주사도 거부하고 있다"며 "미국 전역에서 비타민K 결핍성 출혈로 죽는 신생아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비타민K는 태반을 통해 충분히 전달되지 않고 모유에도 소량만 함유돼 있어 모든 신생아들에게는 비타민K가 부족하다. 비타민K 주사를 맞지 않은 아기는 맞은 아기보다 비타민K 결핍성 출혈이 발생할 확률이 81배나 높고 출혈이 발생한 신생아 5명 중 1명은 사망한다.
예방접종으로 충분히 예방 가능한 질병 역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6월2일 "미국 전역에서 예방접종으로 오랫동안 예방됐던 백일해, 파상풍, 로타바이러스 등 확진 사례가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염성 강한 호흡기 감염병인 백일해 환자 증가도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미국에서 발견된 환자들은 백신 접종을 받기에 너무 어린 아이들이 대부분인데, 백일해 예방접종을 받지 않는 인구수가 많아지면서 집단면역이 붕괴해 2023년에는 7천 명이던 확진자 수가 2025년에는 2만8천 명으로 4배나 증가했다.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식단 권유도 늘고 있다. 케네디 장관은 파스퇴르 살균이 되지 않은 '생우유' 예찬론자로 생우유가 더 건강하고 맛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식품의약국은 생우유가 살모넬라, 대장균, 리스테리아균 등을 퍼트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 올해 2월4일 아이다호주에서는 9명이 생우유를 마시고 심각한 질병에 걸리기도 했다.
일부 인플루언서들은 전문적 의학 정보에 관한 불신을 이용해 공포를 조장하고 제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AFP는 지난해 7월9일 "사회적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일부 인플루언서들이 특정 유전자가 있으면 합성 엽산 섭취가 독성이 있거나 암을 유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공포를 이용해 '유전자 검사 키트'나 '대안 엽산'을 팔고 있다"며 "합성 엽산은 특시 임신 초기 발달 장애 예방에 도움이 되고, 특정 유전자가 있어도 안전하게 섭취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제도 의학' 불신의 원인
이런 의학 불신은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보수 지지층에서 증가했다는 해석이 힘을 얻고 있다.
학교 학생들과 노동자의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는 법안에 반대하는 여러 활동가 단체들이 2022년 1월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헌팅턴 비치에서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뉴스 웹사이트인 복스는 2022년 2월 유튜브에 올린 영상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이 정치적 지형에 미친 영향을 분석했다. 2021년 3월31일 델타 변이 유행 전에는 민주당 우세 지역과 공화당 우세 지역 사이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율 차이가 없었는데, 델타 변이가 유행하고 나서는 공화당 지지율이 높은 지역일수록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율이 높았다.
퓨리서치센터가 2020년 1월에 1만2043명의 미국 성인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민주당 지지층에서 40% 이상의 신뢰도를 보인 언론사는 다양하게 존재했으나 공화당 지지층에서 40% 이상의 신뢰도를 보인 언론사는 폭스 뉴스뿐이었다.
뉴스 웹사이트 복스는 이 조사를 인용해 "보수적이고 트럼프에 우호적인 폭스 뉴스가 코로나19를 어떻게 보도하는지에 따라 사람들의 의견이 쉽게 흔들렸다"며 "특히 트럼프가 주장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 수 조작설이 큰 영향을 끼쳐, 공화당 지지층은 이에 코로나19의 위험성이 낮다고 판단했다"고 분석했다.
복스는 "이로 인해 공화당 지지층은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이 행했던 여러 보건 정책을 비웃고, 코로나19 예방접종 및 의학 전반에 관해 반감과 불신이 늘었다"며 "공화당 지지층에서 마스크 사용, 예방 접종, 의학적으로 검증된 지식 등에 거부감이 늘자 확진자가 증가했고, 지금까지도 이들은 여러 의학적 권고를 무시하거나 불신한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 당시 정규 의료체계에 관한 불신과 여러 음모론은 현재까지 세력을 키워 대안의학(유사 의학)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과학을 외면하고 정부의 통계를 외면하는 공화당 지지층이 늘면서 결국에는 케네디 장관과 같은 백신 반대론자가 정부 요직까지 올라가게 된 셈이다.
극우 기독교 영향력도 의학에 관한 불신을 키웠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최대 개신교단인 침례교계의 대표적 언론인 뱁티스트뉴스글로벌은 6월15일 "오랫동안 종교적 이유만이 예방접종 거부의 이유로 받아들여졌다"며 "코로나19 당시 이 면제조항이 금지되면서 백신 반대론자들과 종교적 탄압을 받는다고 생각한 극우 기독교인들이 손을 잡았고, 두 집단 모두 전문적 의학을 불신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