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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살아남았다 :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는 김현숙 여가부 장관이 완전히 틀린 이유

강남역에서 신당역까지, 이를 깨닫는 데 너무 멀리 돌아왔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 출처 : 뉴스1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 출처 : 뉴스1

일회용 위생모까지 치밀하게 준비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의 범인 전주환이 현장에서 잡힌 건 참혹한 범행을 당하고도 여성 역무원이 긴급벨을 누른 덕분이었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과거에도 몇차례씩 야근을 돌았을 자신의 일터. 벨을 누르던 순간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차마 헤아릴 수조차 없다. 불법촬영과 스토킹 범죄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내 신고하라는 말이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다.

19일 서울 중구 신당역 내 여자화장실 앞에 마련된 '신당역 스토킹 사건' 피해자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애도를 표하고 있다. (2022.9.19) 출처 : 뉴스1
19일 서울 중구 신당역 내 여자화장실 앞에 마련된 '신당역 스토킹 사건' 피해자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애도를 표하고 있다. (2022.9.19) 출처 : 뉴스1

2016년 강남역 10번 출구처럼 2022년 신당역엔 포스트잇이 늘어간다. 과거에도 수많은 여성 대상 범죄가 있었지만, 평범한 여성들의 슬픔과 분노가 전면적으로 가시화됐다는 점에서 2016년은 달랐다. 추모를 위해 모인 이들은 자신이 겪어온 ‘여성혐오’를 공개적·집단적으로 털어놨다. 죽음과 같은 공포가 돼버린 불법촬영, 데이트폭력, 스토킹 범죄의 실상이 알려지며, 여성이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몇몇 방범책 강화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서울교통공사가 총리실에 보고할 대책안 마련을 위해 아이디어 독려부터 나섰다는 소식은 6년이 흘렀어도 변함없는 현주소를 보여준다. 참담한 건 여성가족부 장관의 발언이다. 16일 김현숙 장관은 이번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보지 않는다”며 “남녀 이중 프레임으로 보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 조합원들이 20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서 신당역 사고 피해자를 추모하고 재발방지 및 안전대책 수립을 촉구하기 위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2022.9.20) 출처 : 뉴스1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 조합원들이 20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서 신당역 사고 피해자를 추모하고 재발방지 및 안전대책 수립을 촉구하기 위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2022.9.20) 출처 : 뉴스1

사실 여성혐오 범죄로 부르느냐 마느냐는 논쟁은 자칫 사안을 협소화할 수 있다. 문제는 명백한 젠더폭력 범죄의 본질을 ‘갈등 프레임’으로만 덮으려는 김 장관 발언의 고약한 맥락이다. ‘여성혐오’가 남녀가 서로 미워하거나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정도는 국회의원 시절 성인지예산 강화안을 발의했던 그가 모를 리 없다. 불법촬영이나 스토킹 범죄의 피해자는 80~90%가 여성이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 13년간 언론 보도 사건을 집계한 바에 따르면, 최소 1.4일에 1명의 여성이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놓여 있고, 그 대부분은 지속·반복된 폭력의 연장이다. 성차별적 인식과 이를 용인하는 구조 없이 이런 ‘야만적’ 수치가 계속될 순 없는 일이다. 그 구조를 가리키기 위해 쓰였던 ‘여성혐오’라는 단어를 한사코 부정만 하는 여가부 장관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인가. 그동안 여가부 폐지와 ‘구조적 차별은 없다’를 못박은 정권에서 운신의 폭이 얼마나 있겠나 싶어 안타깝기도 했지만, 이젠 그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듯하다.

진보당과 녹색당, 전국여성연대,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이 1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신당역 살인사건 관련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의 발언을 두고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2.9.19) 출처 : 뉴스1
진보당과 녹색당, 전국여성연대,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이 1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신당역 살인사건 관련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의 발언을 두고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2.9.19) 출처 : 뉴스1

범죄를 본질에 맞게 제대로 호명하는 것은 법의 개정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한겨레>는 이번 사건이 알려진 몇시간 뒤 “보복범죄가 아니라 스토킹 범죄라고 쓴다”고 내부에 공지했다. 경찰의 혐의 적용과 별개로 ‘보복’을 일반적 의미로 쓰면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뉘앙스가 연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공공연히 쓰였던 몰카나 리벤지포르노 같은 단어들이 의식적 노력으로 사회에서 거의 퇴출됐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가정폭력에서 친고죄가 2013년 60년 만에 폐지되고 지난해 10월 스토킹 범죄에 형사처벌이 가능해지는 등 여성의 ‘충격적’인 희생이 알려질 때마다 법은 계속 바뀌어왔다. 그럼에도 이런 범죄를 ‘사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인식은 좀체 바뀌지 않았다. 진영이나 소속 정당과도 관계없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상훈 서울시의원의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 폭력적인 대응을 한 것 같다”는 망언은 대표적 사례다. 스토킹처벌법에서 반의사불벌죄 규정을 삭제해야 한다는 여성계와 서지현 당시 법무부 양성평등정책특별관의 끈질긴 요구를 문재인 정부 법무부와 민주당 의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급격한 법체계 변화를 우려했을 수도, 이른바 ‘이대남’ 표심을 의식했을 수도 있지만 분명한 건 이런 범죄의 구조와 성격에 무지했다는 것이다. 그 대가가 너무 크다.

청년공동체 '청년하다' 등 대학, 청년 단체 회원들이 19일 서울 중구 신당역 10번 출구 앞에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해결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2.9.19) 출처 : 뉴스1
청년공동체 '청년하다' 등 대학, 청년 단체 회원들이 19일 서울 중구 신당역 10번 출구 앞에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해결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2.9.19) 출처 : 뉴스1

교육과 전문적 상담은 그렇기에 더욱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지난주 제주포럼에서 제주여성가족연구원이 주최한 ‘혐오를 넘어: 갈등 완화와 공존을 위한 모색’ 세션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제주 대정중 한민호 교사의 교육사례 발표 가운데 “들어본 혐오표현을 다 꺼내보도록 하고 교실 화면에 가득 띄웠을 때 학생들 간 공기가 무척 무거웠다”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끼리끼리 또는 혼자 댓글로 볼 때와 달리, 드러내고 이것이 혐오임을 함께 이야기하면 대부분 그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신당역을 찾아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하고 스토킹처벌법의 반의사불벌죄 규정 삭제 추진을 밝힌 것은 평가할 일이다. 하지만 법이 모든 케이스를 해결할 수도, 홍길동처럼 젠더폭력 범죄라는 본질을 덮는다고 갈등이 완화될 수도 없다. 제대로 된 호명과 전면적인 성평등·인권 교육 실시가 함께 갈 때 ‘반쪽’과 ‘땜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 한민호 교사는 최근 교육부의 예고대로 민주시민교육과가 축소통합되면 이런 교육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만큼 국민이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것 또한 국가의 존재 이유다. 강남역에서 신당역까지, 이를 깨닫는 데 우리는 너무 멀리 돌아왔다.

한겨레 김영희: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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