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근거하여 성소수자들을 혐오하고 박해하는 기독교인들이 진정 '성서대로' 살고 싶다면, 우선적으로 그들이 따라야 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용서, 그리고 환대이다. 이러한 가치야 말로 성서가 담고 있는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 진리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도, 그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도 또는 여성평등을 반대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도 모두 '성서'에 근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떠한 가치를 성서 속에서 찾고자 하는가에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성서 구절을 찾아낼 수 있다. 성서는 억압적 전통과 해방적 전통을 동시에 담고 있다. 따라서 해방적 가치를 지닌 '절대적 진리'와, 시대문화적 제한성속에서 전개된 억압적 가치를 지닌 '상대적 진리'를 구분해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과제이다.
'성소수자,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나의 답은 간단하다. 예수는 성소수자를 포함하여 누군가를 그렇게 혐오하고 정죄하는 것을 주저함 없이 단호히 거부할 것이다. 또한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사회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연대할 것이다.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주교는 '나는 동성 혐오적 천당에 가기를 거부하겠다. 나는 신이 만약 동성애를 혐오한다면 그러한 신을 예배하지 않겠다'라면서, 동성애 혐오에 저항하고 싸우는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에 저항하여 싸우는 것과 동일한 차원에 있다고 강조했다.
성소수자들의 축제는 자신들의 차이와 존재를 공적인 장소에서 드러내는 가시성(visibility)의 실천이며 집단적인 커밍아웃이라 볼 수 있다. 적지 않은 성소수자들에게 노출과 그로 인한 차별에 대한 공포를 무릅쓰고 공공장소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상당한 용기와 자기 탐색을 요구하는 의식적인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경험이 될 수 있다. 퍼레이드에서의 걷기는 단순한 이동으로서의 걷기가 아니다. 그것은 음지에서 나와 즐겁고 당당한 성소수자로서의 존재가 되어 가는(becoming) 자신을 확인하는 경험이며, 그것을 만천하에 보여 주는 작품적 행위이다.
우리나라 학교 문화에서 성소수자의 존재는 '묻지도 말고, 대답하지도 말라'는 암묵적인 원칙에 근거하여 학교 안에서 철저히 부정되고 있으며, 성소수자 학생들은 교사나 학생 모두로부터 차별과 괴롭힘을 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 연구 용역 보고서인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 에 따르면, 청소년 성소수자 응답자의 98퍼센트가 학교에서 교사나 학생들로부터 '혐오 표현'을 접하였고, 응답자 중 54퍼센트는 자신의 성별 정체성이 알려진 뒤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상태에서 동성 커플은 몇 년을 함께 살았어도 법적 부부가 아니기 때문에 수술 동의서도 써줄 수 없고, 전세 자금 대출도, 국민연금도, 심지어 항공사 마일리지도 공유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낡은 규범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동성 결혼은 한 사회의 다양성을 가늠하는 잣대이자 실질적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권리로서 2000년대 이후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중이다.
6개월 전에 나는 립스틱을 바르고, 손톱을 검게 칠하고, 진짜 나를 가리려는 노력을 조금도 하지 않고 붐비는 거리로 나갔다. 하지만 모로코에서는 트랜스젠더가 결코 완전히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지만, 나는 구타당하지 않았다. 나의 옷을 벗기거나 땅에 질질 끌고 가지도 않았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나는 모르겠다. 아마 사회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달라졌다 해도 많이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내 안의 무언가가 바뀌었다.
우리나라는 성별 정보가 포함된 주민등록번호를 공공 영역과 민간 영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큰 제약을 받는다. 특히 생계에 필수적인 취업 과정에서 외모와 일치하지 않는 주민등록번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치명적이다. 면접에서 성별에 대한 해명을 요구받으며, 그 과정에서 차별적인 취급을 당하거나 채용이 거부되기도 한다. 취업에 성공한 경우라도 정체성으로 인해 해고되거나 사직을 종용받는 등 비자발적으로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
국제법과 국내법이 명시적으로 성소수자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차별 금지의 원칙을 분명히 천명하고 적절히 집행하지 않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2015년 11월 5일에는 유엔자유권위원회(UN Human Rights Committee)가 한국 성소수자의 인권 현실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적절한 조치를 권고한 바도 있다. 최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 종교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주장을 종종 접하게 된다.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발언을 하며 동성애자들을 사회에서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부정이며 심각한 차별이자 폭력이다. 결국 '동성애자를 혐오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인간을 차별하고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엄성, 평등, 민주주의, 평화 등 이 사회를 구성하는 근본 원칙 자체를 부정하는 셈이다. 인간을 혐오할 권리가 존재하지 않듯, 바로 그 이유로 동성애자를 혐오할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성애는 HIV 감염의 원인이 아니다. 동성끼리 성관계를 갖는다고 HIV가 생겨나지 않는다. 이성 간이든 동성 간이든 감염인인 파트너와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를 갖는 경우 똑같이 HIV에 감염될 수 있다. 따라서 바꿔야 하는 것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안전하지 않은(unprotected) 성관계이다.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보다 안전한 성관계를 맺을 때라야 HIV 감염의 전파 속도를 줄일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윤리적이며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각종 의학 연구 결과들이 말해 주고 있다.
동성애가 정신질환이 아니라는 과학적 근거가 지난 40년 동안 의학, 심리학, 사회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제의 연구 결과로 지속적으로 축적되면서, 오늘날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는 주장은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학적 결정에도 불구하고 몇몇 반(反)동성애 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동성애는 질병이다' 혹은 '동성애가 질병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자, 이와 같은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자 2016년 3월 <세계정신의학회>는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는 입장을 명확히 밝힌 성명서를 발표했다.
커밍아웃을 통해서 긍정적인 소통을 경험한 성소수자들의 경우 과거의 외로움과 우울이 감소되는 등 정신건강이 회복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특히 가족으로부터 수용적인 태도를 경험한 성소수자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끼고, 커밍아웃 이전의 불안감이나 우울이 사라지고, 자살에 대한 생각이 줄었다고 한다. 커밍아웃의 과정에서 많은 성소수자들이 심리적 상처를 입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지만, 궁극적으로 커밍아웃을 통해 얻는 '해방됨'은 여타의 부정적 결과와 비교할 수 없는 순기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 약 15만 명 전후의 트랜스젠더들이 존재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상당히 적지 않은 수의 트랜스젠더들이 한국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로 자신의 주변에서 트랜스젠더를 접해 본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인간의 성별이 태어나면서부터 신체적 특징에 따라 정해진다는 믿음, 성별이 남/여 두 가지만 존재한다는 믿음, 성별 이분법에 기초한 이러한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나 다양한 성별을 가진 개인들이 그 자체로서 존중받을 때, 우리 사회에서 보다 많은 트랜스젠더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에서 수집된 인류학적 보고들에 의하면 동성애는 인류가 존재한 이후 현재까지 모든 곳에서 나타난 보편적인 현상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성인 남자들 간에 행해지던 동성애는 주로 연장자 남성과 어린 남성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이런 성관계는 교육적 차원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또한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헌에도 동성애가 언급되었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까지 남성 동성애가 강원도 지역을 비롯해 광범위한 곳에서 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