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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돌리기 : 청와대와 정부가 뜬금없이 '한국형 양적완화'를 추진하는 진짜 이유

  • 허완
  • 입력 2016.05.03 14:39
  • 수정 2016.05.03 15:00
South Korea's President Park Geun-hye participates in the APEC Summit retreat session on regional economic integration in Manila, Philippines, November 19, 2015. REUTERS/Jonathan Ernst
South Korea's President Park Geun-hye participates in the APEC Summit retreat session on regional economic integration in Manila, Philippines, November 19, 2015. REUTERS/Jonathan Ernst ⓒJonathan Ernst / Reuters

난데 없이 ‘한국형 양적완화’가 다시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지난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공약으로 내세웠다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받았던 바로 그 정책이다. 청와대와 정부가 이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공개적인 언급이 나온 이후의 일이다.

먼저 기본 개념을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현재 한국에는 한계 상황에 이른 기업들이 많다. 해운과 조선업 등이 대표적이다. 이 기업들은 대개 규모가 크다. 2차·3차 협력업체들에서 시작될 대규모 연쇄 도산·실업 사태는 지역과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기업들이 어려워진 건 경기침체 같은 일시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과잉투자라는 지적이 있었지만 무시했고,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된 것. 늦었지만 이제라도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돈이다. 구조조정에는 돈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구조조정에 따르는 손실을 부담해야 한다. 원칙적으로는 기업의 주주와 돈을 빌려준 은행(채권자), 임직원 등 당사자들이 그 부담을 나누는 게 맞다.

그러나 그동안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이들은 다양한 이유를 들어 정부에 손을 벌린다. 그게 공적자금이든 구제금융이든, 정부는 결국 돈을 지원한다. ‘경제에 큰 충격을 미친다’는 협박성 호소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 돈을 어디에서 조달할 것이냐는 문제가 남는다. 정부는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 같은 국책은행이 돈을 대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 은행들은 자금이 부족하다. 그래서 등장한 게 한국은행이다. ‘한국은행한테 돈 좀 찍으라고 하세요!’

1. 이것은 양적완화가 아니다

경제에 관심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이게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과는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미국과 유럽연합, 일본 등에서 시행됐거나 시행중인 양적완화는 이런 게 아니다.

양적완화는 경기부양을 위해 한국은행 같은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 시중에 공급하는 정책이다. 기준금리가 0%대에 가까워서 더 이상 금리 조정으로는 통화정책의 효과를 발휘할 수 없을 때 쓴다. 중앙은행은 다양한 금융자산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돈을 푼다.

반면 지금 논의되고 있는 ‘한국형 양적완화’는 시중에 돈을 푸는 게 아니다. 추가로 찍어낸 돈을 오직 기업 구조조정에만 쓴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이 발권력(돈을 찍어내는 능력)을 동원한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아무 것도 없다. 용어부터 틀렸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양적완화가 아니라 구제금융아닌가요?" 한국은행의 한 고위관계자는 발권력 동원을 골자로 하는 '한국판 양적완화'에 대해 작명부터가 잘못됐다며 이같이 일갈했다. 특정 기업의 구조조정을 타깃팅을 해 자금을 지원한다는 개념 자체가 거시경제정책인 양적완화보다 구제금융에 더 가까운데 용어를 잘못 만들어 문제가 흐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현재 정부가 주장하는 '선별적 양적완화', '한국형 양적완화'는 한은 특별융자(특융)와 더 가까운 개념이다. (아시아경제 5월2일)

강명헌 단국대 교수(경제학) : “저는 우선적으로 양적완화라는 그 용어부터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지금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한국판 양적완화는 그런 게 아니라, 특정 산업, 특정 기업에 대해서 구조조정을 위한 자금 확충을 위해서 중앙은행이 나서야 한다는 것인데요. 그런 면에서 저는 양적완화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고, 그냥 특정 업종, 특정 기업의 구조조정을 위해서 중앙은행이 자금 지원을 할 수 있느냐? 이런 여부로 이야기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YTN라디오 김우성의 생생경제 5월2일)

2. 어디에 쓸지는 아직 모르지만 일단 돈을 대라?

ADB연차 총회 참석차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방문 중인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3일(현지시간)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정부는 한국은행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논리를 동원하고 있다.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해당 기업들에 돈을 빌려줬던 은행들이 부실화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장에도 큰 충격이 올 텐데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한국은행이 먼저 대응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듯, 구조조정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온갖 복잡한 이해관계가 깔려 있고, 그 모든 고리마다 엄청난 돈이 걸려 있다. 모두가 손해를 덜 보려고 하는 거대한 게임이 벌어지는 공간이다.

구조조정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매각을 할 것인지, 합병을 시킬 것인지, 아니면 청산을 해야 하는지에 따라 필요한 자금은 몇 조원이 될 수도, 몇 십조원이 될 수도 있다.

무슨 기준에 따라 어떤 기업들을 살리고, 어떤 기업들을 버릴 것인지도 결정해야 하고, 누구에게 얼만큼의 책임을 분담시킬 것인지도 가려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구조조정을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가 없다. 그냥 일단 돈부터 대라며 한국은행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중앙은행의 독립성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순서부터 틀렸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한은은 구조조정을 해야 할 기업의 부실이 얼마인지, 어디까지 구조조정을 할 것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보고 산업은행을 도와주란 것인데 이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겨레 5월2일)

국책은행 자본확충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할 일이다. 돈이 너무 많이 필요해 정부 혼자 하기 어렵다면 그것에 대해 먼저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최상목 기재부 1차관은 2일 국책은행 자본확충의 규모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직 정부와 한국은행이 참여하는 협의체의 논의가 시작되지 않아 공식적으로 스터디가 안 돼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얼마가 필요한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한은 동원을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건지 묻고 싶다. (조선비즈 5월3일)

김기천 조선비즈 논설주간은 “방식과 순서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정부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정부 주장에는 뭘 어떻게 하기 위해 얼마가 필요하다는 구체적인 내역이 없다. 정부가 알아서 할 테니 한은은 돈만 대라는 투다. 한은에 지원을 요청하는 방식과 순서가 잘못됐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부 구상대로 해도 구조조정이 제대로 될지, 조선·해운업이 경쟁력을 되찾고 살아날 수 있을 지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기업 구조조정에서 숱한 과오를 범하며 사태를 악화시킨 전력(前歷)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성과 없이 돈만 날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조선비즈 5월3일)

3. 산업은행은 누가 망가뜨렸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정부는 한국은행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에 돈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운영하는 것과 다름 없는 이 국책은행들은 이미 상당한 부실채권에 시달리고 있다. 구조조정을 위한 ‘실탄’이 바닥난 것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산업은행의 부실채권 규모는 7조원을 넘어섰다. 부실채권(고정이하여신) 비율은 시중은행 평균의 5배를 넘는다.

수출입은행의 경우,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은 9.44%에 불과하다. 국내 은행 중 유일하게 한자릿수다. 이 비율이 8% 이하로 떨어지면 ‘부실금융기관’으로 분류된다.

이 은행들은 왜 이렇게 됐을까? 돈을 마구잡이로 빌려줘서? 경영을 방만하게 해서? 성과급에 보너스를 잔뜩 챙겨가서? 그건 절반만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정부에게는 이 은행들을 관리 감독할 책임이 있다.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때만 되면 논란을 일으켰던 각종 ‘낙하산 인사’를 기억하는가? 정치적 입김 논란은?

산업은행은 수장이 임명될 때마다 낙하산 논란이 일었다. 정부 지분이 100%인 산업은행은 현 이동걸 회장은 물론 전임 홍기택 회장 등이 취임할 때마다 보은 인사 비판이 일었다. 그러니 임명권자의 뜻에 따라 수시로 정책금융 지원 대상을 바꿔왔다. 똑같은 기업이 이명박 정부 때는 ‘녹색금융’이라는 이름으로, 박근혜 정부 때는 ‘창조경제’라는 이름으로 자금지원을 받는 게 현실이다. (한겨레 4월26일)

전문가들은 정치권이나 금융당국 등 외부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책은행이 산업적 고려를 명분 삼아 구조조정을 차일피일 미뤘다고 지적한다. 김동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성완종 사건에서 드러나듯 구조조정 대상이 대기업인 경우 정관계를 통해 구명 로비를 하면 국책은행으로서는 견뎌낼 도리가 없다”면서 “최근에는 채권단을 함께 구성하는 시중은행에 대한 국책은행의 발언력 역시 상당히 약해져 국책은행 중심의 구조조정 능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라고 진단했다. (한국일보 4월26일)

국민의 세금으로 직접 부실기업을 지원해야 한다면 정부가 좀더 신중한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 절차가 훨씬 까다롭고 정치적 부담도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급해도 정부가 공적자금 조성의 말도 꺼내지 못하는 것이다. 기업과 정치권도 함부로 지원을 요구하기 힘들다.

그러나 한국에는 산업은행으로 대표되는 국책은행이 있다. 정부는 무슨 일만 나면 “당장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한다”며 국책은행을 동원했다. 국책은행이 부실해지면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자본을 확충해야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어서 전혀 고려 사항이 되지 않았다. (조선비즈 5월3일)

게다가 산업은행은 가장 큰 구조조정 대상 중 하나로 꼽히는 대우조선해양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진짜 주인'은 정부라는 얘기도 된다. 거대한 부실의 책임자이기도 한 정부가 이제와서 직접 문제를 해결할 테니 중앙은행이 나서줘야겠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일보 이상철 부국장은 대우조선해양에서 벌어진 일을 '하이에나 카르텔'에 비유하며 이렇게 적었다.

공기업을 통상 주인 없는 기업이라고 하는데, 세상에 주인 없는 회사란 없다. 주인이 주인 노릇을 하지 않았고, 경영자가 경영자 노릇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국민 세금으로 억지로 연명시킨 대우조선에 정부, 정치권, 산업은행 그리고 경영진까지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각자 원하는 부위별로 먹이감만 챙긴 형국이다. 거대한 공생 카르텔이 아닐 수 없다. 조선경기 호황 탓에 지금까지는 종업원, 협력업체, 지역주민들까지도 어느 정도는 나눠가질 수 있었지만 이젠 손실과 실패를 공유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한국일보 4월27일)

4. 정부는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국책은행들이 구조조정 자금을 댈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다른 방법은 많다. 예산을 편성할 수도 있고, 국채를 발행할 수도 있다. 정부나 공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을 현물출자 형식으로 국책은행에 넘기는 방법도 있다.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정부가 예산을 편성해 국가의 재정을 동원하는 게 정석에 가깝다. 올해 예산은 이미 확정된 상태지만, 필요하다면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편성할 수 있다.

그러나 예산 편성은 국회를 거쳐야 한다. 국회가 추경예산안을 심의한 뒤, 이에 동의해줘야 한다. 청와대와 정부는 ‘그럴 시간이 없다’는 이유를 대며 한국은행을 끌어들인다. 구조조정이 그만큼 급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게 전부일까? 다른 이유는 없는 걸까? 여기에 매우 유력한 가설이 있다. 국회 동의 절차를 피하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 “(...) 예를 들면 IMF 외환위기 때 정부는 160조 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물론 국회의 동의를 얻었지만 공적 자금을 마련해서 투입했거든요. 그런 것도 있고 또 정부가 국채를 발행해서 한국은행에 인수를 시켜서 그 돈을 정부가 쓰면 되는 것이고.

또는 국회에서 추경을 통과시켜서 할 수도 있고 문제는 그걸 국회를 안 거치려고 하다 보니까 이런 논의가 생기는 거지 국회를 거친다면 얼마든지 방법이 있어요. 그래서 이런 절차와 원칙은 지키는 것이 좋지 않으냐. 그리고 그것이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국민의 뜻이기도 하지 않느냐. 나는 그렇게 봅니다.” (SBS라디오 한수진의 전망대 5월2일)

그러나 조선·해운업 불황은 2008년 금융위기 직후부터 지속된 일이고, 미국과 유럽 등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하는 동안 이명박 정부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박근혜 정부도 사실상 외면해 오다 갑자기 “시급하다”며 한은 발권력 카드를 꺼내든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동걸 전 금융연구원장은 2일 “그렇게 절체절명의 위기라면 총선 전에는 왜 가만히 있다 지금 와서 시급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재정을 투입하려면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하고 정부의 무능이 드러나게 되니 이를 한은 발권력 동원에 기대어 피해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5월2일)

한겨레 정세라 기자는 최근 칼럼에서 “구조조정 해결에 한은만큼은 나서선 안 된다는 법은 없다. 문제는 나설 만한 명분과 절차적 정당성”라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구조조정을 위해 한은이 돈을 찍어내는 것은 특정 기업의 부실 책임을 전체 국민이 나누어 지도록 하는 것이다. 해당 기업들이 잘나가던 시절엔 대주주를 비롯한 주주들과 경영진 등 특정 이해관계자들만 과실을 누렸다. 하지만 어려워지니 국민 모두에게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려면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승인이 필수적이다. 대주주와 경영진은 부실 책임을 졌는지, 죽어야 할 기업을 한은이 돈을 찍어 연명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 경제 회생에 필요한 구조조정의 밑그림을 그렸는지 제대로 살펴 그 판단에 대해 정부와 정치권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청와대가 거론한 양적 완화는 이런 복잡한 과정과 무거운 책임을 사양하려고 ‘꼼수’를 쓰는 것으로 비칠 소지가 크다. 재정 투입은 국회 합의의 실타래를 푸는 데 시간도 걸리고 책임의 꼬리표도 남아서 싫은데, 한은의 돈 찍어내기는 정치적 책임도 덜 수 있고 그만큼 국회 설득도 쉽다고 여겨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겨레 4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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