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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원짜리 변호사' 조영래는 '전태일 평전'을 쓴 저자라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고 약자의 곁에서 100점짜리 변호사였다(꼬꼬무)

글은 본인의 삶과 닮아있다.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따뜻한 문장가' 조영래 변호사는 생전에 자신이 '전태일 평전'의 저자로 밝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성취를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인권변호사였다. 

1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에서는 조영래 변호사의 삶과 '전태일 평전'을 쓰고,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겼다.

'전태일 평전'의 저자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 열사와 원래 알던 사이가 아니었다. 이들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전태일 열사가 열악한 노동현실을 알리려 평화시장에서 자기 몸에 불일 때, 조영래 변호사는 산속 암자에서 사법시험을 공부하고 있었다. 조 변호사는 청계천에서 한 노동자가 근로기준법 책을 안고 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전태일 열사의 빈소에 찾아갔다. 그게 이들의 인연의 시작점이었다.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조 변호사는 전태일 열사의 빈소에서 충격적인 듣게 됐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읽으려고 밤새워 씨름하다가 어머니에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만 있으면 원이 없겠어요'라고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나오지 못한 노동자에게 한자로 된 법률용어들을 읽는 일은 너무 어려웠다.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조 변호사는 전태일 열사의 친구가 되기로 했다. 전태일 열사의 삶을 담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조 변호사는 책을 통해 학생들에게 전태일 열사의 삶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는 전태일 열사가 남긴 수기와 일기를 읽고, 자신이 수배 중인 상황에서도 전태일의 가족들을 만났다. 평화시장의 여공 순애 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글을 썼다. 조 변호사는 혹시나 여공이 불편해할까 봐 한 번도 메모한 적이 없었지만, 마치 녹음이라도 한 듯이 책 속에 그 내용이 담겨있었다.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그렇게 조 변호사는 3년 만에 원고를 완성했지만, 책으로 출판할 수가 없었다. 당시 1976년은 군부독재 시절이었고, 전태일 평전의 출간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결국 이 책은 일본에서 출간됐다. 저자의 이름은 가명으로 실렸다.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그로부터 5년 후인 1983년, 한국에서 출간됐지만, 책은 판매가 금지됐다. 사람들은 몰래 전태일 평전을 구해서 읽었다. 출판사에는 책에 감명받은 독자들의 전화와 편지가 끊이질 않았고, 저자에 대한 질문이 쇄도했다. 1987년 금서에서 해제됐지만, 이때도 조영래 변호사는 자신이 저자라고 밝히지 않았다.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조 변호사는 1990년 12월, 향년 43세로 지병인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 달 후, 조영래 변호사의 이름이 실린 전태일 평전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7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글처럼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망원동 수재 사건', '대우어패럴 사건(구로 동맹 파업)', '진폐증 박길래 사건', '부천 성고문 사건' 등 거대 권력에 맞서는 소시민들의 변호를 맡았다. 그것도 무료로. 그래서 그에게 '빵원짜리' 변호사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그는 약자의 편에서 100점짜리 변호사였다. 

조영래 변호사가 사법연수원 검사시보 시절에 쓴 글에는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마음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제일보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 가족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함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다른 것은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을 수가 없겠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16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장면 ⓒSBS

그는 자기 경험과 인생의 철학을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가 아들에게 보내는 엽서 편지에도 조 변호사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들에게

앞의 사진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1990.1.18 

양아라 기자 ara.yang@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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