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국 영화 사상 최강의 러브신 '해피 엔드'

공동 주택의 긴 복도를 걸어오는 여인. 멀리서 보면 어느 집에 들어가는지 알 수 없는 그곳에서 여인은 연인의 보금자리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무 설명 없이 시작되는 러브신. 선생님 풍의 정장 속에 숨겨져 있는 백색의 언더웨어가 노출되고 비음 섞인 여인의 탄성이 들려오면 이미 관객들은 침 삼키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영화 속에 녹아든다. 관객들은 두 사람의 격정적인 정사가 끝나고 나서야 '여주인공 보라가 지금 사랑을 나눈 상대 일범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영화 '해피 엔드'의 충격적인 오프닝 신이다.

  • 조원희
  • 입력 2015.07.30 13:11
  • 수정 2016.07.30 14:12

감독 정지우 | 출연 전도연, 최민식, 주진모 | 1999

공동 주택의 긴 복도를 걸어오는 여인. 멀리서 보면 어느 집에 들어가는지 알 수 없는 그곳에서 여인은 연인의 보금자리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무 설명 없이 시작되는 러브신.

선생님 풍의 정장 속에 숨겨져 있는 백색의 언더웨어가 노출되고 비음 섞인 여인의 탄성이 들려오면 이미 관객들은 침 삼키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영화 속에 녹아든다. 관객들은 두 사람의 격정적인 정사가 끝나고 나서야 '여주인공 보라가 지금 사랑을 나눈 상대 일범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영화 '해피 엔드'의 충격적인 오프닝 신이다.

영화 <해피 엔드>는 전국 관객 114만이라는, 당시엔 대단한 박스 오피스 성적을 기록했던 작품이다. 1999년은 <쉬리>와 <주유소 습격사건> 등의 히트작이 등장하면서 한국 영화의 시장이 점차 확대되던 시기다.

전도연은 <밀양>으로 한국 최초로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그야말로 역사상 최고의 여자 배우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전도연과 칸의 인연을 만들어준 작품이 바로 <해피엔드>였다. 2000년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되기도 했던 <해피 엔드>는 어려 보이는 인상으로 어필하는 '평이한 여배우 전도연'을 '독하고 진한 연기의 화신 전도연'으로 전환시킨 작품이다.

<해피 엔드>같이 노골적인 성애 영화가 아닌 작품에서 영화감독들은 배우들에게 체위를 지정해 주거나 어떤 특정한 동작을 할 것을 지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전도연과 주진모가 만들어낸 케미스트리의 밀도만을 평가한다 하더라도 3분30여초 동안 펼쳐지는 그들의 첫 번째 정사는 그야말로 한국 영화사상 최강의 러브신 중 하나다. 노출의 정도나 체위의 사실성,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등장한다는 의외성까지 모든 것이 관객들에게 알려진 여배우가 노출을 했다는 것 이상의 본능적 충격을 전달한 바 있다.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의 사랑을 가장 충실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은 보라와 일범이 두 번째 러브신을 시작하기 전 침대에 누워 천정에 영사되고 있는 아프리카 얼룩말의 모습을 보고 있는 장면이다. 한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이 일치한 가운데 가슴에, 그리고 어깨에 닿아 편안하게 상대를 애무하고 있는 손끝의 모습에서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필요로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불편한 공간일 수밖에 없는 불륜의 공간에서 행복과 편안함을 느끼는 보라의 모습이 바로 전 장면인 남편 민기(최민식)와의 무표정한 정사 장면과 대비되면서 관객들을 동화시키는데 성공한다. 첫 번째 러브신이 격정적인데 비해 두 번째 러브신은 그 동작이나 감정이 부드럽고 편안하다. 하지만 더 행복하게 느껴지는 만큼 이 아름다운 정사가 불륜의 산물이라는 아쉬움과 슬픔은 더욱 커진다.

이전까지 무명에 가까웠던 주진모는 운동과 무용으로 다져진 몸매를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이 진중한 스릴러 영화 속에서 과묵한 일범의 성격을 잘 표현해냈다. 10년이 지난 후 역시 러브신으로 화제가 된 <쌍화점>을 통해 다시 한 번 인기와 실력을 확인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또한 이 영화로 주목받은 감독 정지우는 그로부터 13년 후, 여고생의 파격적인 정사가 담긴 영화 <은교>로 다시 한 번 흥행의 맛을 볼 수 있었다. '한국 영화 사상 최강의 러브신'은 우연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 이 글은 필자의 전자책 '한국영화 사상 가장 에로틱한 순간 51' (페이퍼크레인, 2015)에 게재된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영화 #문화 #조원희 #해피앤드 #전도연 #주진모 #정지우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