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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05일 11시 21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11월 05일 11시 21분 KST

자유를 제한하는 차별금지법?

Aleksandar Nalbantjan via Getty Images
huffpost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다. 언제부턴가 그들의 반대 논거가 ‘자유’로 집약되기 시작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동성애에 반대할 자유와 종교의 자유가 침해된다는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표현의 자유 침해에 일언반구도 없던 이들이 갑자기 자유를 외치고 있으니 어안이 벙벙하다.

차별금지법은 정말 자유를 침해하는 것일까? 차별금지법의 핵심 목표는 고용, 서비스, 교육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들 영역은 대부분 사적 영역이라 ‘사적 자치’가 원칙이다. 하지만 차별할 자유까지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음식점에서 사장의 개인적 신념이라며 “동성애자 출입금지” 팻말을 걸어놓는다. 어떤 사립학교는 건학 이념이라며 이슬람교도의 입학을 금지하는 방침을 세웠다. 어떤 집주인은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세를 주지 않겠다는 광고를 냈다. 어떤 택시는 장애인을 태우면 번거롭다며 장애인 손님은 그냥 지나쳐버린다. 어떤 회사는 여성은 책임감이 없다며 채용시험에서 무조건 10점 감점한다. 이 모든 것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면, 그 사회를 모든 시민이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자유의 침해가 바로 ‘차별’이다. 법철학자 데버러 헬먼은 차별은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평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도덕원칙을 침해한다고 말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차별은 소수자들이 실질적으로 교육받고, 직장 다니고, 취미생활을 할 권리를 침해함으로써 사회생활에 참여할 권리를 박탈한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만 자유가 허용된다는 자유주의의 대원칙에 따르면 차별은 자유로 허용될 수 없다. 차별이 공적 영역은 말할 것도 없고 사적 영역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차별금지법의 취지다.

차별금지법의 ‘표현’을 제약하는 사례도 있다. 표현이 곧 차별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가 회식 자리에서 “여성들은 책임감이 없어 사회생활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고 치자. 이게 표현의 자유인가? 그저 말일 뿐인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항의한다. “부장님, 그런 말씀하시는 거 자체가 차별입니다!” 그렇다. 직장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단순히 ‘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차별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희롱을 성차별로 간주하고 규제한다. 같은 취지로 직장이나 학교에서 장애인, 소수종교 신자, 성소수자, 이주자를 차별하는 말은 그 자체로 차별이다. 차별금지법에서는 이것을 차별행위의 일종인 ‘괴롭힘’(harassment)이라고 부른다.

그런 점에서 차별금지법은 어떤 ‘자유’를 침해한다. 하지만 그런 자유가 허용되는 사회보다는 모두가 차별 없이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1948년 세계인권선언 이후 인류의 확고한 합의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이념으로 삼는 국가들은 예외 없이 그 합의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한국의 차별금지법 제정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오늘날 차별할 자유를 옹호하는 논의들 중 상당수가 가짜뉴스에 기반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차별금지법의 취지와 내용을 곡해하고 국외 사례를 조작하여 차별이 정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토론하기조차 민망한 수준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어이없는 허위선동에 휘둘려서 차별금지법 하나 발의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의 현실이다. 도대체 뭐가 두려운 것인지 이유라도 좀 듣고 싶다. 안타까움이 분노로 바뀔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