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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국가를 그냥 점쟁이에게 맡겨라

우리는 기불릭이 아니라 무속 신앙을 가진 대통령을 뽑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게 뭐 그리 욕할 일인가도 싶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솔직히 말해보라. 삶이 힘들고 일이 고될 때 당신도 점을 보러 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거나 실제로 점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 트위터 이용자에 따르면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박근혜 골수 지지자는 이렇게 항변했다. "(최순실이) 정말 용한 점쟁이면 어쩔 겁니까?"

  • 김도훈
  • 입력 2016.10.26 06:31
  • 수정 2017.10.27 14:12

나는 종교가 없다. 모태무교다. 아버지도 종교가 없다. 동생도 종교가 없다. 어머니는 애매하다. 그녀는 젊은 시절엔 절에 다녔다. 그러면서 나는 성당 유치원에 보냈으니 독실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즘 어머니는 성당에 나간다. 아파트 친구들 대부분이 가톨릭이라 처음엔 친교를 위해 나가시더니 요즘은 꽤 열심히 다니시는 모양이다. 역시, 독실한 정도라고는 말 못하겠다.

가족 구성원 중 독실한 종교인이 없으면 주말이 좀 편하다. 교회에 나가라거나 절에 같이 가자는 요구가 없는 덕이다. 마흔이 되도록 교회에 나가야 구원받고 결혼도 한다는 부모님 성화에 시달리는 주변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더 마음이 편해진다. 근데, 만에 하나 교회에 나가면 구원을 받을 수는 있다고 치자. 결혼은 또 왜? 이 문장을 쓰고 나서 종교인에게 물어보니 교회는 거대한 결혼 중개소 구실도 한다고 한다. 하긴, 결혼 적령기 피 끓는 청춘들이 찬송가를 부르며 오로지 신에 대한 사랑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대 한국 대통령들에게는 종교가 있었다. 이승만과 김영삼, 이명박은 개신교 장로였다. 박정희와 전두환과 노태우는 불교였다. 김대중은 가톨릭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대통령들이 있었다. 김영삼은 청와대에 예배실을 만들 정도로 독실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시절 기독교 집회에서 "서울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봉헌서를 낭독했다. 이명박도 이승만을 이기지는 못한다. 신학을 공부했던 이승만은 거의 목사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석가탄신일도 공휴일이 아니던 시절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했다. 제헌의회 선거날이 주일이라는 이유로 하루 미루기도 했다. 신정정치나 다름없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거의 근대에 가까운 한국의 1940년대와 현대는 다르다. 독실한 신자였던 김영삼과 이명박도 이승만처럼 노골적으로 종교를 정책에 반영하지는 않았다. 은밀한 반영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겉으로 강하게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이명박 전후로 우리는 두 명의 무교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박근혜와 노무현이다.

박근혜의 별명 중 하나는 '기불천교인'이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를 모두 포용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녀는 가톨릭 대학을 나왔고 세례를 받았다. 2005년 대구 팔공산 동화사 주지로부터는 법명을 받았다. 2011년 '시사저널'은 이를 두고 "(박근혜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가졌다"고 표현했다. '기불릭 대통령'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기불릭은 기독교, 불교, 가톨릭을 섞어 부르는 일종의 군대 은어다. 초코파이를 먹기 위해 일요일 모든 종교 행사에 다 참석하는 병사들을 일컫기 위해 처음 나온 말이라고 한다. 나도 기불릭이었다. 성당도 가고 절도 가고 교회도 갔다. 각각의 행사에서 주는 음식이 조금씩 달랐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처럼 욕심이 많았다.

이제 박 대통령과 나는 기불릭이라는 하나의 종교로 엮인 몸이 더 이상 아니다. 최순실이 박근혜의 연설문까지 빨간펜 선생님처럼 감수하고 고쳤다는 사실이 JTBC 보도로 확인됐다. 민정수석실 인사 개입도 이루어졌다. 심지어 국가 기밀 문서까지도 최순실의 손에 들어갔다. 보도가 나오기 전 이원종 대통령 비서실장은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가 어떻게 활자화되는지 정말 개탄스럽다"고 했다. 아무렴. 2016년 한국이 라스푸틴이 설치던 제정 러시아 시대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JTBC는 그 모든 괴이한 루머를 최순실의 컴퓨터 파일을 입수해 밝혀냈다. 믿거나 말거나, '시사인' 주진우의 주장에 따르면 최순실은 최태민으로부터 현몽(죽은 사람이나 신령이 꿈에 나타나는 것)을 물려받은 영적 후계자라고 한다. 우리는 기불릭이 아니라 무속 신앙을 가진 대통령을 뽑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게 뭐 그리 욕할 일인가도 싶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솔직히 말해보라. 삶이 힘들고 일이 고될 때 당신도 점을 보러 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거나 실제로 점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 트위터 이용자에 따르면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박근혜 골수 지지자는 이렇게 항변했다. "(최순실이) 정말 용한 점쟁이면 어쩔 겁니까?" 내 어머니는 불교 신자에서 가톨릭으로 전향하기 전에는 드물게 점도 보셨다. 지금 고백하지만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 집으로 돌아오니 도사 한 명이 거실에 앉아서 아주머니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몰래 그걸 훔쳐봤다. "작은아들은 칼을 잡겠네요." 용했다 역시. 내 동생은 칼을 든 의사가 됐다. 도사는 아마도 내 사주가 적혀 있었을 종이를 보며 슬쩍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큰아들은...평생 철이 안 들겠네요." 맙소사. 용했다 역시. 나는 정말로 철이 안 든 40대가 됐다. (기불릭에서 '기'를 뺀) 불릭인 어머니가 집으로 불러들인 점쟁이는 그렇게나 용했다.

우리도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생각해야 한다. 최순실은 정말로 용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영험함이 과학적으로 밝혀진다면 경복궁을 거대한 사당으로 개조하고 이순신 장군상을 최태민 동상으로 교체한 뒤 광화문 가로수에 부적을 달자. 진정한 샤머니즘 국가로 거듭나는 것이다. 매번 국가의 중대사를 정치인들에게 맡길 필요도 없다. 그들은 말만 많고 추진력은 제로다. 지난 십여년간 이 국가가 불량 제품처럼 덜컹거리며 오작동해온 과정을 떠올려보라. 모든 걸 내려놓고 신점에 국사를 맡기는 것이 우리 마음의 진정한 평안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줄 것이다.

*이 글은 한겨레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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