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2021년 05월 08일 10시 41분 KST

"한국 근현대 미술사 새로 쓸 정도" : 이건희 컬렉션이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이중섭·이상범 희귀작이 눈길을 끈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새롭게 쓰게 하는 컬렉션"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이하 한겨레/ 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중섭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꼽히는 1950년대작 .

 

저 유명한 소 그림들이 나라의 품으로 들어왔다. 붉은 화면 속에서 검은 눈망울을 번득거리며 입을 벌린 <황소>와 눈동자 없는 머리를 축 늘어뜨린 채 간신히 발걸음을 내딛는 <흰소>. 지금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국민 화가’로 등극한 이중섭(1916~1956)이 60여년 전 삶의 나락에서 몸부림치며 그린 두 걸작이다.

한겨레
이중섭이 1953~54년 그린 .


지난달 28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사실이 공식 발표된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1942~2020)의 수집 미술품들(이하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규모와 수준 면에서 단연 돋보인 것은 이중섭의 그림들이었다. 이건희 컬렉션의 한국 근대미술품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대표작으로 꼽히는 1955년 개인전 출품 그림 <황소>와 1970년대 출판물에 소개된 뒤로 오랫동안 실물을 볼 수 없었던 희귀 작품 <흰소>, 전쟁 피난민들이 눈발을 맞으며 새와 물고기 등과 어우러진 <바닷가의 추억―피난민과 첫눈>(1950년대) 같은 회화 명작이 19점이나 된다. 뜨거운 가족애가 와닿는 작가 특유의 엽서그림 43점과 전쟁 기간에 담뱃갑 은박지에 못 등으로 그린 은지화 27점까지 국립미술관 소장품이 됐다.

한겨레
이중섭이 1950년대 초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

 

국립현대미술관은 7일 서울 소격동 서울관에서 윤범모 관장과 김준기 학예실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언론설명회를 열어 삼성가 유족이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 작품 1488점(1226건)의 세부 내역을 공개했다. 이날 공개한 내역을 보면, 기증 컬렉션은 나혜석,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백남순,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유영국, 김환기 등 한국 근현대미술 작가 238명의 작품 1369점과 클로드 모네, 폴 고갱,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등 외국 근대작가 8명 작품 119점으로 이뤄져 있다. 이중섭의 작품들은 모두 104점. 단일 작가로는 평생 산을 그린 화가 유영국(187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분량이다.

기증작품 대부분이 작가의 필력을 입증하는 양질의 수작급들이어서 이중섭 대표작이 별로 없었던 국립현대미술관은 단숨에 국내 최고 수준의 이중섭 컬렉션을 확보하게 됐다. 미술사학계에서는 이번 기증품만으로도 별도의 이중섭 미술관을 꾸릴 수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실제로 미술관 쪽은 내년 3월 서울관에서 이건희 컬렉션의 작품 실물들을 소개하는 연속 기획전의 마지막 3부로 ‘이중섭 특별전’을 따로 개최하겠다고 이날 밝혔다.

한겨레
이중섭의 오산고보 스승이었던 백남순의 1930년대 대작 . 유일하게 남아있는 작가의 30년대 작품이다.


미술관 쪽이 내보인 기증 작품 목록에는 주로 책이나 논문의 도판으로만 봤던 한국 근대기 대가들의 희귀한 작품들도 적지 않다. 한국화의 거장 청전 이상범이 1922년 25살에 그린 청록산수대작 <무릉도원도>를 비롯해 이중섭의 오산고보 스승이었던 유학파 화가 백남순이 1937년 그린 대작 <낙원>, 나혜석의 몇 안 되는 진품 그림 <화녕전작약>, 작품이 4점밖에 남아있지 않은 김종태의 1929년작 유화 <사내아이>, 일제강점기 근대조각사의 선구적 작품인 윤효중의 목조각 <물동이를 인 여인> 등이 눈길을 끈다. 널리 알려진 근대 대가들의 대표작들이 다수 들어왔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중섭의 명작들 외에 박수근의 대작 <절구질하는 여인>과 <농악>, 장욱진의 1937년작 <공기놀이>와 1950년대 수작 <소녀/나룻배>, 김기창의 1955년 대작 <군마도>, 권진규의 조각상, 유영국의 1960년대 전성기의 <산> 연작, 김환기가 1950년대 그린 대작 <여인들과 항아리>와 푸른빛 전면점화인 73년작 <산울림 19-II-73#307> 등이 기증작품 목록에 올랐다. 특히 주목되는 것이 김환기의 두 대작이다. 가로 길이만 5m를 넘는 <여인들과 항아리>는 김환기 작품들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1980년 이후 40년만에 실물이 드러났다. 전면점화는 그의 추상화풍을 상징하는 핵심 연작인데도 국가미술관이 그동안 단 한점도 소장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기증의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한겨레
장욱진이 1937년 그린 초기작 .
한겨레
김종태의 1929년작 <사내아이>.


일반 애호가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서양 거장의 작품들이 처음 국립미술관 소장품이 되면서 상설 전시로 만나볼 수 있게 됐다는 점도 주목된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를 필두로 폴 고갱의 초기 풍경화, 호안 미로의 <구성>,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마르크 샤갈의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책 읽는 여인>, 카미유 피사로의 <퐁투아즈 시장> 등 회화 7점과 파블로 피카소의 도자기 112점이 기증됐다고 미술관 쪽은 밝혔다. 근대작가는 아니지만 1980년대 이른바 ‘민중미술’로 불리운 진보 미술진영에서 활약한 리얼리즘 작가 신학철씨의 <한국현대사> 연작일부가 기증작품군에 포함된 것도 이건희 컬렉션의 방대한 수집 범위를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기증된 작품들 가운데는 회화류가 412점으로 가장 많다. 판화 371점, 한국화 296점, 드로잉 161점, 공예 136점, 조각 104점 등으로 각 영역들을 고르게 안배했다. 1950년대까지 제작된 작품이 320여점으로 전체 기증품의 약 22%를 차지한다. 작가의 출생 시기를 기준으로 잡으면 1930년 이전에 태어난 이른바 ‘근대작가’ 범주에 들어가는 작가 작품 수는 약 860점(58%)으로,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작가별 작품 수를 보면, 유영국(187점)과 이중섭(104점)에 이어 유강열(68점), 장욱진(60점), 이응노(56점), 박수근(33점), 변관식(25점), 권진규(24점)의 순으로 나타났다.

역대 최대 규모인 삼성가의 기증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장품 총량 1만점을 넘기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특히 근대미술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명품들을 소장품으로 대거 확보해 컬렉션의 양과 질 측면에서 획기적인 도약을 이루게 됐다. 근대미술 전시 때마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불문율처럼 작품 대여를 요청했던 관행도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청전 이상범이 1922년 그린 청록산수대작 .
한겨레
파블로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


미술관 쪽은 기증 작품들에 붙이는 공식 명칭을 ‘이건희 컬렉션’으로 확정하고 다양한 경로로 작품들을 관객에게 소개하겠다고 밝혔다. 덕수궁관에서 오는 7월 열리는 ‘한국미, 어제와 오늘’ 전에서 일부 작품을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8월 서울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1부: 근대명품’(가제) 전을 통해 한국 근현대 작품 40여 점을 본격적으로 선보이게 된다. 12월엔 ‘2부: 해외거장’ 전을, 내년 3월엔 ‘3부: 이중섭 특별전’을 열 계획이다.

미술관 쪽은 이와 별개로 올해 11월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박수근 회고전에 이건희 컬렉션 기증 작품들을 대거 선보이며, 내년 9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LACMA)에서 열리는 한국 근대미술전에도 컬렉션 일부를 출품할 예정이다. 과천관에서는 내년 4월과 9월 이건희 컬렉션과 미술관 아카이브가 결합된 기획전 ‘새로운 만남’을 잇따라 연다. 지역 미술관과 연계한 순회전도 계획 중이다. 이와 함께 미술관 쪽은 내년까지 기초학술조사를 벌여 ‘이건희 컬렉션’ 소장품 도록과 연구 논문 등을 발간하고 학술행사도 열 방침이다.

한편, 윤범모 관장은 기증품을 모아 전시하는 ‘이건희 특별관’ 건립 등을 검토하라고 문재인 대통령이 지시한 것과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 차원에서 내부 검토를 하고있다”고 전했다.

 

한겨레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광고] 네스프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