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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속 동물원

이렇게 동물들은 살아서 미술 공간에 들어오기도 하고, 죽어서 들어오기도 한다. 그러나 상기해야하는 점은 삶과 죽음, 그 어떤 경우에도 동물들이 자신의 의지로 미술 공간에 들어오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끊임없이 동물윤리의 문제가 발생한다.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는 2013년 9월부터 지난해 초까지 열렸던 퐁피두센터의 개인전에서 살아있는 개를 미술관에 풀어뒀고, "개는 자유롭게 미술관 여기저기를 오가며 관람객들과 조응했다." 이는 사람들의 의견이자 반응이다(아무도 개의 생각은 알 수 없다).

  • 문선아
  • 입력 2015.03.10 11:26
  • 수정 2015.05.10 14:12

시마부쿠 2011-2014 설카타 육지거북, 펜, 램프, 타이틀 스티커, 포스터 가변크기 Courtesy of the artist & Air de Paris & ParisWilkinson, London Photo: Peter White

지난해 말, 대만. '2014 타이베이비엔날레(Taipei Biennial 2014)' 연계행사로 열린 한 포럼에서 일본 출신 작가 시마부쿠(Shimabuku)는 혹독한 질답(Q&A) 시간을 거쳐야했다. 그는 'My Teacher Tortoise'(2011-2014)라는 작업에서 살아있는 설가타 육지거북(Sulcata tortoise)을 전시장 안에 배치시켰고, 이에 '동물윤리'에 대한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강한 조명처럼 자연 상태와는 사뭇 다른 전시장의 환경이 야생거북에게 좋지 않을 것이란 비판이 일었다. 여기서, 일을 보다 크게 만든 것은 작가가 취한 태도였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전문가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전시장을 방문해 밥을 주고 거북의 상태를 확인하기 때문에 거북의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고 밝히면서, 오히려 강한 조명과 쾌적한 전시장 내부 환경이 "스위트룸과 같이 느껴질 것"이라고 농담 섞인 어조처럼 말해 관람객들의 반감을 한층 고조시켰다. (처음 비판을 제기했던 예술전문 매체 기자에게, 동물보호단체가 아니라 예술전문 매체에서 온 것이 맞느냐고 확인한 부분도 관람객들을 자극하는 한 요인이 됐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그는 이내, 그 거북은 애완거북으로, 야생거북을 구할 수 없어 대체했다고 밝혔지만, 이로써 작업의 진실성마저 의심받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전시장 안에서 동물윤리의 문제가 제기된 것은 비단 오늘 내일의 문제가 아니다. 일례로 영국 작가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는 꾸준히 동물보호단체의 비판을 받아왔는데, 삶과 죽음을 주제로 작업해 온 그의 작업에는 유난히도, 동물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용한 작업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표작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1991)의 상어에서부터 양, 소, 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물들이 그가 만들어놓은 사각의 포름알데히드 용액이 담긴 비트린(Vitrin, 진열용 유리상자)안으로 들어갔다. 때로는 통째로, 때로는 몸이 반으로 갈린 채였다. 그 뿐 아니다. 또 다른 대표작 'A Thousand Years'(1990)에서는 수많은 파리 구더기들과 함께 잘린 소머리를 통째로 넣어 죽음(소머리)을 바탕으로 새롭게 피어나는 삶(구더기)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후 한동안 조용하던 그는 지난 2012년, 테이트모던에서 열린 회고전으로 다시 동물윤리의 도마 위에 올랐다. 두 개의 커다란 방에 살아있는 나비를 풀어놓고 자유롭게 캔버스 위를 날아다니며 알을 낳게 하는 작업 'In and Out of Love'(1991)를 다시 선보였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나비가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관람객들이 옷을 털면서, 혹은 그 구둣발에 나비들이 죽어갔고 전시가 지속되는 23주 동안 매주 400여 마리의 나비가 보충되어, 전시기간동안 총 9,000여 마리 이상이 세상을 떠났다. 하여 작업은 한동안 동물보호단체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물론 전시는 논란이 무색하게 관람객 수로나 이슈몰이로나 성공적이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역시 동물윤리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그의 경우 뉴욕에서 연 첫 개인전(1994)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당나귀로 표현하고자 했던 작가가 갤러리 내부에 살아 있는 당나귀를 가둬 버렸기 때문. 이 전시를 통해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지닌 작가라는 인정은 받았지만, 동물보호단체의 반대로 전시는 하루 만에 막을 내려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로도 그는 살아있는 당나귀를 천장에 매달고 말 박제를 벽에 붙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동물들을 미술관과 갤러리로 끌어들이면서 논란을 이어나갔다.

줄리앙 베르티에 2005 고양이 박제, 전기모터 40×70×30cm

이렇게 수년전까지만 해도 실제 동물이 전시장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한껏 이슈를 일으킬 정도로 꽤나 희귀한 일이었다. 하지만 요즘엔 이런 추세가 바뀌는 듯하다. 특히나, 예술의 이름을 입고 미술 공간 안으로 들어온 박제 형태의 죽은 동물들을 보게 되는 것은 이제 어려운 일도 아니다. 지난 2013년 열린 '프랑스 젊은 작가전: The French Haunted House'에서 줄리앙 살로(Julien Salaud)는 다양한 박제 동물들을 새로운 형태로 조합한 'Guerrier Traversière' 시리즈를 전시한 바 있으며, 한경우는 지난 해 초 박제 동물을 비춘 그림자로 이뤄진 'Projected Specimen' 시리즈를 선보이며 인간 시지각의 상대성과 인식의 오류를 꼬집기도 했다. 또, 지난해 9월 열린 부산 비엔날레에서는 고양이 박제에 모터를 달아 관람객이 다가오면 빙글빙글 돌도록 장치한 줄리앙 베르티에(Julien Berthier)의 작업 'Perpetual Motion'(2005)이, 역시 지난해 개관한 아라리오뮤지엄에선 박제 사슴에 크고 작은 크리스탈 구슬을 달아 감각경험의 불확실성에 질문을 던지는 코헤이 나와(Kohei Nawa)의 작업들이 전시되기도 했다. 물론 이외에도 더 많은 작업들이 있었고 이 작업들에서 동물 박제가 꼭 허투루 사용된 것만은 아니었다. 작가의 고민이 작업 훨씬 이전부터 수반되었음이 분명한 경우도 꽤 있었고, 몇몇 작업에서 박제의 물성은 작업을 완성하기 위한 필수요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또, 박제를 통해 박제 자체와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내건 작업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부인 못할 사실은, 이들의 경우 박제라는 소재의 선택이 또 다른 수요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기존에 생산된 동물 박제를 이용했으므로 새로운 박제를 양산하지 않았다는 변명은, 정당한 답변이 되기엔 지나치게 천진(naive)하다고 파악된다.)

<피에르 위그> 전시전경 (2013.9.25-2014.1.6, 퐁피두 센터) Copyright Philippe Migeat, Centre Pompidou

이렇게 동물들은 살아서 미술 공간에 들어오기도 하고, 죽어서 들어오기도 한다. 그러나 상기해야하는 점은 삶과 죽음, 그 어떤 경우에도 동물들이 자신의 의지로 미술 공간에 들어오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끊임없이 동물윤리의 문제가 발생한다.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는 2013년 9월부터 지난해 초까지 열렸던 퐁피두센터의 개인전에서 살아있는 개를 미술관에 풀어뒀고, "개는 자유롭게 미술관 여기저기를 오가며 관람객들과 조응했다." 이는 사람들의 의견이자 반응이다(아무도 개의 생각은 알 수 없다). 또, 신제현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 <아트스타코리아>에서 'Trailing, 50일간의 드로잉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가림막 뒤에서 닭을 키웠는데, "관람객은 전시장을 채운 닭똥 냄새에 힘들어했다." 이 역시 단지 사람들의 입장이다(닭의 입장은 묻지조차 않는다).

'우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동물들'은 어쩌면 너무도 쉽게 대상으로서 미술 공간에 진입하며, 그 과정이나 결과에서 동물들의 시선이나 입장은 대체로 누락되어 있다. 전시에 비-고의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동물원'이라는 공간의 특성을 함께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어릴 적, 가족들과 놀러갔던 동물원은 매우 이상적 공간으로 기억되지만, 사실 그곳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유토피아인 양 꾸며놓고, 임의적으로 동물들을 가둬놓은 공간이었다. 최근에는 이 공간이 지닌 폭력성을 노출하는 새로운 해석들도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 동물원이 발생한 시기에 기원을 둔 해석이 흥미롭다. 동물원은 제국주의 시절, 국력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자, 동시에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인들에게 자신들의 편중된 부를 가리기 위해 만든 완화장치였다는 것(식민지에서 가져온 희귀한 동물들을 가둬놓은 도심 속 대형 동물원은, 식민지인들에게 자신들의 장소에서 온 동물들이라는 자부심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인간의 이기(selfishness)를 위한 장치 내에서 동물들은 당연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대륙을 오가던 중 수많은 동물이 죽었고,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환경이 맞지 않아 변종되거나 멸종됐다.

동물들을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하던 동물원의 관념은 오늘날 자연스레 미술 공간으로 유입되고 있다.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살아 있는 생명들은 객체가 되거나 죽음의 냄새를 물씬 풍기곤 한다. 하여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동물들을 미술 공간으로 들여오는 과정에는 그들과의 합의가 필요하다. 물론,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더더욱, 미술계에도 동물윤리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 이 글은 월간『퍼블릭아트』2014년 10월호 '어나더뷰' 게재 원고를 일부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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