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서울 홍대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작은 아씨들> 정서경(47) 작가는 사방이 통창인 빛이 가득한 공간에 앉아 있었다. 문득 드라마 속 주인공인 세 자매의 첫째 오인주(김고은)가 생각났다. 인주는 막내 오인혜(박지후)가 보낸 300억원으로 거실 통창으로 한강이 보이던 그 아파트에 입주했을까? 아님 더 좋은 곳으로 갔을까? 정 작가가 말했다. “글쎄요. 인주에게 300억원을 남겨준 건 이젠 이 돈이 어떤 돈인지 잊지 않고, 돈의 무게를 아는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어요.” 그리고 정 작가의 친구가 그랬단다. “시청자도 12부 내내 주인공이 고생하는 걸 지켜보면서 함께 견뎌줬는데 마지막에 다 뺏기면…, 너무 한 거 아니니!’” <작은 아씨들>은 “20억이 생겼다가 뺏기고 다시 700억이 생겼다가 뺏기는 이야기 어떨까?” 라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그가 인주한테 오늘의 희망을 선물했듯, <작은 아씨들>은 그에게 ‘인기 드라마 작가’라는 타이틀을 붙여줬다. 그의 이름 앞에는 이미 여러 개의 타이틀이 붙어 있다. 2015년 영화 <친절한 금자씨>부터 최근 <헤어질 결심>까지 박찬욱 감독 작품은 그가 함께 시나리오를 썼다. 영화계에서는 이미 유명 작가인데, <작은 아씨들>로 드라마팬들의 사랑도 채웠다. “드라마 문법은 여전히 모르겠어요. 일단 무작정 쓰기 시작했어요. 12편을 하나의 영화를 구성하는 느낌으로 썼어요. 3회가 특히 어렵더라고요.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동력을 찾는 게 힘들었어요.”
아쉬운 것만 늘어놓지만, <작은 아씨들>은 드라마에서 여성 서사를 확장시켰다. 정 작가는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 등에서 줄곧 강한 여성을 내세워 왔다. 드라마 데뷔작인 2018년 <마더>(티브이엔)도 가정 폭력에 내몰린 아이를 구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작은 아씨들>은 거기서 서너발은 더 내디뎠다. 선한 사람과 대립하는 빌런도 여성이지만, 선한 사람을 구하러 오는 또 다른 선한 사람도 여성인 구도는 드물다. “처음부터 ‘주인공은 세 자매로 하고 싶다. 세 자매에 맞서는 최종 빌런도 여자였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집필을) 시작했어요.” 오인주와 진화영(추자현)의 관계, 진화영과 원상아(엄지원)의 관계, 원상아와 오인주의 미묘한 관계도 드라마에서는 흔치 않다.
특히 주인공으로서 오인주 캐릭터가 신선하다. 용맹함과 그 반대의 성격을 다 갖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둘 다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영화 <아가씨>의 숙희가 떠오르기도 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맏언니 역할을 맡은 김고은의 허영심과 정의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연기가 인상적”이라며 “<작은 아씨들>은 이런 여성 캐릭터를 잘 활용한 여성 서사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장르적 재미까지 더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정서경 작가는 이 드라마를 3년 전에 시작했다. 그 사이 영화 <헤어질 결심> 시나리오를 쓰고 다시 작업을 이어 갔다. 정 작가는 시놉시스 없이 드라마 대본을 쓰고 집필 방식도 조금 다르다고 한다. 캐릭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으니 배우들은 이 장면에선 어떤 감정으로 연기해야 하나 헷갈리기도 했다는데, 오히려 틀에 박히지 않은 표현이 <작은 아씨들>에 이르러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 같다. 평소 그의 작품에 관심을 안 가진다는 박찬욱 감독도 <작은 아씨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좋아해줬다고 한다. “이런 저런 코멘트를 해주셔서 매번 묵살하느라 힘들었어요.(웃음)”
그는 작품마다 동화를 모티브 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더>는 <헨젤과 그레텔>, <헤어질 결심>은 <인어공주>다. <작은 아씨들>은 여러 동화의 원형이 들어 있는데, 주로 〈분홍신〉 〈푸른 수염〉이라고 했다. 실제로 <작은 아씨들>을 보면 동화 느낌이 드는 장면이 있다. 원상아와 진화영 그리고 오인주가 푸른 난초 나무가 있는 지하실에서 대치하는 12회 마지막 장면은 신이 바뀔 때마다 동화책을 한장씩 넘기는 느낌이다. 정 작가는 날 것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과 과한 판타지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편안하게 느끼는 적절한 지점이 있는데, 그 현실과 환상 사이가 <작은 아씨들>의 빼어난 미술과 만나 동화처럼 그려졌다. 정 작가는 “마지막 장면은 처음부터 난실과 함께 지하실을 불태우고 싶었다. 세트장이어서 불가능하다고 해서 대안이 없었는데, 미술 감독님이 염산 아이디어를 냈다”고 말했다.
정서경 작가는 대사를 문어체로 써서 어렵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 ‘덕’에 그의 작품에선 늘 명대사가 쏟아졌다.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아가씨〉),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등이다. <작은 아씨들>에서도 “대사마다 의미를 담아쓰려고 했다”고 한다. 그 중 어떤 말은 의도와 다르게 전달되기도 했다. “가난하게 컸어? 하도 잘 참아서”같은 대사다. 그는 “극 중 인물이 돈에 대해 수치심이 없는 것처럼 보여주려고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말이 상처가 되었다는 댓글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다음 작품을 쓸 때는 반복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고 말했다. 베트남 전쟁을 왜곡했다는 논란에 대해서도 그는 “글로벌한 시장에서 드라마를 집필하며 더 세심하게 살피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꾼 인생은 2002년 연출도 했던 단편 <전기공들>을 시작으로 첫 공동작업인 <친절한 금자씨>로 이어졌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살아온 세월이 벌써 20년이 됐다. “느낌상 단 하루도 일하지 않은 날이 없다”며 “직업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산다”고 했다. “일어나면 ‘오늘은 뭐 쓰지' 생각해요. 일하지 않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이번 주까지만 <작은 아씨들>을 이야기하고 다음 주부터는 또 쓸 거란다. 그는 대본을 쓴다는 말을 이렇게 표현했다. “즐길 거예요”
한겨레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