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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한국적인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의 10가지 장면

  • 허완
  • 입력 2015.10.06 13:58
  • 수정 2015.10.06 14:13

정부가 “국내 최초, 최대 규모의 할인행사”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는 그 이름만큼이나 곳곳에서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들이다.

대통령이 말을 꺼내자 정부가 부랴부랴 ‘범국민적 세일’을 기획하고 나선다. 이어 정부는 유통업체들을 ‘반강제적’으로 동원하고, 유통업체들은 납품업체들에게 할인 물량을 ‘할당’한다.

원래 가격보다 더 비싸게 주고 물건을 구입한 소비자도 등장한다. 그 뒤에는 정부의 세심한 ‘기업 봐주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소비자들이 알았을 리가 없다.

다양한 교훈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는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의 10가지 장면을 허핑턴포스트코리아가 모아봤다.

#1. ‘코리아 그랜드 세일을 확대해주기 바랍니다’ (8월4일)

“내수활성화를 위한 비상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 국민들의 침체된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소비심리를 회복할 수 있도록 광복 70주년을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사기 진작의 전기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 관계부처는 광복 70주년 축하 분위기 조성과 내수 진작을 위해서 (...) 외국 관광객 유치와 국내 소비 진작을 위해서 코리아 그랜드 세일도 조기에 확대, 시행해주기를 바랍니다.” ( 박근혜 대통령, 8월4일)

#2. ‘세일폭 70~80%까지는 아니고...’ (8월26일)

“할인한 비용에 대해 정부가 지원해 주는 것은 없다. 다만 전반적으로 내외국인에 의한 소비가 함께 나타날 경우 이익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구체적 할인율에 대해서는 개별기업, 유통회사에 따라 다르지만 70~80%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은보 기획재정부 차관보, 뉴시스 8월26일)

#3. ‘세일 붐을 조성하겠습니다’ (9월15일)

정부가 내수 활성화를 위해 추석을 전후로 한 달 간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와 같은 '코리아 그랜드 세일' 행사를 연다.

정부는 15일 오전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추석 민생대책'을 확정했다.

정부는 추석 전 2주(9월14일~25일) 동안 '한가위 스페셜위크' 행사를 열어 세일 붐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뉴시스 9월15일)

#4. ‘참여 안 할 거면 A사는 빠지셔도 좋습니다.’ (9월17일)

지난달 17일 서울 시내 모처에 백화점, 대형 마트 등 대형 유통업체 관계자 10여명이 모였다. (...) 이날 회의에서 A유통사의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원래 미국에서 블랙프라이데이(약칭 블프)는 재고(在庫)가 많이 쌓인 연말에 가능한 행사이다. 한국에서는 재고 관리를 유통업체가 아니라 제조업체가 하므로 유통업체뿐 아니라 제조업체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블프라는 말에 걸맞은 할인을 할 수 있다.” (...) 회의를 주재한 산업부 간부는 “그렇다면 A사는 지금부터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회의실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 후 회의는 정부 방침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조선일보 10월6일)

#5. ‘재계가 협조 좀 해주시죠.’ (9월25일)

주형환 기획재정부 차관이 25일 오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경제단체 부회장 들과 가진 조찬간담회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주형환 기획재정부 1차관이 25일 경제계에 정부가 내놓은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 등의 내수 진작책과 청년 일자리 창출에 적극 참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날 오전 서울 명동 뱅커스클럽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5단체 부회장들과 만난 자리에서다.

주 차관은 "메르스·가뭄 이후 소비와 투자가 일부 개선되고 있지만 수출 부진과 미국·중국발(發) 대외 리스크로 회복세가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정부의 경제 활성화와 구조개혁 노력에 경제계가 협조해 달라"고 당부했다. (연합뉴스 9월25일)

#6. ‘정기세일과 별로 다를 게 없어요.’ (9월30일)

하지만 실제 매장을 둘러보니 이른바 ‘노세일 브랜드’들은 가격할인이 아니라 장바구니 등 사은품을 증정하거나 사용기한이 한달 밖에 안 되는 브랜드 상품권(구입금액의 10% 이하)을 주는 수준이었다. (...) 익명을 요청한 한 백화점 마케팅담당자는 “정부 정책에 동참한다는 뜻으로 세일 일정을 조금씩 조정한 것 말고는 원래 준비해온 가을 정기세일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말했다. (한겨레 9월30일)

#7. ‘갑자기 세일하라는 건 말이 안 되죠.’ (10월1일)

다른 유통업체 관계자도 "이미 3개월 전부터 할인율을 다 결정해놓는데 갑자기 블랙프라이데이한다고 50%씩 세일하라는 것은 말이 안되고 그러면 제조·입점업체들 다 죽는다"며 "소비자들이 실망하시지 않도록 상품권 증정범위를 넓히고 사은품도 더 많이 마련하는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10월1일)

#8. ‘우리는 강제로 동원됐다.’ (10월2일)

'강제 할인'에 동원된 중소 협력업체들의 말에 귀 기울여 봐야한다. 50%다 70%다 할인폭의 대부분을 제조사 이른바 브랜드들이 감내해야하기 때문이다.

(...)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행사가)워낙 급하게 추진되다 보니 (유통사와)분담율은 협의되지도 않았다"며 "프로모션에 협조하라는 것도 반강제적이었다"고 지적했다.

(...)

한 중소 의류업체는 대형마트가 판매수수료율 인하도 없이 할인상품을 내놓으라고 하니, 안 할 수는 없고 일단 3,000원짜리 상태 안 좋은 옷들을 밀어 넣었다고 한다. (머니투데이방송 10월2일)

#9. ‘세일이라더니... 더 비싸네?’ (10월6일)

코리아블랙프라이데이 행사에 참가한 일부 유통업체들은 정가를 부풀린 뒤 그 기준으로 할인율을 적용해 소비자는 결국 평소 시중 가격보다 더 비싼 값에 할인 상품을 샀다. (...)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행사상품으로 96만원에 판매된 정가 172만원짜리 TV는 다른 온라인 쇼핑몰에서 78만원에 살 수 있었다. 한 대형마트에서 1천290원짜리를 1천200원에 판다고 광고한 초코과자의 실제 최근 1개월간 평균 가격은 900원대에 불과했다.

사실 이 같은 '할인율 뻥튀기' 문제는 이미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를 위해 정부가 할인율 표시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밝힌 순간부터 예견됐다는 게 유통업계의 지적이다. (연합뉴스 10월6일)

#10. 결말(?) : ‘누가 책임질 것인가.’

참여 업체들에 따르면 행사 한 달 전까지 정부가 추진하는 대규모 세일 행사에 대해 어떠한 언질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통상 세일 준비에 3~4개월 이상 소요되는 유통업계의 현실을 간과한 채 정부가 ‘하라면 하라’는 식으로 한 달 안에 밀어부쳤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제조업체가 빠진 유통업체만의 행사로 전락했고 세일 품목이나 가격이 소비자를 유인할만큼 파격적이지 못한 결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최대 70%까지 할인되는 세일인양 정부가 직접 국민을 호도했으니 이제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중략)

관치의 기저에는 이처럼 “위에서는 결정하고, 밑에서는 따른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조선일보 10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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