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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울면 어때?

울면은 어릴 적에 중국집의 인기 메뉴였다. 인기, 라기보다는 뭐랄까 남자의 면이었고 어른의 면이었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엽차를 받아들고 묵직한 음성으로 "울면 하나!"를 주문할 때 어찌나 멋있게 보이던지. 나도 어른이 되면 울면을 먹어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울면은 달큰하고 구수한 짜장과 달리, 맵고 진한 짬뽕과 달리, 시원한 우동과 달리 묵직해서 애들이 먹지 못했다. 어른의 맛이었다. 걸쭉한 전분을 풀고 더러 갑오징어와 해삼이 들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 박찬일
  • 입력 2015.07.26 06:45
  • 수정 2016.07.26 14:12
ⓒnamu.wiki

국수도 유행을 탄다. 한때 유행하던 국수가 전설처럼 사라져 버릴 때가 있다. 울면이 그렇다. 중국어로 '원루몐'이라고 하는 이 국수는 요즘 보기 힘들다. 오래된 인천의 화상 중국집에 가면 여전히 그 이름을 쓰고 있기도 하다. 어떤 개그맨이 캐럴 송을 개사하여 "울면 안 돼 짜장 안 돼"라는 우스개를 하던 기억도 난다. 울면은 어릴 적에 중국집의 인기 메뉴였다. 인기, 라기보다는 뭐랄까 남자의 면이었고 어른의 면이었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엽차를 받아들고 묵직한 음성으로 "울면 하나!"를 주문할 때 어찌나 멋있게 보이던지. 나도 어른이 되면 울면을 먹어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울면은 달큰하고 구수한 짜장과 달리, 맵고 진한 짬뽕과 달리, 시원한 우동과 달리 묵직해서 애들이 먹지 못했다. 어른의 맛이었다. 걸쭉한 전분을 풀고 더러 갑오징어와 해삼이 들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울면과 비슷한데 맑게 만든 걸 우동이라고 불렀다. 나는 중학생이 되어 학교 앞 '박리분식'(이 상호는 상당히 특이한데 전국에 흔하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박씨와 이씨가 만든 분식집이다, 일제 때 만들어진 만두가게의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쓰는 것이다 하며 말도 많았다. 누가 제보 좀 하기를 부탁한다)에서 '가께우동'을 먹어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도 있다. 계란을 풀고 갑오징어와 새우, 버섯이 들어가는 중국식 우동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중국집의 우동은 원래 '다루몐'이라고 하여, 짜장과 함께 베이징의 대표 국수라고도 한다. 짜장이 더운 여름의 대표격 국수이고, 이 우동 아닌 우동은 겨울에 뜨겁게 먹는다. 아마도 산둥 사람들이 한국(조선)에 이 국수를 전할 당시가 일제강점기였고, 이해하기 쉽게 우동이라고 명기하여 팔면서 그런 이름을 얻은 게 아닌가 추측한다. 맑게 끓여서 시원한 국물을 내던 중국집 우동도 이제는 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매운맛이 인기를 끌면서 따로 짬뽕만 파는 집까지 번성하고 있지만('백주부'가 하는 프랜차이즈 집도 흔하다) 우동은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더러 파는 집에서도 시켜보면 영 옛 맛이 아니다. 인기가 없으니 실력도 떨어지기 마련인 것. 약간 달고 개운하며 국수가 짜릿하게 빨려오던 중국집 우동. 고운 고춧가루를 듬뿍 쳐서 먹던 그 우동 아닌 우동. 이제 우리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는 전설이 되고 마는 것인가.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면은 아니지만 앞서 '박리분식' 같은 집에서 팔던 물만두도 사라져 버린 음식이다. 물만두는 중국식으로 역사가 깊은 음식이다. 임오군란 후 1882년에 맺어진 불평등조약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의해 중국인 상인과 노동자들이 건너온 이후 조선 땅에 가장 먼저 생긴 음식점은 만두와 전병을 파는 '호떡집'이었다. 명동에서 오랫동안 영업하던 '취천루'가 그 역사를 증언하는 가게인데,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중국인들이 운영하던 호떡집(만두집)은 한국인에게도 기술이 전해져 만두와 찐빵을 파는 수많은 분식집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손으로 빚어내는 물만두는 이제 전설이 되고, 찐만두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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