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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였다면 산티아고는 못 갔다"

  • 김병철
  • 입력 2015.04.08 03:46
  • 수정 2015.04.08 03:48

서명숙 이사장이 2013년 12월 일본 오이타의 규슈올레를 걷고 있다. 최근 ㈔제주올레는 일본 규슈에 이어 인도네시아 롬복의 올레길 개발도 돕고 나섰다. 국제 사회혁신가 지원 조직인 아쇼카재단은 2013년 11월 서명숙 이사장을 한국 최초의 ‘아쇼카 펠로’로 선정한 바 있다. 김진석 사진가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지난달 26일 서울시 은평구 서울시청년허브 다목적홀에서 ‘간세다리 여행길과 인생 이모작’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간세다리는 제주도 사투리로 게으름뱅이라는 뜻이다. 강연 일부를 재구성했다.

쉰 살이 되던 2006년 언론사 편집국장을 그만두고 스페인 산티아고로 도보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때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신 분이 어머니였다.

우리 가족과 함께 살며 손주 둘을 보살펴주시던 어머니는 딸의 승승장구만이 삶의 낙이라 여기며 내 직장생활을 뒷바라지하셨다. 딸의 사회적 출세를 당신과 동일시했기에 갑작스러운 내 결정에 굉장히 분노하셨다.

거실에서 어머니와 대판 싸운 뒤 다리를 뻗대며 울었다. 얼마나 절실한지 보여주고 싶었다. “사춘기 어린애도 아니고, 성인이 된 지 3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어머니가 내 인생을 간섭하세요? 25년 뼈 빠지게 직장생활 했으면 이제 쉴 만도 하지 않아요?”

제주 올레길

그러자 어머니는 “나는 34년 동안 제주 서귀포에서 식료품 가게를 할 때 명절 외에는 쉬어본 적이 없다. 휴가도 있는 직장생활을 너는 벌써 포기하니?”라고 반박하셨다.

그럼에도 나는 꺾이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그건 엄마의 인생이고, 나는 여기까지야. 더 이상 강요하지 마.” 엄마 앞에선 한없이 약해지고 작아지는 나였지만, 그땐 너무나 절실했기에 어머니를 거부할 수 있었다.

산티아고로 출발하기 앞서 실전 연습을 해야 했다. 모두 800㎞의 길을 하루에 15시간씩 한 달 넘게 걸을 계획이었다. 아침마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 한강변으로 향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딸의 등에 대고 “아이고, 내가 무슨 꼴을 본다고…” 하며 한숨을 내쉬셨다. 굉장한 심리적 압박을 무려 두 달 동안 매일 아침 이겨내야 했다.

한편으론 친구들의 응원도 있었다. 가수 양희은, 여행가 한비야 등 여행 좋아하고 맛난 음식 좋아하는 열 명의 여자가 모인 ‘십자매’ 모임이 있다. 내가 산티아고에 간다고 하자 십자매도 하나둘 동참하더니 7명이나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처음엔 영어도 잘 못하는 내가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아 좋더니 나중엔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길 위의 참선, 행선(行禪)여행을 꿈꿨는데, 혹시라도 수학여행이 되지나 않을까.

나는 직장생활 하면서 인생 이모작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표를 낼 때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마음의 준비도 못한 터였다. 산티아고의 길 위에서 인생 전반부를 정리할 생각이었기에 조바심이 났다.

한 여성이 지미오름을 새벽에 오르고 있다. 뒤쪽에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보인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갈 날이 조금씩 다가오자 한 명씩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포기하더니 결국 나 혼자 남게 되었다. 포기한 친구들은 심지어 나까지 가지 못하게 하려고 시도했다.

“너도 가지 마라. 내년에 모두 시간 될 때 같이 가자.” 유혹은 달콤했지만, 돌아갈 직장도 없고 어머니한테 욕이란 욕은 다 먹은 나는 무조건 가야만 했다.

결국 스페인행 비행기는 나 혼자 탔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은 친구 따라 강남까진 갈 수 있어도 산티아고까진 못 간다는 것을, 정말 절실할 사람만 산티아고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지가 강하지 않은 내가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친구들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 여행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하길 원하는지 알고 싶었다.

세계자연유산 국제사진공모전 은상 이법수씨의 '다랑쉬 오름 일출'

나는 중학생 때부터 기자에 대한 꿈을 키웠다. 신입기자 시절엔 사건만 발생하면 가슴이 뛰었다. 기자생활 내내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40대 후반이 되자 어떤 뉴스에도 가슴이 뛰지 않았다. 편집국장에 올랐지만 기쁨이라곤 없는 생활이었다.

이대로 살면 숨이 안 쉬어져서 죽을 것 같았다. 죽을 때 ‘회사 어느 자리까지 올라가 보고 죽을걸’, ‘아파트 몇 평짜리 사놓고 죽을걸’ 이렇게 후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더라. 일단 살아야겠다 싶고, 내 인생이 안쓰러워 스스로를 퇴직시켰다.

앞으로 뭘 하고, 돈은 어떻게 벌지 구상은 전혀 없었다. 일단 산티아고에 갔다 오자는 목표뿐이었다. 달리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도 없었다. 그걸 찾고 싶어 산티아고에 간 것이다.

삶의 이모작을 고민하고 있다면 자기 마음속에 절실한 게 무엇인지, 자신의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발견한 다음에는 다른 사람과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이모작을 준비하면서 부모의 반대로, 배우자의 반대로 원하던 일을 시작하지 못했다는 사람은 그만큼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은 가족끼리, 이웃끼리 간섭이 심한 사회다.

누군가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고 하면 일단 말리고 본다. 선뜻 하라는 사람이 거의 없다. 가족 때문에, 타인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양보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다랑쉬오름에서 본 일출

내가 만약 효녀였다면 산티아고로 못 떠났을 거고, 결과적으로 올레길도 못 냈을 것이고, 인생 후반부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지하철역에서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을 따라가다 길을 헤맨 경험이 있다. 남들 따라가다 엉뚱한 길에서 시간을 낭비하면 그렇게 아쉬워하면서 인생 경로는 남 따라가는 걸 너무 당연시하는 것 같다.

이제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 달리 살아보라, 가급적 안 하던 걸 하라 권하고 싶다. 나는 반평생 잔머리를 하도 많이 굴려서 지금은 가급적 몸을 쓰는 일을 하고 있다. 인생의 균형을 잡았던 거다. 그랬더니 다른 세상이 다가오더라.

참, 어머니는 내가 제주에 정착한 뒤에도 한참 동안 서울에 계셨다. 딸의 선택에 대한 강력한 거부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34년 동안 식료품을 파셨던 서귀포매일시장이 올레 6코스에 포함되면서 이름도 서귀포매일올레시장으로 바뀌었다.

2010년엔 시장 안에 제주올레 안내센터도 생겼다. 지금 어머니는 그 안내센터의 자원봉사자로 매일 출근하고 계신다. 내 밑에서 일하시는 셈이다. 통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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