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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1980년 이후에도 수많은 5·18을 목격해왔다

1980년 5월 18일로부터 37년이 흐른 지금 그나마 세상은 좀 더 나아졌을 것이다. 그날의 광주는 5·18 폭동에서, 5·18 사태로, 5·18 민주항쟁 혹은 5·18 민주화 운동으로 조금씩이나마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렇게 한동안 하소연할 곳이 없던 광주를 향해 귀를 여는 사람이 생겼고, 늘었고 그날의 광주는 조금씩 명예를 회복해가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아직도 누군가에게 그날의 광주는 북한 간첩에게 놀아난 폭동에 불과할 것이다. 올해에도 공무원 학원가엔 5·18 유공자들이 가산점을 받는 특혜를 누리니 아무리 공부해도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전단지가 유포됐다.

광주에 내려간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아따, 너 말 이상하게 한다잉." 광주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나는 표준어를 쓰는 이방인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광주 사람이 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1980년 5월 18일에 광주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보고 듣게 됐다. 중학교 1학년 시절, 같은 학원에 속한 전문대 매점에서 먹는 350원짜리 육개장 컵라면과 150원짜리 자판기 음료수는 별미였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500원짜리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친구들과 함께 매점에 들어섰다. 그리고 벽을 봤다. 그날은 5월 18일이었다.

그것은 모두 얼굴이었으리라. 폭력에 짓밟혀 박살 나 얼굴이라 추측할 수밖에 없는 원형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엄지손가락을 안에 넣고 둥글게 주먹 쥔 크기의 사진이었는데 그런 사진들이 중학생 키보다 높고, 열 걸음쯤 옮겨야 둘러볼 수 있을 정도의 벽면 상하좌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체온과 감정이 새어 나가고 짓뭉개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부서진 얼굴들. "아, 글쎄, 사람을 장갑차로 밀어버렸당께!" 어느 노인의 입에서 튀어나와 내 귓바퀴를 뱅그르르 돌아 나가던 언성이 불현듯 가슴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나는 그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가 좀처럼 흩어지지 못하는 연기처럼 매캐하다고 느꼈다. 지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노인의 원망에는 굴뚝이 없었다. 그래서 아마 노인의 삶도 매웠을 것이다. 유년 시절부터 학창 시절까지 광주에서 살았던 내가 느낀 광주는 굴뚝 없는 원망들이 매캐한 연기처럼 남아버린 도시였다. 그 이후로 내게도 아궁이가 생겼다. 그리고 5월 18일쯤 되면 매운 기분을 느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했단 말인가.

1980년 5월 18일 아침부터 광주에선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연행해 가고 있다고 했다. 진압봉으로 온몸을 사정없이 구타해서 머리가 깨지고 피가 철철 흐른 채로 끌려간다고 했다. 젊은 청년이면 무조건 잡아다가 흠씬 두들겨 팬다고 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군홧발로 차고 몽둥이로 매타작을 벌인다고 했다. 심지어 버스 안으로 난입해 승객들도 구타한다고 했다. 잔혹한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몇몇 집에서는 돌아오지 않은 아들의 행방을 찾아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광주 시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악에 받치기 시작했다.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내리치는 군인들의 모습에 치를 떨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발로 차고 머리를 내리쳐서 실신하면 짐승처럼 끌고 갔다. 기준이 없었다. 누군가가 표적이 되면 공수부대원 서너 명이 달려들어 마구 짓이겼다. 심하게 매질을 하는 공수부대원을 만류하던 이들도 속수무책으로 얻어맞고 끌려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8일 당일 최초의 희생자는 청각 장애인이던 김경철 씨였다. 그는 시내를 돌며 구두를 닦거나 신발을 만들어 팔며 가족을 건사했다. 여느 날처럼 시내에서 일감을 찾아 다니던 그는 충장로 제일극장 골목 입구에서 공수부대원들과 맞닥뜨렸고 그중 한 명이 휘두른 진압봉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공수부대원들은 쓰러진 김경철 씨를 군홧발로 걷어차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내리찍었다. 김경철 씨와 마찬가지로 청각 장애인인 친구 두 사람도 함께 휘말려 구타를 당했다. 그들은 청각 장애인이라고 최선을 다해 의사를 전달했지만 되레 '병신 흉내를 낸다'며 더욱 심하게 구타당했다. 후에 국군통합병원으로 실려 간 김경철 씨는 19일 새벽 3시에 사망 판정을 받았다. 뒤통수가 깨지고, 왼쪽 눈알이 터지고, 오른팔과 왼쪽 어깨가 부서졌으며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졌다고 했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에겐 갓 백일이 지난 딸이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군홧발에 밟히고, 진압봉과 개머리판에 맞고, 대검에 찔리고, 총에 맞아 죽어갔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군인 수는 2만 명에 달했다.

1985년에 간행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공수부대의 학살과 함께 항쟁이 시작된 1980년 5월 18일부터 계엄군의 전남도청 장악과 함께 항쟁이 끝난 27일까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담긴 저서다. 광주 후배들의 요청에 의해 출판에 참여했다는 황석영 작가 외에 이재의, 전용호 세 사람이 공동으로 저술한 이 책은 당시 광주에서 항쟁에 참여하거나 항쟁을 목격한 이들의 생생한 진술과 치밀한 취재를 통해 재현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가장 성실한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폭동과 북한 개입설에 휘둘리며 모욕과도 같은 왜곡을 당해온 항쟁의 역사가 그나마 조금씩 숭고한 진실로 거듭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이런 기록이 존재한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첫 판본이 나온 지 30여 년이 지난 올해 비로소 개정판이 나왔다. 황석영 작가가 쓴 개정판 머리말 일부의 내용은 이렇다. "역사와 사람의 특징은 변화에 있다는 오랜 명제는 결국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의 힘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삶의 한계 때문에 한 시대는 언제나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공존하며 하루아침에 멋진 신세계가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렇다. 1980년 5월 18일로부터 37년이 흐른 지금 그나마 세상은 좀 더 나아졌을 것이다. 그날의 광주는 5·18 폭동에서, 5·18 사태로, 5·18 민주항쟁 혹은 5·18 민주화 운동으로 조금씩이나마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렇게 한동안 하소연할 곳이 없던 광주를 향해 귀를 여는 사람이 생겼고, 늘었고 그날의 광주는 조금씩 명예를 회복해가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아직도 누군가에게 그날의 광주는 북한 간첩에게 놀아난 폭동에 불과할 것이다. 올해에도 공무원 학원가엔 5·18 유공자들이 가산점을 받는 특혜를 누리니 아무리 공부해도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전단지가 유포됐다. 지난 몇 년 동안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장에서 공식 추모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정권이 허락하지 않아 제창할 수 없었다는 건 현재 진행형의 모욕이다. 그리고 우린 1980년 5월 18일 이후에도 수많은 5·18을 목격해왔다.

용산구 철거민들이 불길에 휩싸인 용산 참사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팽목항에서, 광화문에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 농민에게서, 나는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를 봤다.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지 못한 국민의 울음을 방치하고 무시하는 통수권자, 절벽 같은 처지에 내몰린 이들의 절규를 진압하는 공권력, 개인의 자유와 시민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는 국가 권력에 편향해 함께 손가락질하고 침 뱉는 세력.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고, 전두환을 비롯해 당시 계엄군에서 광주 탄압을 지휘했던 이들은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여전히 광주의 역사를 왜곡하려 시도하는 무뢰배 같은 존재들의 무례함 같은 것을 세월호 유가족이 있는 광화문 광장에서도 손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어쩌면 위로받지 못한 자들의 시대를 우리는 너무나 무덤덤하게 건너와버린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결국 위로조차 받지 못한 채 국가와 사회로부터 방치된 이들은 서로의 상처를 맞대고 연대하며 가까스로 시대가 나아지길 버텨온 것일지도 모른다. 진도의 팽목항에 '5·18의 엄마가 4·16의 엄마에게'라는 제목으로 내걸린 펼침막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올해 5·18 민주화 운동 기념사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새 정부는 5·18 민주화 운동과 촛불 혁명의 정신을 받들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온전히 복원할 것"이라 천명했다. 담담해서 되레 뜨거운 말이었다.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를 위로하는 건 아직 늦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날의 명예를 복원한다는 건 결국 이 땅에서 손쉽게 쓰러져간 숭고한 가치를 다시 일으키는 최초의 작업이 될지도 모른다. 더 이상 아프고 미안한 날이 아니라, 기념할 만한 역사로 바로 세워야 한다. 전라도의 빨갱이 폭도들이 설쳐대던 날이라는 부지깽이 같은 언어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역사로 자리 잡아야 한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5월 18일은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중학교 1학년 시절, 5월 18일에 봤던 그 벽 앞에 다시 서 있을 것이다. 그 벽 앞에서 더 이상 죄인이 아닌 증인으로 서고 싶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5월 18일에는 산 자로서 마땅히 더욱 살아갈 만한 세상이라 믿을 수 있길 바라며,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그 노래처럼.

<에스콰이어 코리아>에 실린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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