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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가족을 만나게 될 세월호 미수습자 9명

  • 김도훈
  • 입력 2017.03.23 06:34
  • 수정 2017.03.23 06:40
ⓒ뉴스1

세월호가 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3월 23일, 배를 탔으나 아직 내리지 못한 미수습자 9명의 가족들은 1073일째 애끊는 기다림을 시작했습니다. 깊은 바닷 속 보이지 않지만 거기엔 사람이 있습니다.

단원고 남현철·박영인·조은화·허다윤 학생, 단원고 고창석·양승진 선생님, 여섯살 혁규와 아빠 권재근씨, 이영숙씨…. 가족의 품으로 모두 돌아갈 때까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9명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드립니다.

■ 단원고 2학년 6반 남현철

음악을 좋아하고 기타 연주를 즐겼습니다. 참사 한 달여 뒤 수색 작업이 지지부진하자, 아빠 남경원(48)씨는 외아들이 빨리 나오길 기원하며 기타를 사고 해역 가까이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아빠 엄마는 죽을 때까지 너랑 함께 살아갈 거야.” 기타에 이런 문구를 써 두었죠. 현철이는 글도 잘 썼습니다. 세월로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2학년 이다운 학생의 곡으로 가수 신용재씨가 부른 ‘사랑하는 그대여’의 노랫말이 그의 작품입니다.

“지금쯤 그대는 좋은 꿈 꾸고 있겠죠. 나는 잠도 없이 그대 생각만 하죠. 그대의 어깨를 주물러주고 싶지만 항상 마음만은 그대 곁에 있어요. 사랑하는 그대여 오늘 하루도 참 고생했어요. 많이 힘든 그대. 힘이 든 그댈 안아주고 싶어요. 오늘도 수고했어요.” (‘사랑하는 그대여’ 가사 중)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동안, 아빠는 지병이 도져 목포와 진도를 오가며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엄마도 몸이 약해져 몇 차례 쓰러졌습니다.

■ 단원고 2학년 6반 박영인

집안일을 자주 돕고 엄마·아빠와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장난치기를 좋아한 둘째 아들. 부모님의 주말 여행도 자주 따라 나섰습니다. 어머니 김선화(47)씨 휴대전화엔 여행지에서 찍은 가족사진이 가득합니다.

운동을 좋아한 영인이는 체대 진학을 꿈꿨습니다. 아빠는 아들과 야구 경기를 자주 봤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사달라고 한 축구화를 못 사준 일이 가슴에 맺혔습니다. 축구화를 마련해 ‘사랑하는 내 아들 너를 기다리는 모든 이의 따뜻한 품으로 어서 돌아오렴. 사랑한다’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영인이는 애타는 부모님에게 가방을 보냈습니다. 참사가 있었던 2014년 추석 직후 영인의 가방이 올라왔지요. 어머니는 가방 안에 있던 운동복을 깨끗이 빨아 보관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5일은 영인이의 생일이었습니다. 아직 집에 가지 못한 그의 스물 한 번째 생일상은 팽목항에 차려졌습니다.

■ 단원고 2학년 1반 조은화

“옷 입고 들어와 갖고 문 열더니 엄마 나 안 보고 싶었냐고. 그래서 제가 은화를 끌어안고 한참 울었습니다. 엄마가 너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다고. 엄마가 너 정말 사랑한다고. 둘이 끌어안고 한참 울다 가더라고요.” (엄마 이금희씨 ‘한수진의 SBS 전망대’ 인터뷰. 2015년 4월16일)

은화는 다정하고 속 깊은 딸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한테 뽀뽀부터 했고, 문자나 카카오톡을 하루에도 몇 번씩 보냈습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엔 비용이 32만7000원이나 된다고 미안해했습니다. 은화의 꿈은 회계 담당 공무원이었습니다. 수학을 좋아했고,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는 우등생이었죠. 지난해 2월 엄마는 배를 타고 세월호 근처에 갔을 때 따개비를 가져와 은화 책상 위에 두었다고 합니다. 은화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물건이라고 여겨져, 그마저 가져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 단원고 2학년 2반 허다윤

다윤이는 부모님께 용돈을 달라거나 물건을 사달라고 조른 적이 없다고 합니다. 희귀병을 앓는 엄마 걱정이 많았던 딸. 털털한 성격에 또래들처럼 꾸미는 데도 별 관심이 없어 아빠가 먼저 화장품을 사주곤 했다죠. 수학여행을 떠나면서는 아빠의 검정 모자가 마음에 든다며 그 모자를 가져갔구요. 아빠가 사준 얼굴에 바르는 로션이 아직 많이 남았을 때였습니다. 유치원 선생님을 꿈꿨습니다. 교회 주일학교에서 다문화가정 자녀들을 보살피는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어린 시절 물놀이 사고를 겪어, 물을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그런 다윤이를 바다 속에 둘 수 밖에 없는 부모의 심정은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엄마 박은미(47)씨는 참사 뒤 오른쪽 청력을 잃었습니다. 심한 스트레스로 뇌압이 상승했기 때문입니다. 수학여행 전 다윤이네는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하필이면 2014년 4월16일 사진관에서 찾아오기로 한 사진이었습니다. 사진 속 다윤이는 평소 좋아하던 노란색 조끼를 입고선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 단원고 고창석 선생님

체육을 담당했던 고창석(실종 당시 40) 선생님은 세월호가 기울자 자신의 구명조끼를 제자들에게 벗어주며 ‘탈출하라’고 외쳤습니다. 고슴도치처럼 머리가 짧아 ‘또치쌤’으로 불렸던 선생님은 참사가 일어나기 한 달 전인 2014년 3월 단원고로 부임했습니다. 인명구조 자격증이 있고 수영도 잘했지만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에겐 교사인 아내(38)와 어린 두 아들이 있습니다.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라면 견디고 견딜테니 제발 가족 품으로 돌아와줘. 기다리는 것 밖에 못해 미안해. 다시 만나면 절대 헤어지지 말자…” (고 교사 아내의 편지 <문화일보> 2014년 6월13일)

■ 단원고 양승진 선생님

교직에 몸담은 지 30년이 된 양승진(실종 당시 57) 선생님도 제자들 구조에 발벗고 나섰습니다. 구명조끼를 학생들에게 벗어 준 채 “갑판으로 나오라” 외치면서, 자신은 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합니다. 2013년 단원고에 부임해 사회 과목을 담당했고 ‘학생주임’을 의미하는 인성생활부장도 맡았습니다. 학창 시절 씨름선수로 활동할 정도로 건장했기에,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자주 담당했습니다.

아내 유백형(56)씨가 기억하는 남편은 정 많고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월호 시시티브이(CCTV)에 찍힌 그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습니다. 참사 1년 뒤, 아들의 대학 졸업식에 아버지는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아내의 소원은 남편 뼈조각이라도 찾아 따뜻한 곳으로 보내주는 겁니다.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오고 있는 3월23일은 부부의 결혼기념일입니다. 다음날인 24일은 선생님 생일입니다.

■ 이영숙씨

이영숙(실종 당시 51)씨에겐 ‘아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일찍 남편을 잃은 그는 생계를 위해 고등학생이었던 외아들을 시댁에 맡기고 타지에서 일을 했습니다. 제주에 일자리를 구한 어머니와 부산에서 살던 아들(32)은, 2015년 제주에서 함께 살기로 했었지요. 등산도 하자고 했었습니다. 영숙씨가 세월호를 오른 건 인천에 남아있던 이삿짐을 제주로 옮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들은 여전히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태껏 안 나오는 것 보면 어머니는 저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안 나오는 것 같거든요. 좋은 모습만, 기억만 아들에게 남겨주기 위해서 그런 거 같아요. 이제 겨울이 오고 어느 순간이 되면 수색도 끝날 테지만 끝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일 힘든 사람은 어머니 당신이니까요.” (이영숙씨 아들, <미디어오늘> 2014년 9월3일)

■ 혁규와 아빠 권재근씨

여섯살 혁규는 한 살 터울 여동생, 엄마·아빠와 제주로 이사를 가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힘들게 생계를 꾸리던 권재근(실종 당시 50)씨, 베트남이 고향인 엄마 판응옥타인(사망 당시 29·한국이름 한윤지)씨는 제주 귀농을 준비해왔었죠. 단란했던 가족은 그날 이후, 희생자·생존자·미수습자란 이름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단원고 학생들과 일반인 승객들이 구조해 낸 동생은 오빠가 구명조끼를 벗어 입혀주었다고 했습니다. 아빠가 돌아와 무등을 태워주기만을 기다리던 어린 딸은 초등학생이 됐습니다.

재근씨 형 권오복(63)씨는 생업을 접고 3년째 팽목항을 지키며 동생과 조카를 기다립니다. 가족은 아니지만, 길거리에서 어린 아이를 볼 때마다 혁규를 떠올린다는 단원고 생존학생도 있습니다. 아수라장이 된 배 안에서 혁규가 물었다고 합니다. “형 우리 죽어요?” 학생이 답했습니다. “형아가 너 살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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