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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3월 19일 14시 16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3월 19일 14시 16분 KST

김기덕은 어떻게 거장이 되었나

huffpost

비통과 분노를 지나면 찾아오는 첫번째 반응은 일단 자책. 김기덕의 행각이야 (필자를 포함한) 영화계도 대충 다 알고 있던 사실이므로, 우리 또한 그 방관자이자 공범이므로.

이른바 ‘거장’이었으나, 피해자들의 증언과 영화계에 숱하게 떠돌던 풍문이 사실이라면 성폭행범이기도 했던 김기덕에게 분노는 당연한 것이나, 그의 작품에도 당연한 걸까? 그 성폭행 행각의 가림막이 되어주었던 거장의 그 위대한 작품들에도?

사람들은 창작자의 도덕행위와 예술행위, 작가의 인격과 작품의 품격은 분리된다고들 말한다. 옳으나, 언제나 옳은 말은 아니다. 장르나 상상력의 중개가 최소화되어 작가 자신의 일상이 매 작품의 소재가 되는 식으로, 작가의 자아와 작품의 정체성이 분리 불가능한 유비를 이루는 작가군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김기덕의 경우가 딱 그렇다.

뉴스1

사실 너무나 자명하여 대부분의 관객은 이미 느끼고 있던 바다. 김기덕의 영화는 가해자의 시선이다. 그 주인공은 으레 강간범이다. 김기덕 영화는 가해자가 구원자가 되기 위해 일부러 죄를 만드는 물구나무선 기독교주의 혹은 계획경제 사디즘의 알레고리다. 물론 한국 영화는 100년 동안 ‘죄’라는 테마를 다루어왔지만, 그건 으레 가해자들이 도망가버린 공터에 남겨져 그 죄를 떠안은 피해자들의 시선을 통해서였다. 김기덕 영화는 그와 정반대다(최소한 <파란 대문>부터는). 김기덕 영화에서 죄는 더 큰 구원과 용서를 위해서 일부러라도 커져야 하는 것이었고, 여자는 더 성녀가 되기 위해 일부러라도 더 창녀가 되어야 했다. 강간범의 자의식인 것이다. 지금 막 지어낸 평론이 아니다. 일반 관객은 모두 느끼고 있었다. 비록 번드르르한 개념과 논리로 풀지 않았을 뿐 본능적 불편함으로 객석에서 이미.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미투 이전에 이미 스크린에서 자명했던 것 또한 사실이라면, 남은 질문은 ‘작품과 작가가 어떻게 분리되는가’가 아니라, 반대로 ‘작품과 작가가 그리 분리가 안 됐는데, 어떻게 분리를 시켰는가’일 게다. 즉 ‘거장의 영화가 아닌데, 어떻게 그 작가는 거장이 되었는가’일 게다.

해외 영화제 심사위원님들께선 자의식에 버무려진 오리엔탈리즘과 아리랑 드립에 속았다고 치자. 오리엔탈리즘에 면역력이 있을 동양 평단은 무엇에 속았을까? 반대로 사대주의? A급 국제영화제 수상 만만세주의? 평범한 관객들은 이미 다 알아채던 것을 엘리트가 어떻게 속을 수 있었을까? 속았다는 표현에 기분 나쁜 영화계 관계자가 계시겠으나, 삭이기를 권한다. 김기덕 앞에 붙은 ‘거장’이라는 딱지에 우리 모두 책임이 있으므로, 바로 그 ‘거장’ 딱지가 가해자의 논리가 기고만장 자라날 수 있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해주었으므로, 그리하여 영화가 창작자의 성폭력 행각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되어도 좋다는 공인인증서 역할을 해주었으므로. 무엇보다도 속았다고 변명하기엔 스크린만으로도 너무나 자명했으므로.

결국 한국 영화계, 우린 너무 침묵한 건 아닌지. 이미 너무 많은 희생과 눈물이 비집는 지금, 다음처럼 외치기엔 우리의 펜과 혀는 이미 너무 늦은 건 아닌지. ‘김기덕, 거장 아닙니다. 원래부터 아니었습니다. 그가 강간범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영화가 강간범의 자의식에 기생해왔기 때문입니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