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2020년 09월 30일 10시 03분 KST | 업데이트됨 2020년 09월 30일 11시 14분 KST

'가부장제 종합세트' 명절에 피 한방울 안 섞인 며느리가 행복해지는 방법 : 기혼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놀이터 '부너미' 인터뷰

이제 '고부 갈등'말고 '고부 연대'를 보여줘야할 때다.

HUFFPOST KOREA/이소윤
'부너미'는 기혼 페미니스트 여성들을 위한 놀이터로 독서 모임, 글쓰기 모임, 출판 프로젝트를 운영하면서 '곁을 바꾸는 페미니즘'을 추구하는 모임이다. 왼쪽부터 유지은, 이성경, 이예송 쌤(부너미에서 서로를 부르는 호칭)

며느리에게 명절은 어떤 날일까. 그저 피하고 싶은 날일까. 질문을 다시 해보자. 페미니스트 며느리라면 어떨까. 그들에게도 명절은 고통스럽지만 참아야 하는 날일까. 추석을 앞두고 기혼 페미니스트 모임 ‘부너미’를 만난 건 이런 의문 때문이었다. 부너미는 기혼여성들이 모여 페미니즘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다. 2017년 12월 만들어졌다. 읽기만 하는 게 아니다. 글도 쓴다. 두 권의 에세이집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공저)가 그 결과물이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9월,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부너미’ 이성경 대표와 유지은 쌤(부너미 회원끼리 부르는 호칭), 이예송 쌤을 만났다. 명절 때문에 고통받는 한국 며느리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으냐고 묻자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개념 있는 며느리’라는 환상부터 내려놓으세요.” 인터뷰가 진행된 1시간 40분 내내 그들은 화기애애했고, 자주 웃었다. 지금부터 그들의 유쾌한 대화를 들어보자.

부너미
글쓰기 활동을 하는 '부너미' 멤버들

- 이번 추석은 코로나19 때문에 가족을 만나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어떻게 보내기로 하셨나요?

성경 : 어머님이 이제 저를 잘 파악하셨나봐요.(웃음) 시어머니가 먼저 오지 말라고 연락하셨어요. 이번 추석에는 부너미 쌤들과 함께 등산을 할 계획이에요.

지은 : 저는 시가가 차로 10분 거리여서 안 갈 수가 없어요. 그래도 동등한 명절을 보내고 있어서 명절이 즐거워요.

- 며느리인데 명절이 즐겁다고요? ‘동등한 명절’은 어떤 거예요?

지은 : 음식을 안 만드는 대신 맛있는 걸 사서 먹어요. 설거지도 돌아가면서 하고요. 어머님이 이젠 남편과 아주버님한테 설거지하라고 눌어붙은 프라이팬을 쓱 주세요. 처음엔 남편이 시가에서 설거지했다가 한바탕 난리가 났었는데 말이죠.(웃음)

성경 : 시어머니하고 저는 평화와 균형을 찾았어요. 명절에는 ‘음식’보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이야기하고, 소식 전하는 게 중요하다고 합의한 거죠.

″‘못 가겠다’는 연락과 안부전화는 남편이 해야 하는 것”  

HUFFPOST KOREA/이소윤
'부너미' 회원 예송쌤,성경쌤,지은쌤(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과 함께한 뜨겁고도 유쾌한 인터뷰 현장

- 일반적으로는 며느리들이 시가의 “오지 말아라”는 연락을 기다린다고 해요.

지은 : 왜 ‘남편’이 나서서 말하지 않을까요? 시가(큰집)에서 피를 안 나눈 사람은 며느리밖에 없잖아요. 대표로 얘기해야 하는 사람은 며느리가 아니라 남편이에요.

예송 : 제가 아무리 페미니스트에 결혼 4년 차여도 “가기 싫습니다”라고 대놓고 말하긴 힘들어요. 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각자 부모님께 하는 게 맞다고 봐요.

- 시어머니가 연락을 자주 해서 난감한 적 있었나요?

성경 : 친정엄마나 친한 친구와도 통화를 잘 안 하는 편인데, 결혼 초에는 시어머니가 연락을 많이 하셨어요. 시어머니한테 “바빠, 끊어”라고 말하기 힘들어서 그냥 전화를 안 받았어요. 대신 남편한테 자주 전화하라고 했어요. 이제는 연락 잘 안 하세요. ′침묵시위’가 통했나 봐요.

평등의 시작은 ‘설거지부터’ : 아주 작은 균열과 변화 

Getty images

- 결혼하고 처음 맞이한 명절은 어떠셨어요?

예송 : 남자들은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여자들만 일했어요. 그 장면을 보고 나는 명절에 더는 TV를 보며 거실에 앉아있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죠.

지은 : 어르신들에게 저는 그저 ‘새로운 며느리 1’이었어요. 당연하게 음식을 가져오라고 하는 분위기가 너무 어색했어요.

성경 : 새벽 4시에 어머님과 제가 제일 먼저 일어나 차례 준비를 했어요. ‘친자식은 왜 다 자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며느리’니까 당연히 새벽에 일어나야 할 사람이 된 거죠. 그 순간 다짐했죠. 자식이 안 일어나면 나도 안 일어나겠다고.  

- 부너미가 지향하는 페미니즘은 ‘곁을 바꾸는 페미니즘’이에요. 가부장적인 명절 문화를 긍정적이고 평등하게 바꾸기 위해서 어떤 시도를 하셨나요?

성경 : 어떻게 하면 모두가 즐겁게 지낼까 고민해요.어머님도 차린 음식이 없으면 불편해하세요. 그래서 남편이 치킨을 자주 사 와요. 명절에 거하게 차려 먹는 문화를 바꿨어요. 해 먹으면 서로 힘들고 누가 설거지하나 눈치 보게 되잖아요.

지은 : 명절에 외식하자고 하면 싫어하실 어머님은 없어요. “반드시 한국의 전통문화를 이어나가자”는 분이 아니면요. (웃음)

예송 : 어머님들도 처음엔 어떻게 사 먹느냐고 얘기하실 지 몰라요. 하지만 다음에는 못 이기는 척 “너희가 먹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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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너미에서 쓴 두권의 책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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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균열’을 내는 게 중요하다고도 얘기하셨어요. ‘균열’이란 뭘까요?

예송 : 저한테는 ‘설거지’였어요. 집안(명절) 문화를 며느리가 개혁한다는 건 한계가 있어요. ‘남자’가 무슨 설거지냐는 소리를 뒤로 하고 남편이 나서서 꿋꿋이 설거지해야 해요.

지은 : 친정에서 남편도 가사노동을 해야 한다고 하니 엄마가 기겁하셨어요. 우리 부부의 방식이라고 엄마를 설득했죠. 그랬더니 제부와 아빠도 일하더라고요. 다 같이 가사노동에 참여하니 분위기가 좋아졌어요.

성경 : 설거지 하나가 변화를 만들어요. ‘설거지 한 번인데’가 아니라 ‘설거지 한번’이 중요한 거죠. 명절은 ‘가부장제 종합선물세트’잖아요. 아이한테도 함께 일하고 즐기는 ‘장면’을 보여주는 게 중요해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자가 ‘도련님’이라고 부르면서 밥 차려주는 모습을 보고 뭘 배우겠어요?

부너미
글쓰기 모임하는 '부너미' 회원들

- ‘도련님’이 나왔으니 말인데, 가족 내 호칭도 문제잖아요. 시가 식구들을 부르는 호칭, 어떻게 생각하세요?

성경 : 어느 날 아이가 문제제기를 했어요. 왜 친할머니한테는 친할 친(親)이 붙고, 외할머니는 바깥 외(外)자가 붙냐고요. 그래서 ‘친할머니’, ‘외할머니’라는 호칭 대신 지역을 붙였어요. ‘서천’에 사는 할머니는 ‘서천’ 할머니, ‘광주’에 사는 할머니는 ‘광주’ 할머니 이렇게요.

예송 : 저희 부모님은 ‘용산’ 할머니, ‘용산’ 할아버지로 불려요. 아이 낳고 부너미 모임을 시작해서, 처음부터 아이한테 가르쳐줬어요. 부모님이 정말 좋아하셨어요. ‘외가’는 왠지 멀게 느껴지잖아요. 

이제 ‘고부 갈등’ 대신 ‘며느리 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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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너미'는 코로나19로 읽기와 쓰기 모임을 잠시 중단했다. '걷는 부너미(운동하고 토론하는 모임)' 활동을 주로 한다. 이번 추석에도 '걷는' 부너미 활동을 할 예정이다.

- 사실 시어머니도 한 명의 며느리로 살아오신 거잖아요. 시어머니가 변화를 만든  경우는 없었나요?

성경 : 어머님이 산소와 차례를 없애셨어요. 당신도 며느리로서 불합리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나서서 없애신 거죠.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의 노동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때 ‘고부 연대’를 느꼈어요.

- ‘고부 연대’라는 말이 확 와닿네요.

성경 :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는 여성으로서 공통분모가 훨씬 커요. 시어머니가 나서서 제사 없애는 경우가 많아요. 그걸 막는 게 ’남자들’이고요. 보통은 시어머니들 생각이 훨씬 유연하세요.

지은 : 맞아요. 호텔에 명절 음식 세트가 나온다는 기사를 어머님께 보내드렸어요. 어머님이 식구들한테 기사 얘기를 하시면서 좋아하시더라고요. 어머님들도 요리하기 힘든 건 똑같아요.

부너미
페미니즘 강연을 듣고 토론하는 '부너미' 회원들 

- ‘90년대생 며느리’가 나오는 시기예요. 시가 문화, 며느리 역할 등에 변화가 많을 거예요. 평등한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조언해줄 말이 있다면?

성경 : 시가를 어려워 말고 하고 싶은 말 하세요. 어른들이 이상하게 보겠죠. (웃음) 이상하게 보이는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자신이 어떤 부분까지 수용할 수 있을지 경계를 빨리 파악하는 것도 중요해요. “‘요즘 며느리’ 같지 않고 참하고 말 잘 듣네”라는 말은 칭찬이 아니에요. “나는 요즘 며느리 같지 않다”고 버티다가 나중에 ‘태세 전환’하기 힘들어요.

예송 : 결혼은 둘이 같이했잖아요. 혈혈단신으로 혼자 싸우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 며느리만 노력해서 될 일은 아닌데, 어른들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성경: 사위한테 못하는 말은 며느리한테도 하지 말고, 사위 대하듯 며느리를 대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사위가 무표정하면 “피곤할 테니 쉬라”고 하면서 며느리가 무표정하면 “넌 왜 살갑지 않냐”고들 하죠. 사위가 전화하면 “고맙다”고 하면서 며느리는 찾아뵙기까지 해도 당연하게 생각하고요. 며느리도 사위처럼 ‘백년손님’으로 생각하시면 돼요. 며느리들이 상처받고 힘들어서 명절에 안 가면 너무 슬프잖아요. 

- 이 땅의 며느리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성경 :결국 ‘여성 연대’예요. 며느리 입장은 며느리가 더 잘 알아요. 친정에서는 시누이로서 얘기할 수 있고요. 친정엄마한테 “엄마, 이러면 둘이(남자형제 부부) 못 살아” 말해주는 거죠. 여성 연대는 어디에서나 유용하다는 걸 기억하세요.

예송 : 며느리끼리도요. 같이 쉬자고 했는데 누군가가 “저는 일할 거예요” 하면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잖아요.

성경 : 며느리들이 힘을 합하면 못 할 게 없어요. 밥 안 하겠다는데 외식해야지 어쩌겠어요? 명절에 가게 문 다 열어요.

지은 : 그럼요. 대목인데요!

 

이소윤 에디터 : soyoon.lee@huffpos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