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을 선고받고도 형이 집행되지 않은 사형수가 52명에 이르는 가운데,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는 한국이 사형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다.
국내 교정시설에 수감된 미집행 사형수 52명의 평균 연령은 58.7세라고 법무부는 밝혔다. AI로 생성한 이미지.
세계 사형폐지의 날(10월10일)을 나흘 앞둔 6일 법무부는 현재 국내 교정시설에 수감된 미집행 사형수는 52명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58.7세로, 사형수의 고령화 흐름이 뚜렷하다.
2024년에는 '보성 어부 연쇄살인 사건'의 오종근이 지병을 앓다 87세로 사망했고, 올해 3월에는 조직원과 그의 연인을 살해한 '안양AP파' 이우철이 65세로 광주교도소에서 암 투병 중 숨졌다. 1992년 강원 원주의 한 종교시설에 불을 질러 15명을 숨지게 한 원언식(69)은 35년째 교정시설에 수감돼 국내 최장기 사형수로 남아 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과 강호순 등도 사형이 확정됐지만 형이 집행되지 않은 채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사형제는 법률상 존재하지만 실제 집행은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실질적 사형폐지국'에 이르기까지
김대중 전 민주당 의원이 1980년 8월14일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내란음모사건' 첫 공판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이 이처럼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실질적 사형폐지국'이 된 데에는 과거 사형제의 부작용을 직접 경험한 역사도 배경으로 작용했다.
한국은 김영삼 정부 임기 마지막 해인 1997년 12월30일 지존파 조직원 등을 포함한 23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한 이후 현재까지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사형 집행을 중단한 데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향이 지대하다. 김 전 대통령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국제사회의 강력한 구명과 사형 집행 중단 요구가 이어지면서 전두환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거쳐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미국으로 강제 망명길에 올랐고, 나중에 서울고등법원 재심에서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으며 23년 만에 완전히 명예를 회복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사형제도가 안고 있는 위험성은 정치적 사건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박정희 정권 당시 발생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에서는 무고한 사람들이 사형을 선고받은 뒤 확정 판결 18시간 만에 처형되는 이른바 사법살인이 벌어졌다.
이 같은 과거의 경험은 김 전 대통령이 생명권과 인권의 관점에서 사형제도를 바라보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대통령 재임 당시에도 사형 집행을 승인하지 않았고,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사형 집행 중단 기조를 이어갔다.
사형 집행이 중단된 지 10년째가 되던 2007년 12월30일에 천주교인권위원회, 국제앰네스티한국지부 등 국내 인권·시민단체와 종교계는 한국을 사실상 사형폐지국가로 선언했다. 이후 한국은 법률상 사형제를 유지하면서도 실제로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국가로 자리 잡았다.
세계 사형제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나?
미국 텍사스주 포트후드 미군기지 총기난사 사건 범인 니달 하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6일(현지시각) 니달 하산의 총살형 집행을 명령했다. 미국에서 총살 사형 집행은 2차 대전 이후 처음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최근에는 일부 국가를 중심으로 사형 집행이 다시 늘어나는 등 폐지 흐름에 역행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살펴보면 사형제 폐지는 꾸준히 늘고 있다.
2025년 말 기준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제를 완전히 폐지한 국가는 113개국으로, 2015년 102개국에서 10년 사이 11개국 늘었다. 법률상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10년 이상 집행하지 않은 '실질적 사형폐지국'까지 포함하면 사형제를 폐지한 국가는 145개국에 이른다.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한 번 집행된 형벌을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이다. 재판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거나 증거가 조작되고 허위 자백 등이 밝혀지더라도 이미 처형된 사람을 되살릴 수 없다. 사형제 폐지론자들은 이러한 '돌이킬 수 없는 오류'가 사형제도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사형이 다른 형벌보다 범죄를 효과적으로 억제한다는 명확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도 폐지론의 근거로 거론된다. 오히려 장기 수감과 교정 프로그램, 사회 안전망 강화 등을 통해 재범을 막는 방식이 사회 안전을 확보하는 데 더 실질적이라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다만 미국에서는 이 같은 국제적 흐름과 다른 움직임도 나타났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6일(현지시각) 2009년 11월5일 미국 텍사스주 포트후드 기지 총기난사 사건을 저지른 니달 하산 전 미 육군 소령에 대한 사형 집행을 총살형으로 승인했다.
미국 내에서 미군의 사형이 집행되는 것은 1961년 4월13일 강간 및 살인미수 혐의로 존 베넷 이등병을 교수형에 처한 이후 65년 만이다. 총살형 집행으로는 1945년 11월9일 이후 약 80년 만이다. 인권 진영에서는 이를 두고 사형제의 부활을 넘어 총살이라는 잔혹한 집행 방식까지 되살리는 것이라며 '인권 후퇴'라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늙어가는 사형수... 사형 대신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대안 될까
법조기자단이 수용자의 하루 일과를 직접 체험하고 있다. ⓒ연합뉴스
수십 년 동안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들의 현실은 사형제의 존폐 문제와 함께 '가석방 없는 종신형' 논의를 다시 주목하게 한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은 수형자가 자연사할 때까지 교정시설에 구금하는 형벌이다. 일반적인 무기징역과 달리 사면이나 감형·가석방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흉악범을 사회에서 영구적으로 격리하는 데 초점을 둔다.
다만 이 역시 평생 사람을 가둔다는 점에서 사형에 버금가는 가혹한 형벌이라는 비판이 있다. 수형자의 교화와 사회 복귀를 중시하는 현대 형벌체계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럼에도 흉악범에 대한 영구 격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대안적 형벌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법원이 성범죄를 목적으로 여고생을 살해한 장윤기에게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을 선고한 사건에서도 이러한 논의가 다시 제기됐다. 검찰은 장윤기에게 사형을 구형했지만, 1심 재판부는 무기징역을 선고하면서 "피고인이 생존하는 동안 결코 가석방을 허용하지 않고 무기징역형을 철저히 집행하는 것만이 피해자와 유족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길이자 유사 범죄의 재발을 방지하는 방안"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현행법상 무기징역이 절대적 종신형은 아니라는 점이다. 형법 제72조에 따르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수형자도 20년 이상 복역하면 가석방 심사 대상이 될 수 있다. 법원이 아무리 장기간 사회와 격리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더라도 현행 제도 아래에서는 일정 요건을 충족할 경우 가석방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은 피해자 입장에서는 범죄자가 다시 사회에 나올 가능성을 차단하면서도, 생명을 직접 박탈하지 않는다는 점이 핵심이다. 특히 형 집행 이후 새로운 증거가 발견돼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되더라도 수형자를 석방하고 국가배상을 하는 등 사후 구제가 가능하다.
피해자와 유족 입장에서는 무기징역뿐 아니라 사형이 확정되더라도 형이 낮아질 수 있다는 불안이 남는다. 실제 사형 확정 후 특별사면이나 감형을 통해 무기징역으로 형이 낮아진 사례가 있다. 1997년 이후 대통령의 특별사면·감형으로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수형자는 모두 19명으로 알려졌다. 대구 '삼남매 살인 암매장 사건'의 김광년, 전남 '순천 모녀 살인사건'의 강종갑, 충남 '모자 살인사건'의 고흥수 등이 사형 확정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