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이후 오랜 시간을 아무 의미 없이 보내왔다는 이선민 작가.
"이 일도 제 가슴에 오래 남을 것 같다"
핍박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은 멋진 사람.
업체는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아이가 계속 먹는 것은 단순히 배고프기 때문이 아니었다.
밀라논나는 하루 아침에 수많은 동료들을 잃었다.
1994년 10월 21일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 32명이 숨졌다.
”매일 저녁에 몇십 명씩 (구조 현장에) 들어왔다" - 당시 서초경찰서 담당 형사
"여보쇼" ???
항소심을 앞두고 변호인 쪽은 거물급 전관 변호사로 교체됐다.
양승춘 하남소방서 구조대장 “사람 살리는 게 우리의 숙명” (????)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참사로 502명이 사망했다.
한 편의 영화나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2014년 7월 처음 세워졌다.
그가 중요한 사회이슈에 목소리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사망자 502명, 부상자 937명, 실종자 6명이 발생했다.
교육이 필요한 건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다
용산 참사 직후 유가족은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총 몇 명이 희생되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가족들이 제 피붙이의 생사를 애타게 찾아헤매던 저녁, 부검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검찰은 유가족의 동의 없이 시신을 부검했다.
공자님은 마구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사람은 상하지 않았나?"라고 물었다. 공자님이 말에 대해 묻지 않은 이유는 말을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람을 제일 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흑인 노예를 죽여도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 미국 링컨 대통령은 "노동은 자본에 우선하며, 자본은 노동의 과실일 따름이다.
세월호 3주기를 앞두고 정부가 약속한 416안전공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시민들 일부가 416안전공원을 도시 외곽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집값이 떨어진다느니, 안산이 세월호 때문에 낙후된 도시가 된다느니 하는 근거 없는 두려움이 또다시 시민과 유가족을 가른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416안전공원을 세우려고 하는 화랑유원지는 단원고 희생자들이 어려서부터 가족과 산책을 하고,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며 놀던 곳이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기억관은 우리 모두에게 생명과 치유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416안전공원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외곽이 아니라 시민들 속에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