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공덕동 휘발유] 설리를 잊어선 안 되는 이유, MBC '다큐 플렉스'처럼 기억해선 안 되는 이유

'다큐 플렉스' 측은 "제2의 피해자가 우려된다"며 故 설리 편 다시보기를 중단했다.

  • 라효진
  • 입력 2020.09.17 17:14
  • 수정 2020.10.16 10:29

 

 

MBC '다큐플렉스' 예고편
MBC '다큐플렉스' 예고편 ⓒMBC

故 설리는 이 사회에서 ‘논쟁적’ 존재다. 걸그룹 멤버이자 배우, 방송인이자 인플루언서로 살았던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몹시 상징적이다. 굳이 이 명제에 과거형을 쓰지 않는 건, 고인이 갑작스레 세상을 등진 지 약 1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로부터 촉발된 논쟁이 진행 중인 탓이다.

10일, MBC ‘다큐 플렉스 - 설리가 왜 불편하셨나요?’(다큐 플렉스)가 방송됐다. 7월 설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방송이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이만큼의 수라도를 예상한 이는 드물 것이다. 특히 ‘설리가 왜 불편하셨나요?‘라는 부제는 고인이 무엇에 고통 받았고 무엇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 어렴풋이 추측하고 있던 대중에게 부채 의식을 상기시키기 충분했다. 또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투쟁의 역사‘라 평했던 설리의 삶을 통해 여전히 바뀌지 않은 것들을 되짚어볼 필요도 있었다. 이는 대중이 ‘다큐 플렉스’ 설리 편을 환영하진 않았지만, 방송을 반대하지도 않은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다큐 플렉스‘는 ‘최진리, 설리가 되다‘, ‘스무 살 설리, 성인이 되다‘, ‘설리, 논란에 몸을 던지다’, ’25세, 무지개 너머로’ 등의 소주제로 설리의 25년을 성찰 없이 쪼개며 생전 고인을 괴롭혔던 지난한 입씨름을 기어이 재현하고야 말았다. SBS ‘서동요‘에서 배우 이보영의 아역으로 데뷔한 ‘최진리‘의 얼굴 칭찬으로 막을 연 방송은 그가 얼마나 ‘공주처럼 화려하고‘, ‘예뻤고‘, ‘밝았는지‘ 침을 튀기며 설명한다. 심지어는 온라인에 퍼진 설리의 초등학교 시절 글 ‘나에 대해서’를 고인이 그토록 아름다웠음을 방증하는 증거로 활용한다.

나도 내가 예쁘지만 사람들이 왜 나를 예뻐하는지 잘 모르겠다. 원래 가수 같은 사람이나 예쁜 게 아닌가? 우리 교회에는 나보다 예쁜 사람이 아주 많은데 왜 나만 귀여워하고 예뻐할까? 난 사람들의 그런 점이 정말 싫다. 내 이름을 가르쳐 줘도 이름까지 예쁘다 하고... 진짜 내가 예쁜가?

설리가 생전 출연한 다수의 방송에서 언급된 글이다. 그가 어떤 괴로움을 품고 있는지 몰랐을 때, 대중은 이 글을 ‘미녀는 괴로워’ 정도의 투정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다큐 플렉스‘를 준비하며 방송된 것보다 설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을 제작진이 이 글을 다룬 대목은 절망적이다. 어릴 적부터 ‘예쁨‘이라는 단어가 가진 납작한 사회적 함의에 짓눌리고 대상화됐을 아이가 세상에 던졌을 첫 의문이 이 글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점을 간과한 채, 생전 설리를 고통스럽게 한 방식 그대로 그를 소비한다. ‘다큐 플렉스‘가 설리 사후 1년 동안 그 어떤 성찰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방송 5분 만에 들통난 셈이다. ‘설리가 왜 불편하셨나요?‘라는 제작진의 질문은 결국 ‘착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 때문’이었다는 답을 유도한다.

MBC '다큐 플렉스'
MBC '다큐 플렉스' ⓒMBC

설리가 세상을 떠난 후 가장 먼저 그를 다룬 건 SBS ‘그것이 알고 싶다’였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 - 누가 진리를 죽였나‘라는 부제를 단 방송에는 설리의 친구들과 매니저들이 나왔다. 그의 한 친구는 ”최진리는 하나의 사건 때문에 그런(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은 아닐 거다. 그런 얘기는 했다. 왜 이럴까, 왜 이런 말을 할까, 왜 그렇게 보이지? 진리한테는 ‘왜’(라는 질문)가 제일 많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자유‘를 ‘관종‘으로 모는 시선과 악성 댓글을 받으며 누적된 스트레스가 ‘진리를 죽였다’는 막연한 추측이 확실해지는 부분이었다.

흥미로운 건 ‘그것이 알고 싶다‘가 설리의 인스타그램에 악플을 단 사람들을 직접 인터뷰한 대목이었다. 카메라 앞에 선 악플러들은 직접 쓴 댓글과 거기 묻은 사상들을 정당화하며 되레 목소리를 높이거나 ‘해킹 당했다‘, ‘몰랐다’고 얼버무렸다.

이날 방송에는 설리 사망이 보도되자마자 자신이 고인의 생전 남자친구였다는 거짓 영상을 올린 유튜버까지 등장했다. 그는 해당 영상이 설리 추모를 위한 퍼포먼스였을 뿐이라면서도 ”악성 댓글 때문에 너무 징징대고 그러실 거면 연예인 안 하셨으면 좋겠다”며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설리가 생전 팬들과 소통했던 라이브 방송도 다수 나왔다. 숨만 쉬어도 기사화됐던 설리였지만 그의 변명과 하소연에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태연자약하게 라이브 방송 댓글로 임신 루머를 읊어대던 악플러에게 설리는 ”제 뱃속에 애가 있냐고요? 제 뱃속엔 음식물들이 있겠죠”라고 답했다. 이건 그가 직면하는 매일의 일부분의 일부분의 일부분이었을 터다. ‘그것이 알고 싶다’ 설리 편은 이 직접적 폭로로 ‘누가 진리를 죽였는지’, 나도 공범이 아니었을지를 반성하게 하는 구성으로 공익적 의미를 획득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미덕은 설리가 끝없이 자신을 표현하고 증명하려 하는 과정이 전부 투쟁이었음을 강조했다는 데 있다. 설리가 논쟁적인 건 여성혐오와 대상화의 중심에서 ‘자유‘와 ‘나다움’이라는 화두를 던졌기 때문이다. 그는 ”시선강간이 싫다”는 의견을 내놓으면 ”누가 설리에게 ‘시선강간’ 단어를 알려줬나” 따위의 기사가 답으로 돌아오고, ”브래지어는 악세사리에 불과하다”고 말하면 ‘설리의 노브라 모음집‘이 온라인을 달구는 세상을 살았다. 차라리 조금 편하게 살았으면 좋았을걸, 하는 안타까움이 들 만큼 설리는 가시밭길을 걸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설리가 던진 화두를 가십으로 소비한 언론에도 책임을 물으며 끝까지 멈추지 않았던 그의 삶을 조명했다.

‘다큐 플렉스‘는 어떤가. 10개월이 흐른 후에 나왔음에도 설리의 모친을 등장시켜 대중이 몰라도 됐을 고인의 이야기들을 마구잡이로 들춰냈다. ‘설리가 왜 불편하셨나요?‘라는 질문과 전혀 관계 없는 고인과 그 가족의 처량한 서사가 흘러나왔다. 그러면서 모친은 설리의 첫 열애설 이후 고인과 크게 다투며 사이가 틀어졌다고 고백했다. 이후 ‘다큐 플렉스‘는 설리의 전 연인인 그룹 다이나믹 듀오 최자를 다루는데 전체 50분 분량 중 8분을 쓴다. ‘스무 살 설리, 성인이 되다‘라는 소제목이 ‘연애를 통해 여자가 됐다’는 투의 희롱식 편집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최자의 ‘ㅊ’도 꺼내지 않은 ‘그것이 알고 싶다’와 매우 다른 행보다.

제작진이 방송 직전 배포한 보도자료만 봐도 ‘다큐 플렉스‘는 처음부터 고인을 ‘짧지만 강렬했던 이슈메이커‘로 다룰 심산이었다. 여기 담긴 ‘감춰진 진실’ 같은 표현들은 설리의 일기장 노출과 극단적 선택 시도 폭로를 정당화하는 도구였다. 이 방송이 남긴 건 설리 재조명은 커녕 고인의 유족과 친구, 전 남친까지 입방아에 올린 초라한 결과다. 결국 ‘다큐 플렉스’는 15일 뉴스1에 ”기획 의도와 다르게 설리씨 주변 사람들이 악플에 시달리면서 제2의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우려한다”며 해당 회차 다시보기를 중단했다.

다시 한 번 돌이켜봐도 설리는 ‘논쟁적‘이다. 하지만 고인이 논쟁의 불쏘시개를 자처하고 괴로움을 감내하면서까지 바랐던 건 ‘나 답게‘, ‘당당한 여성’으로 있을 수 있는, ‘건강한 변화’였을 것이다. 이건 우리가 설리를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설리를 ‘다큐 플렉스’처럼 기억해선 안 된다. 설리가 만든 논쟁의 불씨가 아직 타고 있기 때문이다. 설리라는 불꽃은 언제까지 비생산적 가십으로만 타올라야 하는가.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설리 #다큐 플렉스 #공덕동 휘발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