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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2일 07시 04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22일 14시 12분 KST

내가 정말 싫어하는 농담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사학과나 민속학과 등 학생들이 과거 거리로 많이 나와 대학도 역사 과목을 많이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역사 교육이 잘되지 않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다는데, 이 말은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서 역사 과목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다. 우리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구라를 치거나, 하나로만 소급되는 역사 교육을 실시했기 때문에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던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순서를 뒤집은 황우여 장관의 말은 실패한 농담이며, 게다가 본인은 순서를 뒤집은 것조차 모르고 있으므로 내가 정말 싫어하는 농담이다.

<밑줄 긋기>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 김하나 지음, 김영사, 2015

내가 역사 관련 교양 수업을 할 때, 매 주제마다 지겹도록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를 찾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 진실'들'에 접근하는 지난한 과정이지만 어쩌면 결코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에 마주하는 한계이며, 바로 그러한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을 이해하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라는 점. 또 여기서 말하는 '가능성'이란 긍정의 가능성만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이해' 또한 동의의 뜻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 그래서 어찌보면 내 강의는 학생들에게 매우 모호하고 헷갈리는 강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역사학의 본질이 '지식'보다는 '지혜'에 있다고 생각한다. 앎으로 벽을 쌓는 수직적인 학문이 아니라, 유연함으로 지평과 시야를 넓히는 수평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이 자연스레 지혜로운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지식을 많이 쌓기만 한 사람은 꼰대가 될 확률이 더 높다. 지식은 자칫 지혜로 이어지는 통로를 가로막는 벽이 되곤 한다. 그것이 지식의 저주다. 지식과 지혜는 트랙이 좀 다른데, 그 다른 궤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태도가 유연성이다. 끝없이 새로움에 열려 있고, 자기가 아는 지식을 계속해서 수정할 수 있는 유연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 될 확률이 높다. 지혜는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정부가 단 하나의 역사교과서만을 유통시키겠다면서, 그걸 '올바른 역사교과서'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아직 이 교과서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니, 내용이 잘못됐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넘친다 등의 평을 할 수는 없겠다. 다만 궁금한 것은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않은 것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결정하느냐는 것이다. 더군다나 정부의 국정화 방침 발표가 있기 바로 전 주, 내가 했던 강의 때문에 뭔가 찜찜하다. "국사와 개인사의 방향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따위의 말을 강의에서 했던 터. 졸지에 나는 올바르지 않은 역사 강의를 한 셈이 되었다.

요즘 사람들은 가격이 싸면 '착한 가격'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소비자의 시각에서만 그렇다. 생산자가 착한 가격을 맞추기 위해 제 살 깎아 먹기 경쟁을 하든, 후려치기로 하청 업체를 우려먹든, 노동자의 비용을 제대로 안 쳐주든 말이다. 싼 가격이 착한 가격인 곳에서 제대로 친 제값은 착하지 않은 가격이 된다. 마찬가지로 날씬하면서도 육감적인 여성의 몸매를 착한 몸매라 하는 곳에서 평범한 몸매는 착하지 않은 몸매가 된다.

검인증 체제에서도 한 교실에서 여러 출판사의 교과서를 모두 사용하여 수업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그건 비효율적이기도 하거니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점에서, 그리고 국가 권력이 역사 서술에 개입할 여지를 최소화한다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 한계선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한계선을 무너뜨리려는 것이다. 하나의 프레임만을 제시하며 다른 시각은 죄다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내가 역사 또는 역사학을 특정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지금 국정화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또한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금 정부가 이야기하는 '올바름'은 다른 모든 관점'들'을 틀린 관점으로 규정하고 만다. 안타깝게도 이 올바름에 대한 욕망은, 대통령 각하께서 임기 내내 외치고 계신 '창조'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람들에게 다리를 놓으라고 하면 사람들은 '다리'만을 생각한다. 징검다리, 철교, 현수교 등등 물론 다리의 종류도 무척 다양하며, 각각의 다리 형태는 모두 새로운 아이디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왜 다리를 놓는가?'라고 반문하면 전혀 다른 각도의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나온다. '저곳까지 건너가기 위해서다'라고 하면 헤엄을 치거나, 배를 만들거나, 비행기를 띄울 수도 있다. '저곳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다'라고 하면 편지를 보내거나, 그쪽으로 가는 인편에 전하거나, 전화를 놓거나 인터넷 망을 깔 수도 있다. 방법은 무궁무진하게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는데 '다리'에 사고가 갇혀버리면 아이디어는 그 안에서만 놀게 된다. 모기 박멸에 사고가 갇혀버리면 모기장이나 바르는 모기 퇴치제는 나올 수 없다.

창의성은 경직됨과는 친하지 않다. 유연함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끌어내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프로크루스테스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자. 어디 가서 아이디어의 고무고무 열매라도 구해 먹을 일이다.

아이디어의 고무고무 열매를 구해 먹어도 모자랄 판에, 콘크리트 열매를 억지로 삼키자고 하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 물론 과거에 국가가 역사 교육을 손아귀에 꽉 쥐고 있었을 때에도, 모든 이들이 교과서를 맹신했던 것은 아니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사학과나 민속학과 등 학생들이 과거 거리로 많이 나와 대학도 역사 과목을 많이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역사 교육이 잘되지 않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다는데, 이 말은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다. 이 글에서 인용하는 책,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에는 상식을 이리저리 비틀고 때로는 순서를 뒤바꿔 만든 농담같지만(혹은 농담이어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다수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순서를 바꾼다고 좋은 아이디어가 되는 건 아니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서 역사 과목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다. 우리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구라를 치거나, 하나로만 소급되는 역사 교육을 실시했기 때문에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던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순서를 뒤집은 황우여 장관의 말은 실패한 농담이며, 게다가 본인은 순서를 뒤집은 것조차 모르고 있으므로 내가 정말 싫어하는 농담이다.

내 친구는 온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서를 간 적이 있었다. 해운대, 광안리 등 해수욕장에서 며칠 놀고 돌아가는 날, 서너살 된 어린 조카 도함이에게 친구가 물었다.

"도함아, 어제 본 바다가 좋아, 오늘 본 바다가 좋아?"

그랬더니 도함이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음...... 내일?"

이 예상치 못한 대답에 가족들은 어쩐지 흐뭇해졌고 그 이야기를 내게도 들려주었다.

선택지를 벗어난 대답을 들으면 우리 안에는 '아~'하는 반응이 일어난다. 그건 신선한 무언가를 접했을 때 느껴지는 쾌감이다. 그 쾌감은 창의성의 본질이기도 하다. '아!'하면서 우리가 갇혀 있는 줄도 몰랐던 어떤 프레임이 툭 깨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정부는 우리에게 선택지조차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어제 본 바다만이 좋은 바다'라고 강요하는 상황에서 '내일'이라는 대답이 나올 수 있을까? 최근 대학가의 대자보에서 느낄 수 있었던, 프레임이 툭 깨지는 쾌감을 계속 느끼길 원한다. 나의 쾌감을 위해서라도, 나는 '올바른 역사교과서'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트위터에서 퍼나르기(리트윗)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내용의 대자보. (원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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