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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 인터뷰] 소설가 김중혁은 우리의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 박세회
  • 입력 2015.08.31 10:06
  • 수정 2015.09.04 09:40

김중혁의 네 번째 단편집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이 서점가에서 순항 중이다.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인 '요요'를 포함, 8개의 단편을 모았다. 당장 읽어보니 이전까지의 소설집과는 많이 다르다. 뭐가 달라졌는지 펜을 들고 밑줄을 쳐가며 체크해서 꼼꼼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요새 가장 뜨거운 파티는 다 그곳에서 열린다는 을지로 3가의 '신도시'에서 그를 만났다.

김중혁과 섹슈얼리티

비오는 날 신도시의 옥상에 선 김중혁.

저희로서는 소설가 인터뷰가 처음입니다. 소설을 읽고 궁금한 건 많은데 만족스러운 인터뷰가 없어서 만나야 했어요.

저로선 이게 이번 소설에 관한 마지막 인터뷰에요.

이 인터뷰에서는 정말 김중혁의 소설에 관련된 얘기만 하지요. 근데 이게 연애소설이에요? 왜 연애 소설이라고 광고가 붙은 거죠?

약간 농담 같은 거였는데요. 예전 소설에는 한 번도 비중 있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 소설집에서는 꽤 많더라고요. 편집자랑 얘기하다가 '김중혁의 네 번째 소설집, 첫 번째 연애소설집'이라고 하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괜찮겠다고 하더라고요. '낚여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데이트하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도 연애지만 막 시작하기 전, 다 끝나고 나서 증오하거나 서로 질투하는 것도 연애라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그때가 가장 성적인 긴장감이 고조된 시기이기도 하죠. 전 이전까진 김중혁의 소설에선 항상 두 개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성적인 코드와 정말 제대로 된 '악의'가 없었죠. 이번 소설은 '긴장감'을 성적으로 고조시키는 순간도, 제대로 된 악의도 등장해요.

섹슈얼리티가 없다는 얘기는 일본의 시마다 마사히코에게도 들었어요. '넌 왜 섹슈얼리티가 없느냐'고. 이번 소설들에선 직접적은 아니지만, 은근히 드러났죠. '악의'가 없는 이유는 제가 만들고 싶은 세계는 악의적인 인간을 배제한 세계여서인 것 같아요. 그런데 최근 '씨네 21'에 인간의 몸과 뇌에 관한 글들을 많이 썼더니 그런 게 조금씩 나오는 것 같아요. 질투, 분노 같은 거 말이죠. 그래도 아직 강렬한 감정, 예를 들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부숴버리겠다는 '복수'같은 감정에까지 다다르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이번 소설집은 기법이나 형식 면에서 할 말이 참 많아요. 첫 단편 '상황과 비율'에선 지난번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에서 사용했던 인물이 물리적으로 교차하면서 화자의 시점이 함께 이동하는 전략을 썼어요.

그 시점의 이동을 부드럽게 하려고 맥거핀을 넣었어요. 중간에 볼품없는 젖가슴을 가진 아줌마가 등장하는 이유에요. 서로 다른 인물을 중심에 둔 삼인칭을 병치하기보다는 시점이 교차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등장인물과의 거리

비오는 날 을지로3가 만선호프 쪽을 바라보는 김중혁.

이 소설뿐 아니라 다른 소설들에서도 등장인물과 화자의 거리 조절에 아주 큰 노력을 기울인 게 보여요. 어차피 소설에선, '작가는 모든 걸 알고 있는데, 무엇을 언제 보여주고 들려줄 것인가'가 중요한 거잖아요?

예전에는 단편소설에서 1인칭이 편했는데, <1F/B1> 때부터 3인칭이 더 편하더라고요. 이번 소설집에선 더욱 그랬고요. 등장인물에게 동일한 정보를 나눠주고 작가인 나만 그 정보를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개별적인 이름으로 불러들이는 게 더 편해졌어요. 장편도 그렇게 쓰다 보니까 그게 더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작품집 가장 뒤에 나오는 인물 크레딧에 아주 소소한 배경 인물까지 들어가 있는 거군요.

그건 사실 이번에는 모든 인물이 각각의 작품에 겹치는 소설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면 아까 '상황과 비율'에 등장했던 청소 아줌마가 등장하는 다른 소설도 하나 쓸 계획이었거든요.

알트만의 영화처럼 말이죠?

그렇죠. 그러다 중간에 무리다 싶어서 그만뒀죠. 그래서 나중에 어쨌든 8편의 소설이 속한 세계가 내가 그리고 싶었던 세계라는 생각이 들어서 '픽포켓'의 여자 주인공이 바라보는 해변의 작은 사람들까지 호명하고 싶었어요.

안 하길 잘했어요. 그런 구성이 이제는 정말 잘하지 않으면 촌스러워요. 화자와 시점 얘기를 좀 더 해보죠. 이번에 등장하는 화자는 정말이지 의뭉스럽다고 해야 할까요? 대체 여주인공인 기민지가 노트북으로 읽은 메시지는 뭐며, 눈썹을 찡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말해주지 않아요.

소설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정보가 있고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정보도 있는데 저는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정보도 넣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요. 타이트한 구성을 위해 필요 없는 정보도 넣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예전에는 '취향'이랄까? 음악, 영화 그런 거였는데, 지금은 쓸데없는 말과 행동들, 이게 뭐냐고 생각되는 행동들이란 거죠. 과잉처럼 보이지만 제게는 필요한 것들이에요. 예를 들어 '픽포켓'의 여주인공이 마지막에 분필로 벽에 줄을 그며 어딘가로 가는 것 같은 이게 뭐지 싶은 그런 행동들이요.

반면에, 중학교 2학년 학생인 우영이 두 도시 이야기의 한 구절을 줄줄 읊는 구절에서는, '어 작가가 이렇게까지 개입해서 말할 수 있도록 설정된 소설이었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수많은 3인칭이 있겠죠. 화자가 누구이며 그 사람이 어떤 정보를 알고 있는지에 따라 수많은 레이어가 있겠죠. 예를 들면 예전의 모노레일에선 아주 전지적이고 수다스럽고 말도 많은 화자를 선택했었다면 이번에 선택한 삼인칭의 화자는 아까 얘기한 게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요. 이번 3인칭의 화자는 '의뭉스러운 관찰자의 시선'이에요. 등장인물과 비슷하게 알고 있지만 조금 더 많이 알고 있는 화자. 그게 이번 3인칭의 거리고 시선이에요.

그런 시점을 선택한 이유가 뭔가요?

앞서 얘기했다시피 이번 소설에선 '감정'을 다뤘잖아요. 1인칭이 되면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화자가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직접 얘기를 해야 해요. 3인칭으로 등장인물이 그 감정을 행동으로 드러내 주기를 바랐어요. 예를 들어 '뱀들이 있어'를 1인칭으로 썼다면 '나는 김우재가 죽기를 바랐다'라고 썼어야 했을 텐데, 3인칭으로 다른 얘기를 하다가 '정민철은 김우재가 죽기를 바랐다'라고 써야 그 감정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로 생각했어요.

김중혁의 소설적 자아

신도시에서 페리에 탄산수를 마시는 김중혁.

'뱀들이 있어'에서 민철이 사이코패스처럼 느껴졌다는 사람은 없던가요?

많이 있었어요.

그렇게 느낀 이유가 그 시점 때문은 아닐까요?

그렇죠. 이걸 오히려 1인칭으로 풀었다면 민철의 극단적인 감정에 공감하며 질투 때문에 고통받는 민철을 가여워했겠죠. 이런 의뭉스러운 시점을 택한 이유는 또 있어요.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은 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여기 실린 소설 전반을 아우르는 얘깃거리이기도 해요. '뱀들이 있어'에서 마지막에 민철이 영선을 안아주는 그 포옹 역시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이 아닐까 싶어요. 이런 시점을 선택한 건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연대감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1인칭이었다면 불가능했죠.

정말 솔직히 말하면 민철을 사이코패스라고 느끼게 하는 구절, "스스로에게 자주 되묻곤 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는 거야?' 언제나 관찰할 뿐 공감하지는 못했다", 이 부분은 주어가 없어서 그런지, 유독 작가의 자아가 튀어나와서 말하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물어봤어요. '뱀들이 있어'는 세월호와 연관이 있느냐고. 생각해보면 연관이 있을 것도 같아요. 제가 어떤 소설을 쓸 때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식으로든 변형되고 필터링이 되어서 나오죠. 그런데 아까 그 문장은 어쩌면 그게 직접 드러났을 수도 있죠.

다른 인터뷰에서 말했던 '시니컬한 소설적 자아'를 말하는 건가요?

예. 전 소설의 자아도 실제 자아도 그렇게 따듯한 편은 아닌 것 같아요.

그 서늘함이 소설가의 요건이라고 생각해요. 공감을 못 하는 걸 어떻게든 공감해보려고 이야기를 만드는 거니까요.

쉽게 공감하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그래, 너 참 힘들겠다'라고 말해도 우리는 공감하지 못해요. 다만 그 말을 함으로써 자신이 공감한다고 속일 수는 있어요. 언어라는 게 그래요. 그러니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래도 어떻게든 비슷한 감정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시도해보는 게 중요해요. 그게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일 거예요. 나는 차갑고 시니컬한 사람이지만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고 유추해보려는 태도가 소설가의 윤리적인 태도라고 생각해요.

소설가의 자질이라고도 할 수 있나요?

자질까지는 모르겠고 나는 세계를 그렇게 봐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거예요. 세계는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전 단언하는 세계를 믿지 못해요. '내가 공감하고 있나? 내가 하는 말이 맞나?'라고 다시 한 번 생각하기 때문에, 어쩐지 머뭇거리게 되고 사랑한다고 섣불리 말하지 못하고 확 다가서지 못하는 것 같아요.

예전에 저한테 칼럼을 쓰는 게 힘들다고 했던 말과 일맥상통하네요. 칼럼에선 단언하게 되지요.

맞아요. 소설가로서 당연히 정치적인 의견이 있고 생각하는 게 있죠. 그러나 그걸 말하는 건 제가 할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런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 깎아내리거나 비난하는 게 아니라, 적어도 나는 그걸 소설로 드러내고 싶어요.

그런데 소설로 쓰면 오해가 생기기도 해요.

그렇죠.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명확하게 말한다고 정말 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예를 들어 '진짜 보고 싶어. 사랑해'라고 말한다고 해서 정말 사랑하는 걸까요? 언어로 자기를 속이는 경우가 정말 많아요. 오히려 '내가 사랑한다는 감정을 보여 줘야겠다'는 식으로 계산적일 수 있죠. 이 소설에는 수많은 감정의 덩어리들, 언어로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이 돌아다니며 부딪히죠.

3인칭 얘기를 하다 여기까지 왔군요. 반면에 1인칭으로 썼어야 했던 소설도 있죠. '보트가 가는 곳'은 외계인이 구덩이를 파고 사람들이 떨어져 죽지 않으려고 남쪽으로 걸으면서 외계인이 가져가 주는 바나나를 먹고 살아간다는 이야긴데, 아무 설명도 없이 이걸 수기형식으로 쓰니까 정말 웃긴 얘긴데 웃을 수 없어서 더 비극적이었어요.

사실 유머코드도 조금 있어요. 일부러 엉성하게 한구석도 있고요. 그런데 외계인이 구멍을 파는 메커니즘을 자세하게 설명하거나 했으면 상황이 웃긴 게 아니라 작가가 웃겨졌을 거예요. 그냥 '외계인이 땅을 팠어. 바나나를 놓고 갔어. 사람들이 그걸 먹으며 남쪽으로 갔어'라고 해야 했어요.

김중혁이 가짜 팔로 안는 포옹

비오는 날 우산을 쓰고 신도시 옥상에서 페리에 탄산수를 마시는 김중혁.

'가짜 팔로 하는 포옹'에서 따옴표가 없어진 이유는 뭔가요?

두 가지 이유인데요. 일단 대사가 많아서 따옴표가 많으면 지저분해 보일 것 같았어요. 또 하나는 한 사람의 말이 끝나면 '따옴'을 하게 되어있는데, 그게 있으면 마치 그 사람 말이 끝나고 다른 사람이 말을 하는 것처럼 보여요. 시각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죠. 그런데 이걸 없애버리면 두 사람의 말이 섞이고 엇갈려서 하는 말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어요.

인용으로서만 존재해야 하는 피존 씨의 목소리를 부호 안에 가두고 싶지 않았던 것 아닌가요?

그렇죠. 그것도 생각했던 건데 피존 씨의 목소리가 간접 인용문 안에 들어가는 게 싫었어요. 이 소설의 규호와 피존은 어떻게 보면 동일인물이에요. 규호가 피존을 흉내 낸다고는 하지만 동일한 목소리처럼 같은 범주 안에 있어야 하는 목소리였기에 따옴표를 뺏죠.

그럼 규호가 쓰는 피존에 대한 소설이 되는 건가요?

이 부분은 노리고 한 거죠. 규호가 '이건 피존 말로 들어야 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여기부터 피존의 얘기구나'라고 생각하겠죠. 그게 소설에서 따옴표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사실 규호는 정윤과 술자리에서 대화한 게 아니라 혼자 술을 마시며 소설을 쓰고 앉았던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솔직히 얘기하면 마지막에 그렇게 끝낼까도 생각했어요. 첫 부분이 마치 규호의 환상처럼 시작하고 마지막에 정윤이 떠난 자리에서 이상하게 의자의 쿠션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고 묘사를 했으니 이거 그냥 정윤이 없었던 거로 할까 싶었어요. 근데 그렇게 하면 뭔가 호러 같달까?

예술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띠지를 잃어버렸다.

이 정도 묘한 게 좋아요. 그런데 반면에 '종이 위의 욕조'는 비교적 직접 큐레이션을 소설에 비교하며 직접 드러낸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소설이라기보다는 네러티브에 대한 이야기일 것 같아요. 이야기, 큐레이션, 디제잉 모두 네러티브와 편집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죠. 내용을 생각해보면 결국 '아무리 편집을 잘해도 (술 마시고) 필름이 끊기면 끝이다'라는 거지만요. (웃음)

(웃음)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말이 나오죠. 바로 "전시장의 동선 중에서 용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되돌아가고 싶은가'였다"라는 구절이에요.

예술을 현실의 재현 혹은 반영이라고 친다면, 현실에서 불가능한 욕망을 대리만족시켜주는 기능이 있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반복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해요. 삶은 그렇게 못하거든요. 모든 예술이 가지고 있는 아주 기본적인 예술의 단위이자 가장 중요한 현실의 체현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 작품인 '요요'를 이해하는 키이군요. '요요'는 제목과는 달리, 반어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죠.

'요요'는 제가 가장 쓰고 싶었던 세계이자 '내가 이런 세계를 그리고 싶구나'라는 걸 깨닫게 해준 소설이에요. 연애라는 건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의 시간이 만나서 스파크가 이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요요에선 둘이 사랑했던 순간은 길게 묘사하고 중요한 '사건'은 오히려 짧고 간결하게 묘사를 하며, 시간의 빠르기가 글의 분량으로도 드러나도록 했어요. 최근에 '요요 2'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으로 만난 50대에서 시작해서, 차선재가 아닌 장수영의 시점으로 처음 만났던 순간까지 거슬러 가면 어떨까 싶어요. 그러면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고, 만나고, 스파크가 터지고, 분리되는지 그려질 것 같아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는 거군요. '요요'네요. 소설집 전체로 보면 전작 단편집과 비교하면 소설들이 얽혀있는 그물의 모양새가 더 넓어진 느낌이에요.

전작 소설들이 장르나 소제 면에서는 더 넓을지 모르겠지만, 작가로서는 이번 소설집의 그물이 가장 맘에 드는 형태로 넓게 펼쳐진 것 같아요. 비슷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기법상, 형식상 다양한 시도를 했다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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