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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은 한국전쟁 참전을 후회했다

  • 김병철
  • 입력 2015.06.23 13:41
  • 수정 2015.06.23 13:43

중국을 방문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장 박금철의 손을 잡고 접견실로 향하는 마오쩌둥. 1961년 6월21일, 후베이성 우한.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전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전쟁(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참전 결정도 후회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또 마오쩌둥이 전쟁이 발발하기 전 '개전 반대' 입장에서 선회해 참전을 결정한 데에는 전쟁 초기인 1950년 7~8월 중국에서 공산당 정권이 흔들릴 정도로 심각했던 동요와 혼란이 상당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새롭게 제기됐다.

연합뉴스는 23일 한국전쟁을 후회한 마오쩌둥의 관련 발언이 담긴 자료들을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했다.

중국 개혁성향 잡지 '염황춘추'(炎黃春秋) 2013년 제12호에 따르면 마오는 1956년 9월 23일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아나스타스 미코얀 소련 부수상과 회동에서 "조선전쟁(한국전쟁)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스탈린이 마땅히 책임져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마오쩌둥은 이듬해 7월 5일 미코얀과 다시 만나 한국전쟁 문제를 꺼내면서 "스탈린과 김일성이 중국에 전쟁개시 시기와 작전 계획을 고의로 감췄다. 결국, 중국은 전쟁하는데 피동적으로 연루됐다"면서 "이것은 잘못됐다. 절대적으로 잘못됐다"며 북한과 소련을 싸잡아 원망했다.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마지막 만남. 1975년 4월18일, 베이징 중난하이.

마오쩌둥은 1956년 9월 18일 방중한 북한 대표단에도 "조선노동당의 생각과 과거에 의견(이견)이 있었다. 조선전쟁을 예를 들어보면 시작할 때 김일성에게 전쟁하지 말라고 일깨웠고 나중에 그에게 '적들이 후방에서 상륙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고 강조했다.

1950년대 말 중국 지도부의 회담록에도 마오쩌둥이 미코얀에게 "전쟁은 잘못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면서도 "그것은 소범위 내(우리끼리)에서만 확실히 말할 수 있을 뿐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그는 미코얀에게 "조선 당정치국 위원 박일우도 이 전쟁이 잘못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면서 "내가 보기에 이 일은 중국에도 책임이 있다"고도 했다.

이 발언은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판단이 잘못됐지만 이를 제대로 막지 못한 중국에도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마오쩌둥은 1950년 5월 김일성과 박헌영이 개전 동의를 구하러 베이징을 찾았던 상황과 관련, 미코얀에게 "김일성이 와서 '스탈린도 동의했다'기에 3국 중 두 나라(북한·소련)가 동의했는데 나도 강하게 반대하지 못했다"면서 "하긴 내가 강하게 반대했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스탈린도 제국주의가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기에 내가 그들(제국주의자)의 참모장도 아닌데 그들이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다고 했다"면서 "양국이 모두 동의했는데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동의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도에 잡혀온 중국군 포로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7월 제주도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중국군 포로들이 마오쩌둥의 목을 톱으로 자르는 상황극을 연출하고 있다.

이런 발언은 중국이 자국의 참전 이후를 일컫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과 관련,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인 북한을 지원한 '정의의 전쟁'이라고 미화하는 것과 달리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남침 결정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중국의 참전 결정도 뒤늦게 후회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한국전쟁은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고 기획한 전쟁이었다거나 미군이 38선을 넘어 중국의 안보를 위협했기 때문에 중국이 참전을 결정했다는 분석이 많았었다.

마오쩌둥이 전쟁 발발 전에는 부정적 입장을 취했으나 전쟁 초창기 적극적인 개입 쪽으로 선회한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자료들도 발굴됐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보고용으로 작성한 내부참고(내참) 자료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미 7함대 대만해협 파견' 발표 직후인 1950년 7~8월 중국 각지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마오쩌둥에게 시시각각 보고됐다.

미중 간 제3차대전 발발 가능성을 걱정하는 중국 인민들의 우려가 커졌고 "마오쩌둥 정권이 붕괴하고 장제스(蔣介石) 정권이 복귀할 것"이란 이른바 '변천'(變天) 사상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존립 기반을 흔든 것이다.

'변천'사상이 언급된 중국 신화통신의 내부참고자료

베이징, 상하이(上海), 톈진(天津) 등 대도시는 은행에서의 현금 인출이 줄을 잇고 생필품 사재기, 금·은 가격 폭등 등 각종 경제적 혼란이 초래됐다.

1950년 7월 유엔군의 전면적 참전 이후에는 "소련이 미국에 무조건 투항했다", "미국이 마오쩌둥을 체포하려 한다", "하이난(海南)이 미국과 장제스 수중에 떨어졌다", "린뱌오(林彪)가 이미 희생됐다"는 등 공산당 입장에서 매우 부정적인 소문들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는 보고가 마오쩌둥에게 들어갔다.

중국 신화통신의 내부참고 자료

이 자료들을 입수해 분석한 김동길 베이징(北京)대 역사학과 교수와 박다정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센터 연구원은 중국의 태도 변화를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한 논문을 최근 역사학회 학술지인 '역사학보'에 발표했다.

김 교수팀은 논문에서 "마오쩌둥은 초기 전황이 북한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것을 이용, 전쟁을 조기에 종식함으로써 한국전쟁이 초래한 악영향을 해결하려고 했다"고 분석했다.

마오쩌둥은 1950년 7~8월 조기파병을 통해 한반도에서 미군을 몰아내고 전쟁을 신속히 끝내길 원했으나 미국의 손발이 아시아에 묶인 상황에 만족하고 있던 스탈린의 부정적인 태도와 북한의 미온적인 태도가 맞물려 조기 파병은 무산됐다.

중국의 파병 결정은 1950년 9월 15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다급해진 김일성이 10월 1일 마오쩌둥에게 편지로 출병 요청을 한 뒤에야 이뤄졌다.

마오쩌둥은 지도부와 회의를 거쳐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란 구호를 내걸고 파병을 결정했고 실제 파병은 중국 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넜던 1950년 10월 25일에 이뤄졌다.

마오쩌둥이 그로부터 6~7년 후 '전쟁이 잘못됐다'고 후회한 것은 예상과 달리 전쟁이 3년 이상 장기화되면서 중국에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가져왔고 개인적으로는 장남(마오안잉<毛岸英>)까지 잃게 된 것과도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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