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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6월 19일 09시 34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6월 19일 10시 31분 KST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인터뷰] 알 마문 AMC 팩토리 활동가 "이주노동자는 가난하지만 불쌍한 존재는 아니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는 창간 1주년을 맞이해 2015년 3대 기획 시리즈를 추진합니다. 국내외적으로 첨예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북한 인권과 탈북자 문제, 30만을 넘긴 다문화 가정, 불법과 합법을 통틀어 170만 명에 육박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 편집자주

3대 기획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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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한 '이주노동자'의 한국 정착기다.

방글라데시 출신인 알 마문(Al Mamun)이 한국에 온 것은 IMF 사태로 하루하루가 불안했던 1998년이었다. 대학 졸업까지 했던 그는 돌연 한국행을 택했다. 그때만 해도 방글라데시 너머의 우주엔 은하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산산이 부서졌다. 이틀 만에.

- 당시 IMF 사태가 터지고 한국 경기가 좋지 않았을 텐데.

=그때 이주 노동자가 많이 왔다. 하루에 200~300명씩 올 때다. 미등록자인 걸 알면서도 계속 비자를 줬다. 당시에 정말 일이 없었다. 석 달 동안 하루 이틀 아르바이트하는 수준으로 일했으니까. 다들 처음에 '왜 한국에 왔냐고' 물었다. 그 때는 한국에 가면 ‘내 삶이 반짝반짝’하게 될 것이란 꿈이 있었다. 와, 그런데 한국에 온 지 이틀 만에 그런 환상이 깨졌다. 인천에 사는 삼촌 집에 갔다. 화장실을 봤다. '푸세식'이라는 한국 화장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뭐지 이거. 이렇게 사람이 사나. '난 이렇게는 못 산다'고 했다(웃음). 내 사촌 형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가구단지로 갔다.

이주노동자로서 마문의 삶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3~4명이 사는 컨테이너에 살았다. 첫 직장은 옷을 만들고 난 원단 쪼가리를 주워 재활용 하는 곳이었다. 그는 힘들고 눈물이 나서 방글라데시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너무 힘들어요. 나 방글라데시로 돌아갈래요. 비행기 표 끊어주세요."

그러자 사촌 형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네가 여기 700만 원 주고 한국을 왔는데 어디를 간다고 그래!" 사촌 형의 손에 이끌려 가구를 만드는 공장으로 옮겼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주노동자들이 100여 명이 넘게 있었던 이곳. 3개월을 먹고 자면서 한국말을 배워가니 이제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2002년, 한 공장에서 퇴직할 때가 됐다. 퇴직금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회사는 주지 않았다. 이주노조가 나섰다. 주기를 망설였던 퇴직금을 받아내게 됐다. 그것이 인연이었다. 1년 뒤 마문은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맞서 명동성당 농성에도 참여했다. 21일간 단식농성도 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마문이 민중가요 '철의 노동자'의 한 소절을 정확히 아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 '이주노동자는 불쌍하다.' '가난하다.' 한국의 보편적 정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주 노동자가 가난할 수는 있으나, 불쌍한 것은 아니다. 가난하다 해도 이 나라에서 정당한 노동을 하고 대가를 받고 있다. 미등록 상태로 지내지만, 그 친구들이 한국 정부에서 합법화를 해준다고 하면 얼마든지 세금을 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주노동자들이 세금을 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너네는 왜 돈은 한국에서 벌고 너네 나라에 돈을 보내냐고'들 한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이주노동자들이 식당에서 먹는 음식, 가게에서는 사는 물건 등 모든 물건에 10%는 부가세로 지불한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도 세금을 내는 셈이다.

"법이 이주노동자를 차별하고 있다"

- 한국에 처음 오던 그때와 인식이 바뀌었나

=20년 전에는 그랬다. 공장에서 일하다 사장이 술 안 먹는다고 때리고, 한국 문화 모른다고 때렸다. 이제 그런 문화는 많이 사라졌다. 오히려 편견보다는 법이 이주노동자를 차별이 하고 있다. 특히 한국 공무원들은 판례가 없으면 일을 하지 못한다. 이런 걸 행정 공백 상태라고 하더라.

마문이 설명한 사례는 이랬다. 한 이주노동자가 공장에서 일한 지 10개월 가량 될 즈음이었다. "사장님, 저 허리가 아파서 일 못 나가겠어요." "안 돼!" 사장은 단호했다. 공장 안 기숙사에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공장 대신 고용노동부로 갔다. 그런데 별안간 사장은 '이탈신고'를 해버렸다.

문제는 이런 이탈신고를 하고 고용노동부가 미등록처리를 하는 순간 다시 등록상태로 되돌리기에 어렵다는 점이다. 공무원들에게 호소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이 이주노동자는 지방노동위원회에서 숱한 분쟁 끝에 5개월 만에 겨우 지위를 회복했다. 그동안 비자가 없는 미등록 상태로 살아야만 했다. 일자리도 물론 구하기 힘들었다.

우리나라 전체 이주노동자는 150~18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데일리는 "(이 가운데) '고용허가제'(중국, 네팔 등 15개국)나 '방문취업'(중국 등 동포) 비자를 받고 한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각각 20만 명, 26만 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20만 명 선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이런 노동자들이 합법과 불법의 사이를 오가고 있다. 그리고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폭행과 차별, 착취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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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주노동자들의 권익 보호 등을 위해 이주노조에서 일했던 마문은 '영화'라는 분야에 새롭게 눈을 뜬다. 현재 '아시아 미디어 컬처 팩토리'(AMC팩토리) 사무국의 상근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그는 이주민의 문화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마석 가구단지 공장에서 일하다 AMC 팩토리(당시 서울 서교동, 현재 영등포구 문래동)의 내부 인테리어를 한 것이 계기가 돼 여기에 합류하게 됐다.

AMC의 사업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프리포트'라는 문화 예술 공간을 운영하고, 1년에 한 번 열리는 서울 이주민 예술제를 개최하는 것이다. 1년 동안 악기 체험 등을 비롯한 다양한 워크숍을 개최한다.

13년간 공장에서 일한 그가 어떻게 문화라는 생소한 영역에 들어오게 된 걸까. 부인의 영향이 컸다. 2009년, 한국인 부인과 결혼과 동시에 귀화한 그는 가구공장에 계속 다녔다. 부인의 만류가 계속됐다. "돈은 안 벌어도 좋다. 다치지만 마라" 그래도 계속 공장에 나갔다. "오늘 나가면 나랑 못 살게 될 줄 알아라" 결국, 13년을 일했던 마문은 그 길로 일을 그만뒀다. 사장에게 전화가 올까 봐 전화기까지 꺼버렸다.

120만 원을 받으며 처음 일했을 때 보다 2배나 되는 월급을 받고 있었다. 가구 공장에서 책임자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미련 없이 그만뒀다. 그리고 그가 '프리포트' 공간에서 찾은 것은 바로 영화였다.

단편영화 '파키'(2013)를 첫 작품으로 영화제작을 시작했다. 서울독립영화제, 인디다큐 페스티벌 등에도 초청된 굿바이(2014)는 15년을 한국에서 살다 본국으로 돌아간 한 이주노동자의 삶을 다뤘다. 머신(2014)은 외국인이 바라본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반복되는 일상적 모습을 영상화했다. 그의 주제와 문제의식은 다양하다.

- 영화는 어떤 매력이 있는가.

=저한테 영화는 가구를 만드는 것과 똑같다. 조각이 합쳐져 가구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영화도 여러 가지 컷들이 모여서 작품이 만들어진다. 제가 목수로 일할 때도 1cm, 1mm가 맞지 않아 다시 맞추는 것처럼 영화도 그런 점에서 비슷하다.

- 지금 만들고 있는 작품은?

=2편을 제작하고 있다. 한 작품은 방글라데시의 아동 노동에 다뤘다. 또 다른 작품은 한국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출입국 단속과정에서 죽거나 다치는 것들을 보여주려고 한다. 실제 한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다.

- 영화감독이 되고 나서 가장 많이 바뀐 점은.

=영화를 만들기 이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건 문제 있구나'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늘었다. 이전에는 생각하지 않던 것들이 영화를 하면서 보는 시야가 넓어진 것 같다.

-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있나

=그런 건 없다. 내 스타일대로 한다.

- 자신이 만든 영화에 피드백을 받는 편인가.

=받는다. 최근 '머신'이라는 작품을 찍을 때 '필름 메이커스'라는 사이트에서 새로운 분들을 초청해 의견을 듣기도 했다. 그때 인연을 맺은 PD나 촬영감독들은 지금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마문이 출연한 고발뉴스 방송이다.

- 공장에서 노동자의 삶과 영화감독의 삶은 많이 다를 텐데. 어떤가.

=장단점이 있다. 공장에서 일할 때는 돈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았다. 일도 하다 보면 고칠 것이 보였다. 가구도 소비자 한 명만 평가받으면 되니까 큰 부담은 없다. 그러나 영화는 많은 사람 평가가 이뤄지니까 영화는 많은 부담이 있다.

- 당신과 얘기를 나눠보니 무척이나 삶에 만족하며 사는 것 같다. 행복지수 1위라는 방글라데시 출신이라 그런 걸까.

=자신의 삶을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편안한 마음으로 살면 쉬워지지 않나 생각한다. 모두 100m를 가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80m만 가도 만족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는 다 쉬워지는 거다. 사람은 완벽할 수가 없고, 내가 받아들이는 순간 쉬워지지 않나.

- 한국 사람들은 1등, 1위에 집착하는 편인데.

=모든 나라에 그런 게 있다. 발전된 나라 중에 1등 돼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다. 한국에서는 10억 원 정도 있으면 편하게 살 수 있는 거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10억 원을 넘게 가지고 있는 사람 얼마나 많은가. 또 없는 사람 아예 없다. 방글라데시도 마찬가지다. 내 아버지를 보면, 부자라고 볼 수는 없는 데 편하게 먹고 살았다. 내 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은 없다.

- 방글라데시에서 대학까지 나왔는데. 부모님이 보기엔 한국에서 고생한 아들이 안쓰러웠을 것 같다.

=나는 공부를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다(웃음). 대학도 집에서 억지로 보내서 들어간 것이다. 한국어도 지금 말은 잘하는데 공부를 하지 않아서 잘 쓰지를 못한다. 한국어도 공부하기 싫었는데 영화 자막도 만들어야 해서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하고 있다.

- 다문화가정에 대한 한국 내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편견을 극복할 수 있을까.

=다문화가정의 엄마 아빠들이 좀 더 당당해져야 한다. 초라한 모습으로 아이들에게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 바뀌어야 한다. 남 탓을 해서도 안 된다. 아이들에게 멋진 아빠와 멋진 엄마로 보여야 한다.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이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 백인 위주의 미국사회에서 흑인들이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나간 것처럼 말인가.

=맞다. 혜택을 줘야 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건 장기적인 관점에서 옳지 않다. 가수 인순이 씨를 봐라. 그 분은 그런 편견을 뚫고 성공하지 않았나. 이 사회에 맞춰서 함께 가려면 공장을 벗어나 사회 다양한 곳에서 활동해야 한다.

마문이 있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전경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