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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4월 05일 11시 12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4월 05일 11시 26분 KST

자네 방송작가로 일해 볼 텐가 '헐. 값. 에'

“열정 페이를 받고 일하면서, 열정 페이를 비판하는 방송을 만들어야 하는 심정을 아시나요?” 올해 초 논란이 됐던 패션계 ‘열정 페이’에 대한 방송사들의 보도를 접하면서 눈물을 삼킨 이들이 있다. 바로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막내 작가들이다. 방송사들이 프로그램을 통해 “열정 페이는 취업난이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라고 비판하며, 패션계를 넘어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정작 등잔 밑에 있는 ‘식구’들에 대해선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열정 페이가 심각한 곳 중의 하나가 바로 방송사다. 에프디 등 스태프들의 처우도 열악하지만 그중에서도 예능이나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른바 막내 작가들이 처한 환경은 패션계와 그리 다르지 않다. 대부분 매월 80~120만원을 받고, 4대 보험 혜택도 누리지 못한다. 잦은 야근에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한겨레>가 만난 막내 작가들은 “작가인데 글을 쓰는 일보다 잡일을 더 많이 해야 해 스스로를 ‘잡가’라고 부른다”고도 했다. 1~5년차가 된 막내 작가 5명을 만났다. 이들은 “고용 불안에 (법정 노동 시간을 훌쩍 넘기는) 초과 근무로 고통받고 있다”며 “다른 건 몰라도 최저 시급이라도 보장해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 월 80~120, 주말도 없어요! 언론에 공개된 이상봉 디자이너의 디자인실 정직원의 급여는 월 100~130만원이다. 방송사의 막내 작가들은 그보다 못한 80~120만원이 평균이다. ㄹ 작가는 “방송사 자체제작 프로그램에서 일하면 매주 30~35만원 정도를 받는다. 외주 제작사에서 일하는 경우엔 월급으로 80~100만원을 받기도 한다”고 했다. 방송사에서 일을 하면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등 처우가 상대적으로 좋다. 그러나 잦은 야근에 주말도 없이 일하고, 급여가 최저 임금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은 외주나 방송사 본사나 마찬가지다. ㄴ 작가는 “외주사에서 일할 때는 2달간 하루 3~4시간을 잤다”고 했다. 현재 방송사에서 일하는 작가도 “하루 14시간 이상 일한다”고 했다. 이마저도 결방되면 못 받는다. 작가마다 다르지만, 메인 작가들은 두세개 프로그램을 함께 하면서 월 500만원 이상을 벌기도 한다. 월 1000만원을 버는 작가도 있단다.

막내 작가들은 신분은 프리랜서이지만, 매일 출근을 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일과 병행하기 쉽지 않다. ㅁ 작가는 “메인 작가는 출퇴근이 자유로운데 막내 작가는 프로그램마다 출근 시간이 정해져 있다. 오전 10시30분에 출근해 작가 중에 가장 늦게 밤 10~12시에 퇴근했다”고 했다. 야근 수당도 없고, 버스가 끊겨도 교통비를 못 받는 경우도 있다. ㄹ 작가는 “방송사에서는 밤 12시가 넘으면 택시비를 챙겨주는데, 외주에선 못 받기도 한다”고 했다. 근로계약서를 안쓰고 계약 기간도 정해져 있지 않은 프리랜서라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크다. 언제 막내를 벗어날지도 모른다. 교양은 운이 좋으면 1년 만에 대본을 쓰는 서브 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지만 보통은 막내의 설움을 2~4년 감내해야 한다. 예능은 5년 이상 걸리기도 한단다. ㄴ 작가는 “3년차가 됐을 때도 월 120만원을 받았는데, 이제 막 방송일을 시작한 조연출이 170만원을 받을 때는 억울했다”고 했다.

■ 청소에 밥셔틀까지…작가가 아니라 ‘잡가’ 작가들은 메인과 서브, 막내로 구성된다. 통상적으로 메인이 전체적인 틀을 잡고 서브가 대본을 쓰고, 막내들은 보조 업무를 맡는다. ㄹ 작가는 “막내들은 주로 프리뷰(촬영한 화면을 텍스트로 옮겨쓰는 것)한 내용을 항목별로 정리하거나 보도자료를 쓰고, 자료조사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글 쓰는 것보다 잡일이 더 많다. 외주사에선 조연출 업무를 떠맡기도 한단다. 업무 외적인 스트레스도 큰 편이다. ㄴ 작가는 “언니(작가)들의 밥 챙기는 것이 중요 업무였다.

일주일 동안 메뉴가 겹치지 않도록 고르고 메신저를 통해 의향을 물어야 한다. 겹치는 메뉴가 있으면 혼나기도 했다”고 한다. ㄷ 작가는 “담배 심부름도 했고, 메인 작가가 오기 전에 커피를 책상에 놔둬야 했다. 메인 작가의 집에 가서 청소하고 아이와 놀아준 적도 있다”고 했다. 인격적으로 모욕을 당할 때는 하루에도 열두번 그만두고 싶은 충동을 느낀단다. ㄱ 작가는 “‘예쁘지 않으니 성형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피디나 선배들이 술자리에서 스킨십을 하는 것도 참기 힘들었다”고 했다. 방송사 부장 피디의 이른바 ‘갑질’에도 시달렸다는 토로도 있었다. “다른 방송사에서 일 못하게 만들겠다”는 협박성 언사를 듣기도 했단다. ㄷ 작가는 “막내 작가는 동네북이다. 메인 작가뿐 아니라 피디, 출연자, 심지어 조연출까지 모든 불만을 막내한테 쏟아내지만 이 바닥이 너무 좁고 소개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 하소연할 곳이 없다”고 했다. 스트레스에 위염 등 몸 상태가 나빠지면서 그만두는 경우도 많단다.

■ ‘내 밥그릇 챙기기’에 대물림되는 열정 페이 막내 작가들의 열정 페이는 대물림되고 있다. 10년 전 월 급여가 대략 60~80만원이었다니 지금과 견줘도 큰 차이가 없다. 에프디 등은 외부 용역업체에서 파견하는 계약직도 많은데, 작가는 특수고용직인 프리랜서 신분이어서 개인사업자로 분류되어 있다. 노동자의 기본권을 보장 받지 못하는 것이다. 최근 조연출 등이 노조를 만들었지만, 방송작가는 노조도 없다. 작가들 스스로도 노동자 의식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니다. 8~9년차인 한 서브 작가는 “나도 막내 때는 ‘왜 메인 작가들은 막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걸 보고만 있을까’ 생각했는데 서브가 되니 프리랜서인 게 더 많은 프로그램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내 밥줄 끊길까봐 신경쓰지 않게 되더라”고 했다. 그래서 하소연할 곳도 없다. 작가 권익 보호 단체인 한국방송작가협회에는 경력 5년 이상의 작가들만 가입할 수 있다. 이들 막내 작가들은 “메인이 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다”고 했다.

현재 활동하는 막내 작가는 지상파 4사에서만 대략 3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케이블까지 더하면 크게 늘어난다. 90년대 중반 <에스비에스>(SBS)에서 작가를 공채로 뽑은 적이 있다. 하지만 외주 제작이 활성화된 현 방송시스템에서 공채만이 정답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막내 작가들도 이런 현실을 알고 있다. “방송사 전체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들의 처우가 바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털어놓는 이유다. 바라는 건 한가지다. “고생해서 만든 프로그램에 내 이름이 나가는 걸로 스트레스는 알아서 풀 테니, 최저 시급만이라도 보장해주세요. 아니면 근무 시간이라도 조정해 주든가. 그것도 안되면 주말이라도 쉬게 해주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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