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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10일 13시 45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5월 10일 14시 12분 KST

킹스맨 : 신데렐라 에이전트

말하자면 저 영화(들)는 계층/ 계급의 벽에 가로막힌 세대의 판타지다. 한국의 청년 세대가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면 영국의 (일부) 청년 세대 역시 마찬가지다. 더구나 영국의 경우, 그 사회구조는 더 강고하다. 다만, 그래도 적당히 편안하게 먹고 살 수는 있다. 뭔가 대단한 것이 되겠다는 꿈만 없으면 된다. 가끔 어느 쪽이 차라리 더 나은 것인가 싶기도 하다: 모두가 다 뭔가 되겠다며 미친 듯이 뛰어가는 사회와(그리고 안 뛰면 죽는다), 뛰어 봐야 아무 소용없다며 많은 사람들이 아예 안 뛰는 사회와(하지만 안 뛰어도 안 죽는다), 둘 중에 말이다

이십세기 폭스 코리아

이 새끈하게 잘 빠진 스파이-액션-판타지 영화는 말하자면 유서 깊은 신데렐라 이야기의 현대/ 성전환 버전이다. 착하고 훌륭하며 자신을 많이 사랑했을 것 같은 친모[영화에서는 친부]가 죽은 후 계모[계부]의 구박을 받으며 비전 없이 살아가는 청년에게 어느 날 짜잔, 전지전능한 요정 대모[부자에다가 싸움 잘하는, 역시 전지전능한 후견인]이 나타나, 팔자를 확 바꿔 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팔자를 바꿀 '기회'를 주는 것. 동화에서 신데렐라가 궁극적으로 상류 계급으로 발탁-진입하게 되는 것은 타고난 미모(성품도?) 덕이지만, 영화는 남자가 주인공이니까 재능과 성품과 훈련과 기타 등등.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기회가 생긴다는 것은 영국 하층의 젊은이에겐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랄까. 카운슬 플랏(주인공인 엑지 가족이 사는 곳, 한국으로 치면 영구임대주택단지쯤 될 것이다)에 살면서, 약도 좀 하고, 교육도 제대로 받은 바 없고, 직업도 없이 껄렁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던 청년이(게다가 동네 북이다), 집안 좋은, 사립학교 및 옥스퍼드/ 캠브리지/ 세인트 앤드류스/ 더럼(영화에서 다른 후보자들이 너도 거기 출신이냐며 주워 섬기는 대학들) 출신의 또래들과 경쟁하여 결국 이기는 것. 현실에서는 이길 수도 없지만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고.

이런 신데렐라 이야기 식의 설정은 사실 해리 포터도 마찬가지다. 친척들에게 얹혀 살면서 구박받고 열등생 취급 받던 고아 소년이 어느 날 나타난 후원자 덕에 사립기숙학교로 가서 친구를 사귀고 재능을 인정 받는 것. 그러나 해리 포터의 경우 마법사들은 머글들의 세계에선 그저 부적응자로 보일 것이므로 더 현실적이고 우울한 인식이 깔려 있다 해야 할지. 아무리 저쪽의 판타지 월드에선 순혈한 집안 출신의 실력 좋고 영웅적 존재일지라도, 현실 세계에서 해리 포터는 여전히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저 영화(들)는 계층/ 계급의 벽에 가로막힌 세대의 판타지다. 한국의 청년 세대가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면 영국의 (일부) 청년 세대 역시 마찬가지다. 더구나 영국의 경우, 그 사회구조는 더 강고하다. 누구든 하면 된다라거나 같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거나 뭐 이런 믿음 따윈 그다지 없고, 사실 어지간히 노력 해봐야 기회도 별로 없다. 다만, 그래도 적당히 편안하게 먹고 살 수는 있다. 뭔가 대단한 것이 되겠다는 꿈만 없으면 된다.

따라서, 대개 하층/노동자 계급의 선택은 그냥 기술을 배우거나 전문대학 정도를 마치고 취직하거나(이건 매우 훌륭한 경우), 슈퍼마켓이나 기타 판매직 직원으로 일하거나(영화에서 다른 후보자가 엑지에게 너 낯익은데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봤던가? 하고 묻는 식), 작은 회사의 일반직원 또는 단순기능직으로 일하거나, 그러다 생활 보조금도 받고, 육아 수당, 실업 수당 받고, 연금도 받고, 아이들 역시 같은 식으로 살고, 그냥 그렇게 안정적으로 대충 살아가는 것이다. 어쨌거나 살 집도 있을 것이고, 자식들 교육시키는 데도 별 문제가 없고, 더구나 먹을 것이 없거나 얼어 죽는 일은 거의 없으니. 일견 우울하게 들리지만, 매우 안온하고 평화로운 삶이기도 하다. 애당초 무리해서 뛰지 않기 때문이다. 무한 경쟁에 내몰리는 일은 없다는 이야기다. 다만,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도 없을 뿐. 가끔씩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신데렐라를 제외하고.

한편, 유색인종이라면 이런 영화를 보며 판타지를 꿈꾸기도 어려울 것이다. 요정 대모 따위, 유색인종에게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는 것이다. 하물며 저런 영화에서도 종교와 문화적 배경이 다른 유색인종은 발 붙일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이들이라면, 이리 살다 가느니 화려하게 전사가 되어 짧지만 영광스럽게 살고 그들이 믿는 천국에서 부활하기를 꿈꿀 수도 있으리라는 것.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고, 능력이 있으면 그에 걸맞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며, 능력이 부족해도 나름 안온하게 한평생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회란, 그야말로 판타지다. 그러하니, 가끔 어느 쪽이 차라리 더 나은 것인가 싶기도 하다: 모두가 다 뭔가 되겠다며 미친 듯이 뛰어가는 사회와(그리고 안 뛰면 죽는다), 뛰어 봐야 아무 소용없다며 많은 사람들이 아예 안 뛰는 사회와(하지만 안 뛰어도 안 죽는다), 둘 중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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