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2019년 06월 28일 11시 53분 KST

페미니즘 미술 거장의 아시아 첫 개인전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아시아 첫 개인전 ‘바버라 크루거: 포에버(FOREVER)’ 가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겨레
바버라 크루거의 개인전이 차려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첫 전시실. 전시를 위해 만든 공간특정적인 설치 작품 '포에버'의 거대한 문자 이미지들이 천장을 제외한 사방을 채우고 있다. 출구와 입구 쪽 벽면엔 페미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자기만의 방'에서 인용한 문구들을, 바닥면엔 작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인용한 문구들을 확대해 붙여놓았다.

‘제발 웃어 제발 울어’.

고개를 뒤로 돌리자 한글 여덟자가 눈가로 날아왔다. 빨간 바탕의 시트지에 두 글자씩 내려쓰여 있다. 제2전시장 출구 너머에서 다그치듯 뾰족한 메시지를 전파한다.

빨간 문장이 도사린 출구 양쪽 벽의 이미지들도 만만치 않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야수의 사진과 안경 벗는 서양 여성의 얼굴 사진이 각각 호위하듯 나붙어 사진 속 작은 영문자들을 발신하는 중이었다. ‘바로 너. 너는 새롭다’ ‘또다른 전시, 또다른 작가, 또다른 삶, 또다른 경력…’ 문자들은 소리를 내거나 몸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후려치거나 악다구니를 쓰듯 생경하게 고통과 회의, 성찰의 감각을 깨운다.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라는 것일까. 

한겨레
1989년 작업한 크루거의 대표작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의 원이미지 작업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페미니즘 미술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하게 해준 작품이다. 

고민과 의문을 낳은 전시장은 명불허전이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a battleground) 같은 걸출한 작품 카피로 유명해진 작가. 시적인 현실비판 텍스트를 덧붙인 사진 이미지 작업들로 1980년대 이래 세계 문화판을 뒤흔들어온 여성주의 미술의 거장. 처음 실물로 만난 바버라 크루거(74)의 명작과 신작들은 눈과 마음, 몸을 움직이게 하는 시각 이미지의 힘을 보여준다. 공기나 물처럼 마구 소비되듯 촬영되는 복제 이미지들이 거꾸로 현실의 질곡을 뒤흔드는 무기이자 고발의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일러줬다.

지난해 서울 용산에 문을 연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 개관 1돌을 맞아 바버라 크루거의 아시아 첫 개인전 ‘바버라 크루거: 포에버(FOREVER)’를 27일부터 시작했다. 사진과 텍스트를 오리고 붙인 초창기 페이스트업 작품부터 이미지를 대형 전사지에 출력해 공간을 메우는 설치작업, 대형 다채널 영상으로까지 활동 반경을 넓힌 최근작까지 40여년간의 작업 유형을 4개 전시실과 ‘아카이브룸’에서 볼 수 있도록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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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전시실 입구의 모습. 개막 직전인 지난주 작가가 둘러보고 즉석에서 제작을 지시해 만들었다는 붉은 바탕의 한글설치 작품 '제발 웃어 제발 울어'가 보인다. 입구 양옆 벽에는 크루거가 2000년대에 만든 유명한 사진 텍스트 작품 2점이 호위하듯 내걸렸다. 

처음 공개된 크루거의 한글 설치 작품 <무제(충분하면 만족하라)>(2019)가 설치된 로비를 낯설게 지켜보며 지하 전시실 계단을 내려가면, 충격적인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계단 공간 벽에 날카로운 바늘이 눈을 찌르려는 순간을 담은 <모욕하라 비난하라>(SHAME IT BLAME IT·2010). 지난주 방한한 작가가 계단을 보자마자 이곳에 설치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첫 전시실은 2017년작 설치 작품 <포에버>의 거대한 문자 이미지들이 바닥과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출구와 입구 쪽 벽면엔 페미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자기만의 방>에서 인용한 문구들을, 바닥면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글귀를 붙여놓았다.

“지난 수세기 동안 여성은 남성의 모습을 원래보다 두배로 확대해 비춰주는 마력을 가진 거울 같은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버지니아 울프), “만약 당신이 미래의 그림을 원한다면, 인간의 얼굴을 영원히 짓밟는 군화를 상상하라”(조지 오웰) 같은 문장이 영문으로 전시돼 있다.

권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남성과 여성, 영어에 밝은 사람과 영어를 못하는 사람에 따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달라 굳이 번역하고 해석하지 않은 채 놔두는 것이 크루거 전시의 원칙이다. 물론 어떤 관객들은 얼굴을 열 손가락으로 가린 여성의 정면 사진에 ’당신은 아직도 즐거워요?란 문장이 덧붙여진 작품을 보거나 크루거의 초창기 작업들을 모은 40점을 주시하면서 그의 작품세계를 찬찬히 갈무리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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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은 전시실로 내려가는 계단부터 충격적인 이미지를 만난다. 계단 공간 벽에 날카로운 바늘이 눈을 찌르려는 찰나의 이미지를 담은 <모욕하라 비난하라>(2010)가 내걸렸기 때문이다. 지난주 방한한 작가가 즉석에서 설치를 요청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어지는 후반부에서는 반전, 남성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을 담은 근작 이미지 작업과 세계적 이슈가 된 #미투(나는 고발한다) 공방 등에 대한 남성들의 생각을 담은 대형 다채널 설치영상과 <뉴욕타임스> 인터뷰 내용과 잡지에 실린 이미지를 모은 아카이브룸을 만나게 된다.

뉴욕 파슨스디자인학교를 나와 10여년간 잡지 편집디자이너로 일했던 바바라 크루거는, 광고미술에 착안한 전달력 강한 텍스트 아트를 80년대 초부터 선보이면서 세계 현대 미술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충격적인 복제 사진 이미지 위에 여러 색띠의 텍스트를 덧붙인 작가 특유의 ‘크루거 스타일’은 팝아트와 유사한 방법론에서 출발해 훨씬 도발적이고 전복적인 현실 참여미술의 영역을 구축했다.

그의 매체 미학은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1892~1940)의 예언과 잇닿아 있다. 벤야민은 1935년 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진, 영화 등의 20세기 복제 예술이 원작만의 신비스럽고 독특한 분위기로 우러나오던 아우라를 제거했다고 짚어내면서 대중을 하나의 의지로 통합하는 특유의 강력한 전달력과 ‘혁명적 가능성’을 통찰한 바 있다. 크루거는 복제예술의 총아인 사진과 문자 텍스트를 결합시켜 흡입력 강한 사회적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장르틀을 만들었다. 벤야민이 말한 복제예술의 혁명적 가능성을 후대에 가장 적실하게 실현시킨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실제로 크루거의 선동적인 텍스트들은 광장의 집회장이나 거리의 광고판, 팻말, 벽보에 더욱 맞춤한 작품들인데, 쾌적한 재벌 미술관에서 관조한다는 건 다분히 역설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한국 전시는 몇년 전 크루거가 대형 설치작품 <포에버>의 공간 콘텐츠를 아모레 미술관 쪽에 소장품으로 제작해주기로 하면서 오랫동안 작업한 인연이 이어져 이뤄졌다고 한다. 자신의 얼굴 촬영 자체를 폭력적으로 간주해온 작가의 특이한 취향도 화제다. 지난 주말 내한했으나 26일 오전 열린 언론 간담회는 물론 이날 오후 마련된 귀빈 개막 모임에도 불참하는 등 대외 노출을 철저히 피했다. 반면, 전시 현장은 내한 직후 이틀간을 살피며 일일이 공간구성과 설치방식을 지시할 정도로 품을 들였다는 후문이다. 한글로 만든 신작 ‘제발 웃어 제발 울어’는 작가가 즉석에서 제작과 배치를 지시해 급하게 만들어졌고, 들머리 계단벽에 바늘로 눈을 찌르는 충격적인 사진을 내건 것도 즉석에서 낸 아이디어라고 미술관 쪽은 전했다. 전시는 12월29일까지(월요일 휴관). 성인 1만3천원, 학생 9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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