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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3월 14일 13시 28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3월 14일 13시 28분 KST

‘밥약’을 둘러싼 새내기 인간관계

3월의 대학가는 눈치전이 한창이다.

Johnnieshin via Getty Images
huffpost

이때쯤의 대학가는 ‘밥약‘을 두고 눈치전이 한창이다. 줄일 필요가 있나 싶은 줄임말이지만, ‘선배가 후배에게 밥을 사주는 약속’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3월 밥약철에는 후배와 선배가 카톡이나 메신저를 교환하며 서로의 본심을 살핀다. 익명 게시판에서 누군가의 후배는 ‘오리엔테이션에서 말 몇 마디 나누고 번호 교환한 선배가 있는데, 카톡 몇 번 하고 밥약 걸면 너무 오버하는 걸까?’라고 묻는다. 또 다른 후배는 ‘뭘 먹자고 해야 하나?’라며 ‘적당히 부담 안 되면서 지겹지도 않고 센스 있어 보이는 곳은 없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의 선배는 ‘번호만 아는 후배가 하나 있는데, 꽤 여러 번 연락하고도 밥약을 안 거네. 내가 싫은 걸까?’라고 고민한다. 또 다른 선배는 ‘제발 밥약 좀 걸어다오’라며 ‘후배 밥 한번 사주고 싶다’라고 성토 중이다.

‘번호도 아는 사이에 밥 한번 먹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옛날 사람이다. 오래전에는 그랬다. 2000년 새내기인 나와 내 동기들은 수업도 안 들어가고 과방에 죽치고 앉아서 아무 선배나 붙잡고 ‘선배 당첨’이라며 미스터피자나 아웃백에 가자고 졸랐다. 1학년 1학기 때 새내기의 밥값은 반드시 선배가 내야 한다는 불문율 같은 게 있어서 가능한 얘기였다.

여러 과정을 거쳤겠지만, 지금 새내기들의 의식은 훨씬 어른스럽다. 게시판을 보면 이미 ‘선배라고 해도 그저 나보다 1년 먼저 입학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다. “선배도 학생인데 돈이 많을 리가 없지. 밥약 때는 우동에 돈가스 정도가 적당할 듯”이라는 조심스러운 글도 보인다. 이 조심스러움 때문에 ‘뻔선-뻔후’라는 문화가 살며시 퍼지고 있기도 하다. ‘뻔’은 ‘번’을 세게 발음한 것이다.

서울 소재 모 대학에서 처음 생겨 이제는 꽤 여러 대학으로 번진 이 ‘뻔’제도는 학번 뒷자리가 같은 연년 선후배를 이어준다. 예를 들어 학번이 ‘20181556’번인 2학년은 ‘20191556’번인 1학년의 뻔선배가 된다. 일종의 ‘멘토-멘티’시스템으로 주로 과 학생회가 주관하며, 따로 뻔선과 뻔후를 이어주는 ‘뻔장’을 두는 학교도 있다. 학번 뒷자리가 같은 게 인연의 전부지만 ‘뻔 선배’는 운이 좋으면 큰 힘이 된다. 같은 계열인 경우가 많아 실질적인 조언을 들을 수 있다. 서운하게 뻔선배가 재수하거나 입대해 부재한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럴 경우 뻔후배를 못 만난 선배가 ‘입양’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뻔 제도가 있는 대학의 익명 게시판에는 ‘입양 가고 싶어요’라는 후배들의 게시 글이 잔뜩 올라와 있다.

밥약의 3월이 지나고도 선배와의 인연이 계속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3월에 밥을 얻어먹은 후배가 ‘보은’(실제로 이 단어를 쓴다)으로 밥을 사는 4월이 지나고, 일회용 밥약의 화살표가 지워지고 나면 일부 학생들에겐 혼밥의 8학기가 남는다. 동아리나 학회에 둥지를 틀어보지만, 매번 타과 학생들과 시간표를 맞춰가며 점심 약속을 잡는 데는 품이 든다.

5월이면 술자리가 눈에 띄게 사라지고, 과방은 주축 멤버 몇 명의 공간으로 변한다. 예전처럼 강의 시간이 끝날 때쯤 학번 전체에게 단체 문자를 돌려 술자리 번개를 치는 일은 극히 드물고, 미리 약속한 친한 몇몇이 소수로 모인다. 취재를 위해 연락한 한 대학 2년생은 “우리도 대학 새내기 3월에는 말로만 들었던 대학의 낭만을 찾기 위해 잔디밭에서 막걸리를 마셔 봤다”라며 “그러나 1학년 3월에 한 번뿐이었다”고 답했다. 그는 이어 “요새도 술 마시자며 ‘1학년은 공부하는 거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다”라면서도 “그런데 그 사람이 학점을 책임져 주는 건 아니지 않나”라고 말했다.

대학의 취업 경쟁을 생각하면 기성세대가 되풀이해 온 캠퍼스 낭만 타령은 무책임하다. 오히려 낭만이란 단어로 뭉뚱그려 말하던 나태의 자리에 나름의 질서를 채웠다고 칭찬해줘야 할 판이다. 과 학생회 부회장을 맡았던 이 대학생은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술 때문에 일어나던 사고도 현저하게 줄었고, 이제는 술을 강권하는 문화도 거의 사라졌다”라며 “예전처럼 토를 할 만큼 마시는 경우도 별로 없고 집에 가고 싶다고 해도 잘 잡지 않는다. 친한 사람들은 점심시간에 커피를 마시면서도 친하다”라고 말했다. “이런 환경에서 나와 잘 맞는 친구 하나를 만났을 때는 그게 정말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라던 그 친구의 말이 가슴에 남았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