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2018년 10월 16일 15시 04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10월 16일 15시 17분 KST

[분석] '사우디 기자 암살 의혹' 사건의 진실은 영원히 묻힐지도 모른다

상황이 수상하게 전개되고 있다.

국제 외교 문제로까지 번질 조짐을 보였던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암살 의혹 사건을 서둘러 수습하려는 움직임이 미국과 사우디, 터키에서 각각 나타나고 있다. 적당한 선에서 의혹을 무마한 채 사건의 진상이 영원히 공개되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Murad Sezer / Reuters
터키 이스탄불에 위치한 사우디아라비아 총영사관의 모습. 2018년 10월12일.

 

사우디의 ‘각본’

CNN월스트리트저널(WSJ) 등 미국 언론들은 15일(현지시각) 익명의 관계자를 인용해 사우디 정부가 자말 카쇼기 기자의 죽음은 ‘개인의 일탈‘이자 ‘실수’에 따른 것이라고 발표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보도했다. 왕실 최고위층이 배후에 있다는 의혹과 거리를 두는 셈이다.

한 관계자는 카쇼기 기자를 심문하는 도중 정부와는 무관한 ‘독자적인(rogue) 첩보원들’이 그를 살해했다고 발표하는 방안을 사우디 정부가 검토하는 중이라고 WSJ에 전했다. 

CNN도 사우디 정부가 카쇼기 기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일이 잘 못되는 바람에’ 그의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시인하는 한편, 독단적으로 행동한 당사자들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NYT)가 인용한 익명의 관계자는 한 사우디 정보기관 소속 관계자가 카쇼기 기자를 살해했다는 내용의 내러티브를 사우디가 곧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일탈’이라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카쇼기에 대한 심문이나 본국 송환을 지시한 건 맞지만, 이 정보기관 요원이 ‘소속 기관 내에서 자신의 역량을 입증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행동했다는 내용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 정보기관의 도청자료를 인용해 빈 살만 왕세자가 카쇼기 기자의 납치를 지시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다만 납치 지시가 암살 의혹과 직접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종합하면, 사우디 정부의 ‘각본’은 지금까지 공식·비공식적으로 밝혀진 내용들을 대부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비어있는 부분들을 그럴 듯 하게 채우는 내용으로 구짜여지는 것처럼 보인다. 

Jonathan Ernst / Reuters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플로리다주 허리케인 피해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떠나기에 앞서 백악관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2018년 10월15일.

  

미국의 변심(?)

″혹독한 대가”를 예고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이같은 움직임에 동조하는 듯한 말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각) 살만 빈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과 20여분 동안 통화했다고 밝히며 ”독자적인(rogue) 살인자들”이 범인일 수 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조금 전에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과 통화를 했다. 그는 그의 표현을 빌자면 그의 ‘사우디아라비아 시민’과 관련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다. 그는 강하게 (암살 의혹을) 부인했다. (...) 국왕은 터키와 사우디아라비아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지켜보자.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문자 그대로 한 시간 내로 떠나 사우디아라비아로 갈 것이다. 우리는 모든 걸 밝혀낼 것이다. 국왕은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그가 정말로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보려는 건 아니지만... 나에게는 이게 독자적인 살인자들(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들렸다. 누가 알겠나?”

트럼프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하루 전과는 그 톤이 꽤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공개된 인터뷰에서 ”조사는 매우, 매우 철저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만약 (사우디 정부가 암살을 지시했다는) 의혹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매우 분노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혹독한 처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에서는 사우디 정부가 암살 배후로 확인될 경우 이에 상응하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던 상황이었다. 사우디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던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도 의회의 압박을 마냥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수 있다.

그러나 (사우디의 ‘각본‘대로) 이번 사건이 ‘개인의 일탈’로 벌어졌다고 결론 지어질 경우, 얘기는 달라진다. 별 일 없었다는 듯, 원래 대로 서로 잘 지내면(?) 된다.  

Murad Sezer / Reuters
터키 경찰 감식 전문가들이 이스탄불에 위치한 사우디아라비아 총영사관에 도착하는 모습. 사건 발생 13일 만이다. 2018년 10월15일.

 

터키의 ‘작업’

사건 초기부터 CCTV 자료 등을 적극적으로 언론에 흘리며 의혹을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했던 터키 정부는 15일(현지시각) 사건이 벌어진 장소로 지목된 이스탄불 사우디 총영사관 수색에 나섰다. 전날 레제트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살만 사우디 국왕이 전화통화에서 ‘긴밀한 협조’를 논의한 지 하루 만이다.

그러나 카쇼기 기자가 사우디 총영사관에 들어갔다가 실종된 지 13일이나 지난 탓에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증거가 현장에 남아있는지는 불분명하다. 

터키 정부는 ‘익명의 관계자’들을 통해 사우디 왕실이 카쇼기 기자 암살을 지시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했다는 말을 언론에 흘려왔다. 15명의 사우디 요원들이 사건 발생 당일 전세기편으로 이스탄불에 도착했고, 총영사관 안에서 카쇼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살해했으며, 요원들 중에는 ‘해부 전문가‘와 ‘뼈 절단기(bone saw)’를 소지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

그러나 터키 정부는 이같은 내용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지도 않았고, 어떻게 그와 같은 정보를 확보했는지도 언급하지 않았다. 카쇼기 기자가 차고 있던 ‘애플워치’를 통해 현장 상황이 녹음됐다는 말도 터키 친정부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지만 기술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유 때문에 터키 정부의 연막 작전이 아니냐는 관측이 이어졌다.  

터키 정부가 사우디 총영사관을 도청했거나 스파이를 심어 관련 자료를 확보했음에도 외교적 갈등에 대한 우려 때문에 공개를 주저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터키 정부가 자료를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과 공유했는지 여부가 관건이다. 만약 터키 정부가 확보했다는 ‘명확한 증거’를 서방 국가들과 공유하며 진상 규명을 촉구할 경우, 사우디 정부를 향한 국제적 압박은 커질 수 있다.

반면 일부 전문가들은 터키 정부가 정보를 손에 쥔 채 사우디와 조용히 ‘거래’를 시도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사건의 진상이 공개되는 것을 막는 대가로 다른 걸 받아낼 수 있다는 것. 양국 간 관계가 완전히 악화되는 것 만큼은 피하자는 동기가 작용했을 수도 있다. 

터키는 (사우디 정부의) 설명을 수긍할 수도 있고, 양측 모두 그렇게 사건을 종결 지을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설령 터키 당국이 증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세계는 사건의 진실을 영영 알지 못할 수도 있다. (뉴욕타임스 10월15일) 

Jonathan Ernst / Reuters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트럼프 정부 첫 해외 순방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무함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와의 회동 직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리야드 리츠 칼튼 호텔, 2017년 5월20일.

 

이해관계

앞서 일부 중동 전문가들은 적당한 수준에서 사태가 수습될 것이라고 예상해왔다. 워싱턴근동정책연구소(Washington Institute for Near East Policy)의 터키 연구원 소네르 차압타이는 WP에 두 나라가 ”우아한 출구(graceful exit)”을 모색하고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두 나라가 ”사우디 정부의 독자적인 집단을 (배후로) 결론 짓고 거물 하나(one big significant name)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우는” 방향으로 ”우아한 출구”를 모색하고 있을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터키가 비엔나 협약을 위반해 사우디 총영사관을 도청해 자료를 확보했다면 (자료) 공개를 꺼릴 수도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워싱턴포스트 10월14일)

미국과 사우디, 터키가 신속한 출구 전략을 모색할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이번 의혹이 터진 이후, 사우디는 국제사회의 압박을 받아왔다. ‘젊은 개혁가’로 전 세계에 빈 살만 왕세자의 이미지는 상처를 입었고, 그가 야심차게 추진해왔던 경제 개혁·개방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사우디는 줄곧 왕실 개입 의혹을 완강히 부인했다. 사우디는 자신들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있고 핵심적 역할”을 강조하며 자국을 겨냥한 제재 등에는 ”더 큰 행동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천명하기도 했다.

실제로 사우디에게는 석유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가디언은 세계 최대 원유 수출국인 사우디가 ‘행동’에 나설 경우, 국제유가가 배러당 80달러에서 400달러 이상으로 두 배 넘게 폭등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 국제유가는 벌써 들썩일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사우디는 무기 판매에 있어 가장 큰 고객이다. 사우디는 세계 2위의 무기 수입국이며, 사우디가 사들이는 무기들 중 61%는 미국에서 온다. 지난 5년 간 미국이 수출한 무기 중 18%가 사우디에 판매됐다. 단일국가 중 가장 큰 규모다. 

 

취임 첫 해외순방지로 사우디를 방문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사우디와 1100억달러(약 123조원) 규모의 무기거래 계약을 맺었다. 보잉, 록히드마틴, 제너럴일렉트릭(GE), 엑손모빌 같은 미국 기업들의 일자리와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다만 계약 규모가 과장됐다는 지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이자 백악관 선임고문인 재러드 쿠슈너는 빈 살만 왕세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 정부 초기부터 중동 정책 설계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쿠슈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사우디의 지지가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사우디 정부가 사건의 배후일 가능성도 있다며 ”혹독한 대가”를 예고할 때도 사우디와의 무기거래를 취소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혀왔다. ”나는 미국으로의 1100억달러 투자를 중단하자는 개념을 좋아하지 않는다.”

터키와 사우디의 관계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두 나라는 꾸준히 관계 개선을 추진해왔으며, 터키에게는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부유한 무역 파트너와의 장기적 갈등을 감내할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NYT는 진단했다. 

터키는 트럼프 정부 취임 이후 ‘동맹을 깰 수도 있다‘고 위협하며 미국과 여러 차례 충돌하긴 했지만, 여전히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관계라는 분석이 많다. 터키는 두 나라 간 갈등의 원인 중 하나였던 앤드루 브런슨 목사를 13일 전격 석방했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트럼프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조치다.

그런가 하면 15일 사우디는 돌연 태도를 바꿔 다음달부터 석유 생산량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미국이 이란에 대한 제재를 11월5일부터 재개할 예정이어서 이란산 원유 공급 중단으로 인한 국제유가 급등 우려가 나오던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를 비롯한 OPEC(석유수출국기구)이 다른 국가들을 ‘강탈’하고 있다며 석유 생산량을 늘리라고 요구해왔다. 연합뉴스는 ”사우디가 추가로 생산할 수 있다고 밝힌 일일 130만 배럴은 제재 뒤 감소할 이란의 수출량과 거의 비슷하다”고 전했다.

크리스 머피 미국 상원의원(민주당, 코네티컷)은 ”사우디가 터무니 없는 ‘독자적인 살인자들’ 이론으로 이 사태를 돌파할 거라는 말이 들려오고 있다”고 트위터에 적었다. ”그들의 PR 요원들이 이걸 띄우면서 이렇게 미국 대통령의 협조를 얻어낼 수 있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자말 카쇼기 기자 암살 의혹의 진실은?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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