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2018년 06월 29일 16시 01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7월 02일 11시 29분 KST

[허프포스트 인터뷰] 제주 예멘 난민들에게 '당신들은 누구냐'고 물었다

예멘인들이 말하는 전쟁, 평화, 그리고 희망.

 

 

HuffPost Korea/Yoonsub Lee
예멘인 10여명이 머물고 있는 제주 시내 한 게스트하우스. 침대 위에 누군가의 가방이 놓여있다.

 

제주는 늘 섬 바깥에서 온 사람들로 붐빈다. 4월 제주 입도(入島) 관광객은 131만여명으로 집계된다. 많을 때는 제주 전체인구(약 68만명)의 두 배에 달했다. 그들은 섬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여행이 끝나면 지체없이 섬을 떠난다. 떠나온 곳으로 돌아간다. 여행은 돌아갈 집이 있는 이들에게 허용된 작은 특권 같은 것이다. 

제주에 온 예멘인들은 편도티켓을 끊고 왔다. 돌아갈 집이 없거나,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다. 관광객이 아닌, 난민 신청자로 왔다. 올해 제주에 온 549명의 예멘인이 난민신청을 했다. 4월30일 출도(出島) 제한 조치가 내려지기 전 섬을 떠난 63명을 뺀 486명이 난민심사 대상이다. 심사관 1명이 추가돼 2명이 심사를 맡는다. 

난민의 사전적 정의는 간단하다. ‘인종, 종교, 특정집단의 구성원 신분,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본국의 박해를 받을 우려 또는 그러한 공포 때문에 본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본국의 보호를 원하지 않는 자.’ 난민협약은 난민을 이렇게 정의한다. 한국은 이 국제조약에 가입한 144개국 중 하나다. 2013년에 난민법도 시행됐다. 

예멘은 전쟁 중이다. 전쟁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대개는 사우디가 이끄는 아랍연합군의 대규모 공습이 시작된 2015년 3월을 기점으로 본다. 애초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 양상을 띠던 전쟁은 사우디와 이란이 개입된 국제전으로 확대됐다. 혼란을 틈타 분리주의 집단, 극단주의 단체들도 끼어들었다. 

549명에게는 549개의 이야기가 있다. 549개의 서로 다른 삶이, 생명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좀처럼 개별적으로 호명되지 않는다. 뭉뚱그려 ‘제주 예멘 난민’으로 지칭된다. ‘우리’를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로 간주돼 배제와 차별에 시달린다. 이들은 누구일까. 왜 집을 떠나와야 했던 걸까. 질문들은 좀처럼 벽을 넘지 못한다.

허프포스트는 사흘 동안 제주에서 예멘인 다섯 명과 마주 앉아 물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 예멘 난민’으로 묶는 대신, 각자의 이름과 삶을 끄집어냈다. 이들의 경험은 비슷하지만 또 각각 달랐다. 오고 가며 인사를 주고 받은 다른 예멘인들의 삶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모든 삶은 개별적으로 말해져야 한다. 

 

HuffPost Korea/Yoonsub Lee
아드난(29)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석유 관련 프랑스계 회사에서 근무했고, 전쟁이 터진 뒤에는 영어 교사 일자리를 임시로 구했으나 학생이 줄어들면서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은 제주의 한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고 있다. 근무시간은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오후 3~5시는 쉬는 시간이다. 식사시간을 빼면 하루에 8~9시간 일하는 셈이다.

 

아드난의 이야기

아드난은 예멘에서 MBA를 전공했다. 승마와 축구를 즐겼다. 잉글랜드 프로축구팀 리버풀 팬이기도 하다. 프랑스계 회사에서 일하던 중 전쟁이 터졌다. 프랑스인 직원들이 모두 철수하면서 회사는 문을 닫았다. 급한대로 영어교사 일자리를 구했다. ”누구도 전쟁이 이렇게 오래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그의 삶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좋은 집도 있었고, 월급도 좋았다. 좋은 직업, 풍족한 생활이 있었다. 의료보험도 있었고, 차도 있었고, 모든 게 괜찮았다.” 전쟁은 모든 걸 바꿔놨다. ”가족들은 일찌감치 예멘을 떠났다”고 했다. 가족들은 카타르로 갔다가 다시 흩어져 각각 다른 곳으로 갔다. 그는 혼자 남았다.

아드난은 예멘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오래 버텨보려 했다. “1주나 2주, 아니면 한 두 달이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들은 떠났지만 나는 남기로 했다. 어차피 일도 해야 했고. 누군가는 집을 지켜야 했다. 금방 모두가 돌아오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떠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오래 남아있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내 목숨도 몇 번 위험에 처했다”고 그는 말했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들(정부군과 반군)은 사람들을 강제로 징집해서 전쟁에 나가 싸우도록 한다. 어느 쪽에서 싸울지를 정해야 할 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한다.” 그것 말고도 예멘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이 죽는다. 

″공습으로 죽을 수도 있고, 전쟁터에서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고, 굶주림으로 죽을 수도 있다. 만약 병이 생기면, 대부분의 병원은 문을 닫았고 그나마 남은 병원은 비쌀 뿐더러 봉쇄 때문에 의약품도 부족하다. 병원에 갈 여력이 없거나 가더라도 약이 없어서 죽을 수도 있다.” 그는 예멘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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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수도 사나(Sana'a)에 위치한 Thawra 병원에서 환자들이 투석을 받고 있는 모습. 2018년 4월1일. 

 

그러나 막상 갈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예멘에 있는 외국 대사관들이 일제히 철수하면서 비자를 신청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대사관이 있는 가까운 나라로 가려면 비자가 필요했다. ”비자를 신청하러 가기 위해 비자를 신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피를 나눈 사이”인 옆 나라들은 예멘인들이 쏟아지자 국경을 닫아버렸다.      

목적지가 그렇게 정해졌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많은 국가들에서는 겨우 2주, 1개월만 체류할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가 제일 체류허용기간이 길었다. 3개월이다. (...) (사정이) 좋을지 안 좋을지 몰랐다. 그저 예멘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비자 없이 가장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아드난은 오만과 카타르를 거쳐 말레이시아에 도착했다. 말레이시아는 난민협약 가입국이 아니다. 난민을 받지 않는다. 취업도 허용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제주로 갈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소식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은 ”비자 없이 갈 수 있으면서도 난민을 받아주는 유일한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왜 캐나다나 유럽으로 가지 않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곳으로 갈 수 없었던 건 비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왜 그 멀리에서 이 극동 지역까지 왔냐고, 옆 나라나 유럽 같은 곳으로 갔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의심한다. 난민을 받아주는 (유럽) 다른 나라들은 모두 비자가 필요하다. 전부다.” 

아드난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난민신청을 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항 내 송환대기실에서 나흘을 머물다가 바깥으로 나왔다. 5월2일이었다. 지금은 제주의 한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고 있다. ”내 난민신청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국제협약에 서명했고, 내가 그 협약의 당사자다. 나는 난민이 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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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시내 한 호텔에서 예멘인들이 음식을 나누고 있는 모습. 2018년 6월27일.

 

그는 자신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여론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는 ″모든 인종에는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이 있고,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나쁜 사람은 어느 종교나 인종에나 다 있지만 일반화하지는 않는다. 한 가지 나쁜 점을 가지고 전체를 일반화해서 나쁘게 보이도록 하면 안 된다. 그건 옳바르지 않은 일이다.”

″극단주의자들은 항상 무언가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사람들의 공포를 조장한다. 이슬람이나 아랍, 예멘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나쁘게 보이도록 하려 할 것이다. 전부 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전부 다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디에나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아드난은 ”전쟁 때문에 해외를 떠돌았고, 시험을 거친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어떤 사람들은 ‘일정 기간 동안 예멘인들을 제주에 묶어놓고 아무 데도 못 가도록 해서 시험을 거친 다음에 괜찮으면 그 때 아무 곳이든 갈 수 있게 해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사람들이 말레이시아에서 지내는 동안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아드난은 ”우리는 난민이지 노예가 아니”라는 말도 했다. ”난민들이 향했던 어떤 국가들에서는 난민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난민에게는 어떤 일이든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난민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난민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우리가 이곳에서 그런 대우를 받지 않기를 바란다.”

아직 나쁘지는 않다. 그는 한국인은 물론, 제주에 사는 미국, 캐나다, 남아공, 호주인들과 친구가 됐다. 주민들도 친절했다. 특히 노인들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분들은 정말 말씀을 많이 하셨다. 1950년대 한국 사람들도 우리랑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했다.” 아드난은 ”우리가 받은 걸 돌려줄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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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질라(34)는 제주에 온 몇 안 되는 미혼 여성 중 하나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한 달을 지냈고, 지금은 한국인 부부와 함께 살면서 주말에 카페 일을 돕고 있다. 이혼한 부모는 모두 오래전에 예멘을 떠났다. 8남매 중 4남매는 아빠를 따라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다. 엄마는 재혼한 뒤 미국으로 갔다. 레질라는 자매 둘, 오빠 하나와 함께 예멘에서 살았다.

 

레질라의 이야기

레질라는 비교적 일찍 제주에 온 편이다. 그 중에서도 미혼 여성은 드물었다. 그는 오빠와 ”사랑스러운” 조카 셋을 예멘에 남겨두고 지난해 8월 말레이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해외로 나간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 전쟁이 나기 전에는 화장품 판매원으로 일했다. ”월급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좋았다”고 한다.

그는 “모든 게 (지금보다) 더 좋았다. 안전했고, 그 때는 모든 게 괜찮았다”고 말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우리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집에 있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집들이 폭격을 당하기도 했다. 많은 가족들이 죽었고, 대부분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 아이, 여성들... 비극이었다.”

예멘을 떠난 이유를 물었다. 답은 간단했다. ”예멘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너무 위험하다. 너무, 너무 위험하다. 얼마나 위험한지 설명하기 힘들 정도다. 어디에든 폭탄이 떨어지고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고... 우리는 우리나라를 정말 사랑한다. 아름답고 안전한 곳이었다. 경제적으로도 괜찮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친구의 형제는 지난해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죽음을 당했다. 후티 반군은 대뜸 오토바이를 내놓으라고 했다.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들은 집으로 도망친 그와 문을 열어주러 나온 형에게 총을 쐈다. 둘 다 그 자리에서 숨졌다. 26살, 32살이었다. ”이건 전쟁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예멘에서는 이런 일이 늘 벌어진다.” 

13~14세쯤 되는 이웃 어린이가 어느날 실종되는 일도 있었다. 부모가 찾으러 다녔지만 헛수고였다. 3~4개월 뒤, 후티 군인들이 나타났다. ”우리랑 같이 전쟁에 참여했고, 전사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했다. 아빠는 큰 총을 꺼내 그들을 전부 죽여버렸다. 곧 아이의 아빠도 끌려갔다. 그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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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후티 반군 군인들이 수도 사나에서 기념행사를 마치고 귀환하는 모습. 후티 반군은 사우디 주도 아랍연합군의 공습 1000일을 맞아 사우디 수도 리야드(Riyadh)로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고 주장했다.

 

탈출은 험난했다. 레질라가 살고 있던 사나는 후티 반군에 장악됐다. 공항은 문을 닫았다. 국제 항공편이 뜨는 유일한 공항은 정부군의 임시수도인 아덴에 있었다. 가는 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너무 위험했다. 버스를 타고 하루 반나절을 달려 오만으로 갔다. 작은 가방 하나만 챙겼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말레이시아에서의 생활을 레질라는 썩 좋아하지 않았다. 1년 내내 덥고 습한 날씨도 힘들었고, 취업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도 힘들었다. 불법취업이 적발되면 구금된다. 그는 ”(말레이시아의 감옥은) 세계 최악의 감옥이라고 들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한 친구에게서 제주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레질라는 한국인들의 불편한 시선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갑자기 이렇게 많은 예멘인들이 왔다는 게 그들에게는 충격적이었을 거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겁나는, 사실 겁나는 상황이다. 모두가 이 상황을 받아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 우리를 안 좋게 보는 한 사람의 의견으로 모든 한국인을 판단할 수는 없다.”

이슬람에 대해 물었다. 주저없이 답했다. ”이슬람은 복잡하지 않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무슬림이라고 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무슬림은 소박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누구도 증오하지 않으며, 타인의 종교를 존중한다.”  

예멘 여성의 삶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했다. 레질라의 부모는 그를 ”더 자유롭고 개방적으로 키웠다”고 한다. 20년 전만 해도 여성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게 많았다. 여성은 집에서 요리를 하고, 가족들을 돌보고, 농사를 거들 뿐이었다. 이건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문화적인 전통 같은 것”이었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1995년에 내가 (사우디에서) 예멘으로 이사했을 때만 해도 여성에게는 살아가기 끔찍한 곳이었다. 여성이 저녁 5시에 밖에 돌아다니면 뭔가 잘못된 것처럼 여겨졌다. 지금은 다르다. 여성들도 바깥에 나가고, 직업을 가진 여성들도 많다. 예전에는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게 뭔가 끔찍한 일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레질라는 아직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다만 언젠가는 오빠와 세 조카가 있는 예멘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예멘을 떠날 때 조카들이... 완전 웃겼다. 잡아당기고, 울고, 소리지르고... 그날 집을 나오는 게 정말 힘들었다. 날 붙잡으면서 ‘가지마! 가지마!’ 소리 지르고… 정말 사랑스럽다. 엄청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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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메드(33)는 아내, 10개월 된 어린 아들과 함께 제주에 왔다. 예멘에는 부친, 두 자매, 형이 있다. 모친은 2003년에 세상을 떠났다. 

 

모하메드의 이야기

모하메드는 예멘 국책항공사 ‘예메니아예멘항공’ 직원으로 일했다. 아랍연합군의 공습이 있던 날, 그는 사나 공항에 있었다. 후티 반군이 장악하고 있던, 공항 바로 옆 공군기지로 사정없이 미사일이 쏟아졌다. 그는 ”겨우 도망쳐나왔다”고 한다. 3년을 훌쩍 넘겨 계속되고 있는 전쟁도, 그의 피난 생활도 그렇게 시작됐다. 

그와 아내, 부친은 사나를 떠나 타이즈로 피했다. 공습도 따라왔다. 다시 사나로 돌아갔다. 집은 이미 파괴된 상태였다. 다시 고향 호데이다로 옮겼다. ”뉴스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저 기다렸는데 모든 게 더 악화되기만 했다. 그래서 예멘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잃었다. 나 자신과 가족까지 잃고 싶지는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기 두달 전, 모하메드는 결혼식을 올렸다. 이집트에서 허니문을 즐겼다. 행복은 짧았다. ”신혼여행 다녀오고 한 달쯤 지나 전쟁이 시작됐다. 아내에게 금을 선물했었다. 우리 사정은 매우 좋았다. 직업도 있고, 땅도 있고, 집도 있고, 모든 게 괜찮았다. 예멘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선물했던 금을 모두 팔았다.”

모하메드는 ”전쟁과 폭격이 벌어지는” 사막지대를 통과해 혼자서 도보로, 자동차와 버스를 타고 오만으로 갔다. 그곳에서 말레이시아행 비행기를 탔다. 비싼 돈을 내가며 체류기간을 연장했다. 레스토랑 주방 일자리를 구했다. 불법이었다. 하루에 17시간씩 일하고 한 달에 300달러를 벌었다. 현지인의 4분의1 수준이었다. 

1년 동안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잠시 전쟁이 멈춘 틈에 아내는 아덴을 출발해 뭄바이를 거쳐 쿠알라룸푸르에 왔다. 2016년 8월1일이었다. 1년 만에 아내와 재회한 날이다. 두 사람은 1년짜리 가족 비자를 받았다. 아이도 생겼다. 그러다가 예멘 커뮤니티를 통해 제주도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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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메드 가족의 여권에는 '허가 없이 제주도를 떠날 수 없다'는 내용의 스탬프가 새로 찍혔다. 제주에서는 한국인 부부를 소개 받아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모친, 여섯 딸과 함께 제주에 온 예멘인 가족, 5남매를 둔 부부, 임신부가 있는 두 가족 등도 각각 다른 한국인 가족과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모하메드에게는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예멘에서 공부할 때 서울에서 온 박성균이라는 이름의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의 부인도 우리랑 같이 공부했다. 한국 정부 지원을 받아 예멘에 와서 이슬람, 아랍 문화, 언어를 공부했다. (졸업 후에는) 여러차례 나를 한국에 초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예멘의 작은 마을에 가면 ‘한국의 지원으로 세워진 학교’, ‘한국의 지원으로 문을 연 병원’, ‘한국이 지원해 준 버스’ 같은 걸 볼 수 있다. 한국 정부는 예멘을 도와줬다. 그런 한국이 우리를 받아준다는 거다.” 5월15일, 그와 아내, 그리고 10개월 된 아들이 탄 비행기가 4246km를 날아 제주공항에 내렸다.

그는 지금은 ”엄마, 아빠”로 부르는 한국인 노부부의 집에서 살고 있다. 이 부부는 ”‘여기가 집이라고 생각하라’고 말해줬다”고 한다. ”장보러 가서 우리 아기 장난감, 옷, 음식도 엄청나게 많이 사줬다. 이 옷도 그 분이 사준 거다. 아내 옷도 사주셨고. 음식도. 모든 걸 다 사주셔서 우리가 남겨놓은 돈 200달러는 그대로 있다.”

그는 예멘 전쟁은 종교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고 본다. ”모두가 자기쪽 사람들을 대통령에 앉히고 싶어한다”는 것. 그러면서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시아파고, 아빠는 수피파(Sufi)다. 자식들은 다 수니파고. 같은 종교지만 종파가 다르다. 그래도 우리는 한 가족이다. 그동안 행복하게 잘 지냈다. 같이 잘 살았다.”  

모하메드는 언젠가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나라가 잠잠해지고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게 정리되면 나는 돌아갈 거다. 내 생활은 괜찮았다. 공부도 많이 했고, 일도 많이 했다. 집도 샀고. 잘 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 내 잘못도 아니고, 다른 가족들의 잘못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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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르가 숙소에서 기도하고 있다. 그는 독실한 무슬림이다. 예멘에는 아내와 부모, 세 아들과 두 딸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족과 통화한다. 집을 떠난지 벌써 2년이 넘었다.

 

무함마르의 이야기

무함마르는 그저 평범한 알루미늄 기술자였다. 부친에게 물려 받은 작은 회사를 12년째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 셋 딸 둘을 가진 가장이었고, ”자동차를 바꾸는 게 취미”였던 평범한 남성이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매일 정해진 시간 기도를 잊지 않는 독실한 무슬림이기도 했다. 그의 일상은 그런대로 평화로웠다.   

2011년 예멘에서는 혁명이 있었다. ‘아랍의 봄’ 민주화 운동이 예멘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격렬한 시위 끝에 살레 대통령이 33년 만에 물러났다. 무함마르는 그 때 정당 ‘알 이슬라’의 당원으로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에는 후티도 같은 편이었다. 후티가 하디 대통령이 이끄는 과도정부와 대립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가 살고 있던 사나는 후티 반군에 의해 점령됐다. 그의 부친은 그의 등을 떠밀었다. ”나는 알 이슬라 당원이었다. 알 이슬라가 (하디) 정부를 지지하고 있고, 내가 그런 정당을 지지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많은 알 이슬라 당원들이 후티 반군에 납치됐다. 후티가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거의 모든 당원들이 도시를 떠났다.”

그는 예멘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결혼도 했고, 부친에게 물려받은 직업도 있었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더 행복해지고 있었다. 모든 게 좋았다. 예멘을 떠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떠나야만 했다. 가족을 남겨두고 말레이시아로 피했다. 비자를 연장해가며 2년 가까이 버텼다.

말레이시아는 비교적 안전했지만 계속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가 제주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 건 약 1년 전이다. “7년 전까지만 해도 예멘인들은 비자 없이 한국에 갈 수 있었다. 상황은 괜찮았고, 위험을 느끼지도 않았기 때문에 예멘을 떠나 한국으로 가게될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곳에 왔다.

그는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제일 먼저 가족을 데려오고 싶다고 말했다. 2년 넘게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있는 탓이다. ‘일주일에 몇 번이나 가족과 통화하냐’고 물었더니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가장 최근 통화기록은 불과 2시간 전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내일 아침이라도 예멘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함마르는 ”한국인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항상 웃음으로 대해줬고, 난민들을 존중해줬다”고 했다. 그는 다른 예멘인 10여명과 함께 한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고 있다. 이곳 관리인은 ”단체 손님인 줄 알고” 덜컥 받았던 예멘인들의 사정을 듣고 숙박비를 받지 않고 있다. 사비를 털어가며 음식 재료를 마련해줬다. 

무함마르는 끝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누구든 잘못을 저지르는 예멘인이 있다고 해도 한국인들이 그 한 사람으로 전체 예멘인들을 판단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예멘인들은 어딜 가든 상냥하고, 그 나라의 문화와 법을 존중한다. 누군가 잘못을 했다면, 그건 그의 잘못이지 모든 예멘 난민들의 잘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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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일(30)이 예멘에 있는 어머니와 통화하고 있다. 예멘에는 그의 모친과 남동생이 있다. 먼저 사우디로 떠났던 형은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이스마일의 이야기 

″전쟁 전까지 내 삶은 평범했다. 꿈도 많았고, 기자로 일하면서 사람들에 대해, 또 내 의견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기자로서 이름을 알리기 좋은 시절이었다. 일이 없을 때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내 꿈을 쫓았다. 그 꿈들은 현실이 되려던 참이었다.” 이스마일은 기자였다. 소설과 시를 즐겨쓰는 문학청년이기도 했다. 

다른 예멘인들의 삶도 마찬가지로 평범했다. ”모두가 평화롭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위험 같은 건 없었고, 사람들은 나누면서 살았다. 서로 지지하는 쪽이 다르다 하더라도 함께 지냈다. 옛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새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의견을 가졌다 하더라도 서로 존중했다.”

평범했던 그의 삶은 흔들렸다. 그는 후티 반군의 잔혹한 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위협을 받았다. 그가 살았던 사나는 후티 반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휴대폰, 페이스북 계정은 물론, 모든 흔적을 지웠다. 가족과도 연락을 끊은 채 1년 반 동안 한 시골 마을에 몸을 숨겼다. 그럼에도 그는 예멘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후티 반군 점령 이후) 많은 사람들이 예멘을 떠났다. 많은 이들이 나에게도 예멘을 떠날 것을 권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위협이 나에게 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신문사 문을 닫아버리기 전이었는데, 자신들에 반대하는 글을 페이스북이나 신문에 계속 쓰면 나를 납치하거나 살해하겠다고 위협해왔다.”

후티 반군은 그가 몸을 숨기고 있던 지역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는 예멘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모친과 남동생을 남겨두고 혼자 길을 떠났다. 요르단, 두바이를 거쳐 말레이시아로 갔다. 예멘을 떠날 때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꼈다. ”삶의 모든 걸 잃어버리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이스마일은 그곳에서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돈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6~7000달러를 주면 한국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며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합법적인 방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제주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는 ”복권에 당첨된 것 같았다”.

HuffPost Korea/Yoonsub Lee
이스마일은 예멘에 있는 어머니와 서로 음식 사진을 주고 받으며 그리움을 달랜다.

 

한국은 낯선 나라가 아니었다. ‘강남스타일’도 있었고 ”유명한 한국 가수” 이민호나 한국영화도 친숙했다. 이스마일은 2009년 예멘과 한국이 맺은 ”큰 가스 계약”도 기억한다. 연간 200만톤의 LNG가스를 20년 간 한국에 수출하는 내용의 이 계약은 당시 ”예멘 최대 가스 프로젝트”로 불렸다. 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상태다.

이스마일은 제주에 도착하던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모를 거다. 나는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 말레이시아에서보다 더. 말레이시아에서는... 한국인들은 웃음으로 대해줬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더 행복하고, 더 안전하고. 모든 게 더 좋았다.”   

그에게 한국은 ”훌륭한 나라, 문명화된 나라”다. ”여기에는 인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왔다.” 출입국외국인청 직원들의 친절에도 놀랐다고 했다. ”뜻밖의 일이었다. 이 사람들이 하늘에서 왔나 싶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곤 했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 이건 큰 차이로 다가왔다. 

″이 전쟁은 종교와 무관하다.” 이스마일은 단언한다. 그는 후티 반군 뿐만 아니라 정부를 지원하고 있는 사우디에도 비판적이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왔지만 우리는 이걸 전쟁범죄라고 부른다.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고 해서 이걸 감출 수는 없다. 나는 어느 쪽의 편도 아니다. 나는 사람들의 편이다.”

지금은 ‘무교’이지만 그도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이슬람은 ”평화로 돌아가자는 종교”다. ”남을 돕고,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극단주의자들은 무슬림이 아니다. 전 세계 곳곳에 수억명의 무슬림이 있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건 그의 잘못이다. 한 사람, 한 집단의 잘못으로 나머지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다.”  

평범한 일상. 지금 가장 큰 꿈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뭔가 좋은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동료 예멘인들의 통역을 돕고 지원단체들의 일손을 거들고 있다. 한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한국을 떠나게 되더라도 좋은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한국은 나를 도와주지 않았어! 나를 받아주지 않았어!’ 이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화가 난 상태로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내 신청이 거절되더라도 나는 그걸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좋은 감정으로 한국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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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난민기구(UNHCR)의 집계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집을 잃은 난민은 전 세계에서 6850만명에 달한다. 1년 사이 1620만명이 늘었다. 매일 평균 4만4400명이 새로 난민이 된다. 4000만명이 국내 실향민, 2540만명이 국경을 넘은 난민이다. 310만명은 난민신청자(asylum-seekers) 신분으로 난민 인정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은 가봉, 이스라엘, 일본, 파키스탄과 함께 난민에 인색한 국가로 꼽혔다. 난민인정률이 10%에 못 미친 나라들이다. 1994년 4월부터 2018년 5월까지 한국은 4만470명의 난민신청을 접수해 이 중 2만361명을 심사했다. 난민으로 인정받은 건 839명으로, 난민인정률은 4.1%로 집계된다. 난민심사관은 전국에 38명이다.

한국은 1992년 12월 난민협약에 가입했으며,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2013년 7월부터 자체 난민법을 시행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대한민국은 지난 5년간 난민지원 규모를 15배 확대했고, 작년에는 유엔난민기구 ‘2천만불 공여국 클럽’에 합류했다”고 강조했다. 국제적 역할과 책임을 강조했다.  

″대한민국과 유엔은 늘 함께 해왔습니다. 대한민국은 1948년 정부수립으로부터 한국전쟁, 전후재건의 과정까지 유엔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은 1991년에 이르러서야 유엔 회원국이 되었지만 불과 한세대 동안 그 어떤 나라보다 빠르게 회원국으로서 역할과 책임을 높여왔습니다. (...)

유엔의 모든 분야에서 대한민국은 앞으로 더욱 기여를 높여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