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메드 가족의 여권에는 '허가 없이 제주도를 떠날 수 없다'는 내용의 스탬프가 새로 찍혔다.
제주에서는 한국인 부부를 소개 받아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모친, 여섯 딸과 함께 제주에 온 예멘인 가족, 5남매를 둔 부부, 임신부가 있는 두 가족 등도 각각 다른 한국인 가족과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HuffPost Korea/Yoonsub Lee
사실 모하메드에게는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예멘에서 공부할 때 서울에서 온 박성균이라는 이름의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의 부인도 우리랑 같이 공부했다. 한국 정부 지원을 받아 예멘에 와서 이슬람, 아랍 문화, 언어를 공부했다. (졸업 후에는) 여러차례 나를 한국에 초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예멘의 작은 마을에 가면 ‘한국의 지원으로 세워진 학교’, ‘한국의 지원으로 문을 연 병원’, ‘한국이 지원해 준 버스’ 같은 걸 볼 수 있다. 한국 정부는 예멘을 도와줬다. 그런 한국이 우리를 받아준다는 거다.” 5월15일, 그와 아내, 그리고 10개월 된 아들이 탄 비행기가 4246km를 날아 제주공항에 내렸다.
그는 지금은 ”엄마, 아빠”로 부르는 한국인 노부부의 집에서 살고 있다. 이 부부는 ”‘여기가 집이라고 생각하라’고 말해줬다”고 한다. ”장보러 가서 우리 아기 장난감, 옷, 음식도 엄청나게 많이 사줬다. 이 옷도 그 분이 사준 거다. 아내 옷도 사주셨고. 음식도. 모든 걸 다 사주셔서 우리가 남겨놓은 돈 200달러는 그대로 있다.”
그는 예멘 전쟁은 종교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고 본다. ”모두가 자기쪽 사람들을 대통령에 앉히고 싶어한다”는 것. 그러면서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시아파고, 아빠는 수피파(Sufi)다. 자식들은 다 수니파고. 같은 종교지만 종파가 다르다. 그래도 우리는 한 가족이다. 그동안 행복하게 잘 지냈다. 같이 잘 살았다.”
모하메드는 언젠가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나라가 잠잠해지고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게 정리되면 나는 돌아갈 거다. 내 생활은 괜찮았다. 공부도 많이 했고, 일도 많이 했다. 집도 샀고. 잘 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 내 잘못도 아니고, 다른 가족들의 잘못도 아니다.”
무함마르가 숙소에서 기도하고 있다. 그는 독실한 무슬림이다. 예멘에는 아내와 부모, 세 아들과 두 딸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족과 통화한다. 집을 떠난지 벌써 2년이 넘었다. ⓒHuffPost Korea/Yoonsub Lee
무함마르의 이야기
무함마르는 그저 평범한 알루미늄 기술자였다. 부친에게 물려 받은 작은 회사를 12년째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 셋 딸 둘을 가진 가장이었고, ”자동차를 바꾸는 게 취미”였던 평범한 남성이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매일 정해진 시간 기도를 잊지 않는 독실한 무슬림이기도 했다. 그의 일상은 그런대로 평화로웠다.
2011년 예멘에서는 혁명이 있었다. ‘아랍의 봄’ 민주화 운동이 예멘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격렬한 시위 끝에 살레 대통령이 33년 만에 물러났다. 무함마르는 그 때 정당 ‘알 이슬라’의 당원으로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에는 후티도 같은 편이었다. 후티가 하디 대통령이 이끄는 과도정부와 대립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가 살고 있던 사나는 후티 반군에 의해 점령됐다. 그의 부친은 그의 등을 떠밀었다. ”나는 알 이슬라 당원이었다. 알 이슬라가 (하디) 정부를 지지하고 있고, 내가 그런 정당을 지지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많은 알 이슬라 당원들이 후티 반군에 납치됐다. 후티가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거의 모든 당원들이 도시를 떠났다.”
그는 예멘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결혼도 했고, 부친에게 물려받은 직업도 있었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더 행복해지고 있었다. 모든 게 좋았다. 예멘을 떠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떠나야만 했다. 가족을 남겨두고 말레이시아로 피했다. 비자를 연장해가며 2년 가까이 버텼다.
말레이시아는 비교적 안전했지만 계속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가 제주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 건 약 1년 전이다. “7년 전까지만 해도 예멘인들은 비자 없이 한국에 갈 수 있었다. 상황은 괜찮았고, 위험을 느끼지도 않았기 때문에 예멘을 떠나 한국으로 가게될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곳에 왔다.
그는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제일 먼저 가족을 데려오고 싶다고 말했다. 2년 넘게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있는 탓이다. ‘일주일에 몇 번이나 가족과 통화하냐’고 물었더니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가장 최근 통화기록은 불과 2시간 전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내일 아침이라도 예멘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함마르는 ”한국인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항상 웃음으로 대해줬고, 난민들을 존중해줬다”고 했다. 그는 다른 예멘인 10여명과 함께 한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고 있다. 이곳 관리인은 ”단체 손님인 줄 알고” 덜컥 받았던 예멘인들의 사정을 듣고 숙박비를 받지 않고 있다. 사비를 털어가며 음식 재료를 마련해줬다.
무함마르는 끝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누구든 잘못을 저지르는 예멘인이 있다고 해도 한국인들이 그 한 사람으로 전체 예멘인들을 판단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예멘인들은 어딜 가든 상냥하고, 그 나라의 문화와 법을 존중한다. 누군가 잘못을 했다면, 그건 그의 잘못이지 모든 예멘 난민들의 잘못이 아니다.”
이스마일(30)이 예멘에 있는 어머니와 통화하고 있다. 예멘에는 그의 모친과 남동생이 있다. 먼저 사우디로 떠났던 형은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HuffPost Korea/Yoonsub Lee
이스마일의 이야기
″전쟁 전까지 내 삶은 평범했다. 꿈도 많았고, 기자로 일하면서 사람들에 대해, 또 내 의견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기자로서 이름을 알리기 좋은 시절이었다. 일이 없을 때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내 꿈을 쫓았다. 그 꿈들은 현실이 되려던 참이었다.” 이스마일은 기자였다. 소설과 시를 즐겨쓰는 문학청년이기도 했다.
다른 예멘인들의 삶도 마찬가지로 평범했다. ”모두가 평화롭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위험 같은 건 없었고, 사람들은 나누면서 살았다. 서로 지지하는 쪽이 다르다 하더라도 함께 지냈다. 옛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새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의견을 가졌다 하더라도 서로 존중했다.”
평범했던 그의 삶은 흔들렸다. 그는 후티 반군의 잔혹한 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위협을 받았다. 그가 살았던 사나는 후티 반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휴대폰, 페이스북 계정은 물론, 모든 흔적을 지웠다. 가족과도 연락을 끊은 채 1년 반 동안 한 시골 마을에 몸을 숨겼다. 그럼에도 그는 예멘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후티 반군 점령 이후) 많은 사람들이 예멘을 떠났다. 많은 이들이 나에게도 예멘을 떠날 것을 권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위협이 나에게 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신문사 문을 닫아버리기 전이었는데, 자신들에 반대하는 글을 페이스북이나 신문에 계속 쓰면 나를 납치하거나 살해하겠다고 위협해왔다.”
후티 반군은 그가 몸을 숨기고 있던 지역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는 예멘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모친과 남동생을 남겨두고 혼자 길을 떠났다. 요르단, 두바이를 거쳐 말레이시아로 갔다. 예멘을 떠날 때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꼈다. ”삶의 모든 걸 잃어버리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이스마일은 그곳에서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돈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6~7000달러를 주면 한국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며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합법적인 방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제주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는 ”복권에 당첨된 것 같았다”.
이스마일은 예멘에 있는 어머니와 서로 음식 사진을 주고 받으며 그리움을 달랜다. ⓒHuffPost Korea/Yoonsub Lee
한국은 낯선 나라가 아니었다. ‘강남스타일’도 있었고 ”유명한 한국 가수” 이민호나 한국영화도 친숙했다. 이스마일은 2009년 예멘과 한국이 맺은 ”큰 가스 계약”도 기억한다. 연간 200만톤의 LNG가스를 20년 간 한국에 수출하는 내용의 이 계약은 당시 ”예멘 최대 가스 프로젝트 ”로 불렸다. 지금은 생산이 중단 된 상태다.
이스마일은 제주에 도착하던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모를 거다. 나는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 말레이시아에서보다 더. 말레이시아에서는... 한국인들은 웃음으로 대해줬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더 행복하고, 더 안전하고. 모든 게 더 좋았다.”
그에게 한국은 ”훌륭한 나라, 문명화된 나라”다. ”여기에는 인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왔다.” 출입국외국인청 직원들의 친절에도 놀랐다고 했다. ”뜻밖의 일이었다. 이 사람들이 하늘에서 왔나 싶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곤 했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 이건 큰 차이로 다가왔다.
″이 전쟁은 종교와 무관하다.” 이스마일은 단언한다. 그는 후티 반군 뿐만 아니라 정부를 지원하고 있는 사우디에도 비판적이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왔지만 우리는 이걸 전쟁범죄라고 부른다.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고 해서 이걸 감출 수는 없다. 나는 어느 쪽의 편도 아니다. 나는 사람들의 편이다.”
지금은 ‘무교’이지만 그도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이슬람은 ”평화로 돌아가자는 종교”다. ”남을 돕고,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극단주의자들은 무슬림이 아니다. 전 세계 곳곳에 수억명의 무슬림이 있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건 그의 잘못이다. 한 사람, 한 집단의 잘못으로 나머지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다.”
평범한 일상. 지금 가장 큰 꿈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뭔가 좋은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동료 예멘인들의 통역을 돕고 지원단체들의 일손을 거들고 있다. 한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한국을 떠나게 되더라도 좋은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한국은 나를 도와주지 않았어! 나를 받아주지 않았어!’ 이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화가 난 상태로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내 신청이 거절되더라도 나는 그걸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좋은 감정으로 한국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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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난민기구(UNHCR)의 집계 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집을 잃은 난민은 전 세계에서 6850만명에 달한다. 1년 사이 1620만명이 늘었다. 매일 평균 4만4400명이 새로 난민이 된다. 4000만명이 국내 실향민, 2540만명이 국경을 넘은 난민이다. 310만명은 난민신청자(asylum-seekers) 신분으로 난민 인정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은 가봉, 이스라엘, 일본, 파키스탄과 함께 난민에 인색한 국가로 꼽혔다. 난민인정률이 10%에 못 미친 나라들이다. 1994년 4월부터 2018년 5월까지 한국은 4만470명의 난민신청을 접수해 이 중 2만361명을 심사했다. 난민으로 인정받은 건 839명으로, 난민인정률은 4.1% 로 집계된다. 난민심사관은 전국에 38명이다.
한국은 1992년 12월 난민협약 에 가입했으며,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2013년 7월부터 자체 난민법을 시행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대한민국은 지난 5년간 난민지원 규모를 15배 확대했고, 작년에는 유엔난민기구 ‘2천만불 공여국 클럽’에 합류했다”고 강조했다. 국제적 역할과 책임을 강조했다.
″대한민국과 유엔은 늘 함께 해왔습니다. 대한민국은 1948년 정부수립으로부터 한국전쟁, 전후재건의 과정까지 유엔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은 1991년에 이르러서야 유엔 회원국이 되었지만 불과 한세대 동안 그 어떤 나라보다 빠르게 회원국으로서 역할과 책임을 높여왔습니다. (...)
유엔의 모든 분야에서 대한민국은 앞으로 더욱 기여를 높여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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