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고부갈등을 다룬 '순도 200% 리얼다큐'의 주인공 'B급 며느리'를 만났다

  • 허완
  • 입력 2018.01.12 09:18

“B급은 무슨 B급이야? F급이야. B급이나 되면 좋아.” 시어머니 조경숙씨가 분통 터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시부모한테 잘못했어, 뭐를 했어? …나는 당신도 야속해.” 시어머니가 남편과 아들을 앞에 두고 눈물로 하소연했다.

김진영씨는 시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F급 며느리’다. 시어머니 전화를 받지 않는다. 명절에도,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아예, 시댁에 가지 않는다. 참지 않는 며느리, 그게 김진영씨다.

‘200% 리얼’을 표방하는 다큐멘터리영화 《B급 며느리》는 며느리 김진영씨와 시어머니 조경숙씨의 갈등을 다뤘다. 두 고래 사이에 새우 등 터지는 남편 선호빈씨는 난생처음 심리상담을 받았다. 상담사는 말했단다. “아주~ 전형적인 고부 갈등입니다.” 선호빈씨는 이 영화의 감독이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감독의 모습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다. 부모님 집 대전과 아내-아이-자신이 사는 서울을 홀로 오가며 운전대에 쏟아내는 한숨만 한바가지다.

며느리 김진영씨는 어떤 사람일까. 김진영씨는 대학에 입학한 이듬해인 2002년 사법고시 1차에 합격한다. 사법고시 2차를 준비하던 중에 선호빈 감독을 만나 연애했다. 2008년 사법고시를 그만뒀다. 학원 강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의학전문대학원 시험을 준비하려던 그녀에게 사건이 발생했다.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떴다. “엄마한테 두들겨맞으며” 결혼했다. 2012년 5월 예쁜 남자아이 해준이가 태어났다. 육아를 하고 요리를 하는 그녀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집안을 활보하는 흥 많은 여성이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하는 아들을 자전거 뒷자리에 태워 페달을 밟는 모습은 명랑생활만화 주인공 같다. 손뜨개 인형을 잘 만들고,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운다.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고양이랑 노는 일상의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여긴다.

김진영씨는 왜 ‘F급 며느리’가 되어 다큐 《B급 며느리》의 주인공이 됐을까. 1월17일 개봉하는 《B급 며느리》의 주인공 김진영(36)씨와 남편 선호빈(37) 감독을 1월3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기하학적 무늬가 인상적인 초록색 패턴 원피스에 샛노란 조끼를 입은 김진영씨는 통통 튀는 목소리와 풍부한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선호빈 감독은, 그냥, 눈이 작고 평범한 한 마리 새우 같았다.

영화 초반부에 명랑한 목소리로 카메라를 보며 말한다. “시어머니랑 한바탕하는 바람에 명절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추석 때 안 갔어요. 완벽한 추석을 보냈죠.” 한바탕은 왜 한 건가.

김진영 추석 전인 8월에 남편 할아버지 제사가 있다. 그 제사 때 여러 사건이 벌어졌다. 예를 들면, 2살 어린 시동생과 이야기하면서 “호원아, 우리 이사하는 데 와서 같이 치킨 시켜 먹자”고 말했다. 시동생과는 남편과 연애할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다. 시고모들이 지적했다. 도련님이나 삼촌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도련님이라는 호칭은 사극에서 종이 주인집 아들 부를 때에나 들어본 말이다. 시어머니께서 그 외에 여러 불편한 말씀들을 하셔서 “어머님, 왜 저를 면박 주시냐. 불쾌하다”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너랑 나랑은 남이다. 안 보면 그만이다”라고 하셨다. 이전부터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래서 말씀드렸다. “그럼 그 말씀 지키시라. 어른이시니 꼭 지키셨으면 좋겠다.” 그러고는 안 간 거다.

시어머니와 한바탕

아내 김진영(사진왼쪽)씨와 어머니 사이의 실제 갈등을 2년간 찍어 다큐영화 로 만든 선호빈 감독(오른쪽). 1월3일 선호빈 감독과 김진영씨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김봉규 선임기자

막상 명절에 시댁에 안 가면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가.

김진영 전혀 불편하지 않다. 생각 안 하면 편하다. 나는 원래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다.

선호빈 말은 이렇게 하는데, 생각보다 맘 편하게 있지는 않더라.

김진영 남편이 잘못 알고 있다. 안 가서 불편한 게 아니라 내가 안 간 뒤 남편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긴다. 남편이 혼자 갔다가 스트레스 받으니까 집에 와서 그걸 표현한다. 괜히 고양이들을 구박한다거나. 그러면 알게 된다. ‘아 저 인간, 나한테 화났구나.’

선호빈 명절에 혼자 갔다가 가족들로부터 나이 서른다섯 먹는 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싸늘한 시선을 받았다.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할머니까지. 그때 깨달았다. 가족이 날 사랑하는 것은 조건부였구나. 관습을 거스르지 않았을 때만 사랑받을 수 있는 거구나. 정상 궤도에서 조금만 이탈해도 이렇게 불편한 존재가 되는구나.

시댁에 가면 뭐가 불편한가.

김진영 인간관계에서 으레 적용되는 규칙이 며느리에게만 유독 적용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결혼을 통해 가족의 구성원이 된 며느리는 다른 곳에서 온 손님이다. 사위는 손님인데 왜 며느리는 손님이 아닌가. 사람과 사람이 처음 만나면 서로 누구인지 관찰하고 거리를 좁혀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며느리에게는 그 과정이 모두 생략된다. 시어머니가 나를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고 가족에게 소개했다. 그래서 지금도 가면 ‘시험 준비는 잘하고 있냐’는 질문을 받는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옷 입는 것부터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온갖 충고와 간섭과 명령이 쏟아진다.

영화에서는 여러 가족 구성원들이 ‘며느리’에 대해 말한다. 감독은 어머니에게 카메라를 켜고 묻는다. “엄마, 며느리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며느리? 며느리는 우리 집 식구지.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아들하고 결혼했으니까 우리하고 가족 관계로 이루어진 거지.” 며느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어머니는 답을 이어간다. “제일 첫 번째, 며느리가 할 일은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는 거. 시아버지 생신. 1번은 시아버지야. 시어머니는 2번이야.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가 제일 일등이지.” 감독이 이유를 묻는다. “왜가 어딨어! 남자가 저기지. 그럼 너 조호빈이야? (조호빈으로 바꾸겠다는 감독에게) 바꾸지 마. 난 그런 거 원하지 않아.” 시어머니가 생각하는 며느리는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고 시부모, 시동생, 남편, 손자의 생일 등을 챙기는 사람이다. 감독의 고모는 말했다. “며느리는 손님이 아니야. 며느리는 최하야. 말단이야. 아주 낮은 자세로 해야 하는데….”

“며느리는 하인”

며느리가 시댁 출입을 거부한 2년 동안 시어머니 조경숙씨와 손자 해준이는 ‘비무장지대’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비무장지대는 선호빈 감독의 할머니댁이다.

고모가 ‘며느리는 하인이야’라고 말씀하시더라.

선호빈 그 이야기를 듣는데 속상했다. 고모도 여자이고 딸만 있는데, 딸들이 고모가 생각하는 며느리 역할을 잘 수행하는 걸 자랑스러워하신다.

며느리가 어떤 사람인지, 무얼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등 ‘사람’에 대한 궁금증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김진영 가족 관계의 비극이다. 모두가 ‘기능’과 ‘역할’로만 존재한다.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고 설거지를 하고 적당한 주기로 시부모에게 안부를 묻는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로 본다면, 그 기준에서 나는 언제나 미달이다. 며느리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정해진 역할에 대한 기대를 받는 아버지, 아들 모두 피해자이자 기준 미달이기 십상이다. 나는 한 가정을 꾸리고, 나름대로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다. 김진영 개인으로 평가받고 존중받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 누가 설거지 더 하고, 누가 음식 더 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

김진영씨가 폭발하는 장면이 있다. “1년 동안 집 안에서 애기 보면서 오빠랑 싸우고 시어머니랑 싸우면서 그렇게 쭈그러지면, 나는 더는 못 참아. 이 결혼생활에 뛰어들기 전에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나는 너무나 억울하고 지금 내 모습이 너무너무 비참해.” 폭발한 계기가 뭔가.

김진영 갈등이 매번 같은 양식으로 반복된다. 김치통을 매개로, 만두를 매개로, 아이 옷을 매개로…. 그날은 서로 오가지 않던 중에 우리 집에서 시아버님 생신상을 차려드리고 싶어서 말씀드리고, 시부모님이 서울로 오시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죄송한 동시에 나는 갑작스러운 상으로 매우 슬펐다. 남편이 상황을 말씀하는 전화 너머로 ‘그럼 해준이 선물은 어떡해?’라는 말씀이 들렸다. 나를 걱정하고 할아버지를 애도하는 말은 없었다. 임계점을 넘어선 것 같았다. 항상 시부모님을 만나려고 하면 같은 패턴으로 갈등이 반복되는데, 무슨 개미지옥에 빠진 것 같았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선호빈 그날 아내의 폭발로 촬영감독과 연락이 안 됐다. 무서웠나보다. (웃음) 그 뒤 가족 모두 ‘냉각기’를 가졌다. 이전에 부모님은 ‘안 만나’ 하고서는 2주 만에 서울 집으로 막 쳐들어왔다. 또 ‘연락하지 말자’고 하고선 2주를 못 참고 전화기에 불이 난다. 각자가 냉각기를 가지면서 아내는 일상을 회복했다.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

참지 않고 터트리는 아내가 힘들지 않나.

선호빈 힘들지만 속 시원하다. 처음에는 지혜롭게 회피하길 원했다. 가족은 그래야 하고, 그게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들이대고, 갈등을 밖으로 꺼내니까 ‘벽’이라고 생각한 부모님이 변하셨다. 지금은 아내를 존경한다. 나는 평생 가도 아내처럼은 못할 것 같다.

김진영씨는 냉각기를 가진 뒤, 누가 요구하지 않을 때 “제 발로” 시댁으로 걸어 들어갔다. 격렬했던 2년간의 ‘갈등’ 국면이 지나고, 지금은 시부모님이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계시”는 덕에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김진영씨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설명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등은 있는데 갈등의 원인을 찾기 힘들었다.

선호빈 원래 이 다큐가 가부장제에 매우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영화였다. 영화를 찍으면서 처음으로 어머니 아버지와 많이 이야기하게 됐다. 그러면서 부모님을 이해하게 된 측면이 있다. 이게 워낙 보편적 주제이다보니 사람들이 김치통, 냉장고 이런 단어만 나와도 각자의 사례들을 대입하며 빈 이야기를 메우면서 본다는 걸 알게 됐다. 후반 편집 과정에서 ‘우리 엄마가 특이해서’ ‘내 아내가 별나서’ 같은 특수성보다는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인 일임을 전달하는 데 신경 썼다.

어떤 고부 관계를 꿈꾸나.

김진영 많은 며느리가 말하는 대로, 우리 시부모님도 좋은 분들이다. 그런데 나를 어떤 존재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해야 하는 며느리로만 보기 때문에 가까워질 수 없는 것 같다. 서로 관찰하고 호감을 주고받고 부정적인 면도 받아들이는 관계가 되면, 우정이 생기지 않을까. 모든 가족 관계에는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최근에 해준이가 “유치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우울해”라고 말했다. “무슨 일이었는데?” 물어봤더니 “유치원 생활인데, 엄마가 알아야 해?”라고 하더라. 그때 나는 흡족했다. 아, 해준이가 이제 선긋기도 하는구나. 컸구나, 잘 키웠다. 뭐 그런 생각을 했다. 고부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적절한 거리감이 필요하다.

가부장제에 대한 가벼운 발차기

김진영씨는 영화에서 고부 갈등의 핵심을 찌른다. “이게 나와 시어머니와의 일 같지만, 결국은 그 집에서 손발 멀쩡히 움직이는 사람이 넷인데 나랑 어머니 둘이서 ‘니가 했네, 내가 했네’ 싸우고 있다는 게 정말 이상한 일이거든.” 고부 갈등은 착한 며느리와 착한 시어머니 사이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문제가 아니다. 나쁜 며느리와 나쁜 시어머니 때문도 아니다. 대부분의 가사노동을 여성에게 미루고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남녀 역할을 구분하는 가부장제의 문제다. 《B급 며느리》는 가부장제에 대한 가벼운 ‘발차기’다. 이 발차기는 앞으로 점점 거세질 것이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사회 #영화 #고부갈등 #며느리 #결혼 #여성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