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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캔 스피크...

작년 가을 50년 만에 고향에 다녀왔다. 아흔 중반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고향 선산으로 가실 마음을 정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안 갔을지 모른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15년쯤 지난 뒤 할아버지 산소를 고향 선산에 썼다. 그 침묵에 가득 찬 묘비 제막식을 마지막으로 나는 고향에도 선산에도 발을 딛지 않았다.

  • 조은
  • 입력 2017.12.08 09:33
  • 수정 2017.12.08 09:35

작년 가을 50년 만에 고향에 다녀왔다. 아흔 중반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고향 선산으로 가실 마음을 정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안 갔을지 모른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15년쯤 지난 뒤 할아버지 산소를 고향 선산에 썼다. 그 침묵에 가득 찬 묘비 제막식을 마지막으로 나는 고향에도 선산에도 발을 딛지 않았다. 어머니 모실 곳을 둘러본 후 만날 사람이 별로 없었으므로 다섯 시간 만에 50년 만의 고향 방문을 마쳤다.

돌아와서 그동안 덮어두고 떠들어보지 않은 고향에 대한 어떤 기록을 찾아 읽었다. 6·25 때 좌익에 의해 피살된 민간인이 전국적으로 5만9964명이고 그중 전남 지역이 4만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하며 그 절반 가까이가 내 고향에서 피살되었다는 기록이다. 1952년에 나온 그 기록은 그 한 군에서 좌익에 의해 피살된 민간인이 2만1225명이며 경찰의 손에 죽은 사람도 1만여명 가까이 될 것으로 추계했다. 이 기록은 군경보다는 빨치산과 바닥 좌익이 더 많은 학살을 자행했다는 기록으로 자주 인용된다. 당시 군민이 12만명이었다고 하니 4분의 1이 희생된 곳이다. 인구비로 본다면 제주4·3보다 희생이 크다. 그런 곳이 도대체 어디냐고? 그런데 왜 조명되지 않았느냐고? 겨우 "좌우 양쪽이 서로 죽여서..." 하면서 말끝을 흐리는 고향 사람들 얼굴을 떠올린다.

전남 영광이 내 고향이다. 거기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출생했고 대대로 윗대가 거기서 살았다. 제주4·3, 거창 양민 학살, 여순사건 등등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 문제가 논의될 때도 영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크게 조명되지 못했다. 연구자들도 그 내막이 복잡해서인지 더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선량한 국민, 즉 죄 없는 양민이 학살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상적 순수성을 전제한, 좌익이라는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양민'이라는 말 대신 국제 규범을 따른 '민간인' 개념을 한국전쟁 전후 학살 연구에 공론화시킨 사회학자 김동춘 교수는 한국전쟁기에 국군, 경찰, 우익 세력에 의한 학살 규모가 인민군 혹은 지방 좌익에 의한 학살 규모보다 훨씬 컸다는 '불편한 진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빨갱이 담론과 종북 논란이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긴 침묵에 빠뜨렸음을 분명히 한다. 종북 담론과 좌빨 담론은 전쟁 전후에 자행된 학살의 진실만 침몰시킨 것이 아니다. 작금의 수구적 지배세력 유지와 민주화 억압 논리의 원형에 바로 닿아 있다.

고향 선산을 다녀온 지 6개월 뒤 생각지 않게 올봄에 다시 고향에 가게 되었다. 역사학과 사회학이 전공인 여교수들 다섯 명과 함께였다. 동북아 평화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 여성학자들이다. 적극적으로 영광행을 주장한 분은 식민지 근대를 연구하는 재일동포 학자 송연옥 교수다. 타이완(대만)에서 항일 유적지 답사팀 일행으로 같은 방을 쓰게 되면서 서로 고향을 묻게 되었다. 근우회 연구를 하던 중 작가 박화성 때문에 영광에 관심이 생겼는데 당시 영광이 어떤 곳이어서 광주의 교사직을 내놓고 영광으로 갔는지 궁금하다면서 다음번 서울 올 때 영광에 한번 가자고 했다. 그 학교에는 박화성을 문단에 소개한 월북 시조시인 조운이 있었고 돌아가신 지 15년 만에 산소를 쓰게 된 할아버지가 그 영광 학원장이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일행의 영광행 여정이 번개처럼 잡혔다.

여정의 첫날 조운 선생 생가로 갔다. 조운 선생 생가는 지역 출신 장진기 시인이 경매에 떠내려가는 것을 구입해 놓아 그나마 소실은 면했다. 생가 앞 시비에는 당연히 그의 시집 첫 장에 나오는 '석류'가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석류라는 시는 이렇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알알이 붉은 뜻을'이라는 시구가 늘 문제가 되었다더니.

시인은 집 주변 어디서나 보이는 꽃들에 시상을 입혔는지 파초, 도라지, 채송화, 오랑캐꽃, 무꽃, 옥잠화, 야국 등 여느 시골집 마당에서 볼 수 있는 꽃 시가 많다. 생가 마당을 둘러보다가 장 시인에게 석류나무가 있지 않았는지 물었다. 저 잡풀 넝쿨이 우거진 그 어디쯤에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 우거진 잡풀 더미에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데 "누군가 베어버린 거죠"라고 장 시인이 한마디 툭 던졌다. 시인의 시제가 된 석류나무조차 "알알이 붉은 뜻" 때문에 베어진 모양이었다. 1988년 정지용, 백석과 함께 해금된 월북 문인 120명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 조운의 시비는 고향에서 공식적으로 설 자리를 못 찾고 생가 터 안에 겨우 모습을 감춰 서 있다. 시비 제막이 몇 차례 시도되었지만 윗대가 좌익에게 희생되었다는 우익 쪽 후손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닥쳐 무산되었다.

조운 생가 복원 예산은 지난 수년간 번번이 군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안내해준 분이 올해는 조운 생가 복원사업을 위한 예산을 확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면서 서울에 있는 그분이 좀 나서주면 좋을 텐데라고 혼잣말을 했다. 무심하게 듣고 잊고 있었는데 가을이 시작되기 얼마 전 올해도 군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집안 어른 중 한 분이 좌익에게 당했다는 군의회 의원이 완강하게 반대한 모양이었다. 이쯤에서 멈출까 주저하다가 내친김에 더 나가기로 한다.

몇 주 전 나두종 '조운기념사업회' 회장이 조운 선생 종손녀를 만나러 함께 가자는 연락을 해왔다. 만나주실지 의구심을 표했더니 전에는 전화하면 툭 끊어 버렸는데 요즘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약속을 잡을 수만 있다면 약속 장소는 이화장 근처여도 좋고 이화장도 좋지요, 얼마든지 그분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맞출 수 있어요, 가능하면 연내에 뵈면 좋겠어요,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전화를 끊었다. 영광군의회가 예산을 통과하기 쉽게 한 말씀 보태주었으면 한 '그분'은 이화장의 안주인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부가 된 이화장 안주인에게 조운 선생은 종조부(작은할아버지)다. 고향에서 작은할아버지는 월북 시인으로 시비도 세워지지 못하고 그 종손녀는 보수 우익 진영을 표상하는 이화장의 안주인이라는 사실은 떠들 일도 덮을 일도 아닌 우리 분단 현실의 비극적이고 상징적인 한 지점일 뿐이다. 우리 일상에서 한국전쟁과 분단의 그림자는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너무 깊고 길다.

끝낼 말을 찾고 있는데 북한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성공적으로 발사했다는 뉴스가 언론을 도배했다. 우리는 최첨단 무기(명)까지 일상어로 거듭 추가하고 있다. 동란으로 혼자된 노모와 피난민으로 북적거렸던 부산 출신 남편, 1950년 6월25일이 기억의 출발점인 나, 우리 세 식구는 저녁 식탁에서 연거푸 되풀이되는 화성-15형 발사와 미국과 우리 쪽의 발 빠른 대응 뉴스 장면을 마치 '스타워즈' 구경하듯 바라보면서 식사를 한다. 이 천연스러운 일상을 우리는 어떤 언어로 어디에 대고 말할 수 있을까. '위 캔 스피크...'로 제목을 붙여본다.

* 이 글은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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