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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군가의 전부

아이가 자라 또 다른 아이를 낳고 키워내는 과정이 반복되는 건 받았던 사랑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경험을 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어쩌면 어른이 된 우리에게도 이렇게 옴팡 사랑받은 시절이 있었다는 걸 잊지 않게 함이 아닐까.

매 순간 이토록 사랑받는 시기가 또 있을까.

나는 허리춤에도 닿지 않는 자그마한 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차 안에 있던 모두는 잘 알아듣기 어려운 어눌한 말에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잘하네, 잘하네, 연신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상의 빛을 본지 이제 갓 600일이 지난 남편의 조카는 사람들의 반응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할머니의 말을 두어 번 더 따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길은 거리 곳곳을 살피느라 쉴 틈이 없었다.

내겐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존재할 뿐인 이 볼품없는 거리가 아이에겐 꽤 의미 있게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속도를 높이던 차가 건널목에 멈춰 서자 이번엔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발소 표시등을 넋 놓고 바라봤다. 커다란 눈망울엔 푸른색과 붉은색이 번갈아가며 반짝였고, 그 평범한 걸 정성스레 바라보는 눈빛에 오늘은 차가 밀리는 게 고마울 정도였다. 지난 한 달간, 이날이 저 날 같고 저 날이 이날 같은 시간을 보낸 나완 달리 아이는 매 순간이 성장이고 성취였다.

"오늘은 문에 대고 똑똑, 노크를 하더라니까."

비슷한 시기에 손주를 보게 된 우리 엄마도 아이 하나로 꽉 찬 세상에 살고 있다. 내 조카는 남편의 조카가 태어나고 100일 후쯤 태어났다. 남편의 조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무렵 뒤집기를 성공했고 단어가 아닌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한 요즘, 옹알이를 시작했다. 때론 새 생명이 주는 뭉클한 순간을 남편보다 매번 한 박자씩 늦게 복습하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동시에 같은 감정을 느끼는 유일한 순간이 있는데, 어찌할 수 없는 물리적 거리로 인해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영상으로만 대면해야 할 때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 아쉬움에 같은 영상을 보고 또 보곤 한다.

아이들이라면 모두 비슷하게 터득할, 너무도 당연한 것들조차 조카라는 이유로 몇 배 더 특별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누군가가 듣는다면 '에이~' 싶을 만큼 팔불출이겠지만,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그 고운 마음을 누가 지적할 수 있을까. 분명 누구나가 느꼈을 테고, 언제고 느끼게 될 감정일 텐데. 잘 먹고 잘 자고 잘 노는 것만으로도 놀랍고 감격스러운 날들이다.

가족들과 긴 연휴를 보내고 다시 돌아온 서울. 보들보들한 티슈를 돌돌 말아 정성스레 건네던 조카의 손이, 말랑했던 두 볼의 감촉이 생생히 떠오른다. 따라 하기도 어려울 신기한 자세로 엎드려 좀 전에 본 애니메이션을 생전 처음 보듯, 커다란 눈으로 바라보던 오후도 생각난다. 매 순간이 새날 같았던 그 공간. 오늘도 그 공간에서 들려올 따끈한 뉴스를 기다린다. 점심시간이 되면 놀이터를 활보하는 조카의 모습이 영상 안에 폭 담겨올 것이고, 엄마가 조카를 꼭 안고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을 지어 보일 때 나에게도 늘 저렇게 웃어주셨겠구나, 생각할 것이다.

아이가 자라 또 다른 아이를 낳고 키워내는 과정이 반복되는 건 받았던 사랑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경험을 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어쩌면 어른이 된 우리에게도 이렇게 옴팡 사랑받은 시절이 있었다는 걸 잊지 않게 함이 아닐까.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주위의 빛깔을 반짝반짝하게 바꿔놓았던 그 시절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모두의 코끝을 시리게 만들었던 어느 드라마 속 대사가 마음 언저리를 맴돈다.

'잊지 말자. 나는 어머니의 자부심이다. 모자라고 부족한 자식이 아니다.'

'잊지 말자. 나는 어머니의 자부심이다. 모자라고 부족한 자식이 아니다.'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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