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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 여성을 '진짜 여성성'으로부터 배제하려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

  • 김도훈
  • 입력 2017.04.14 06:31
  • 수정 2017.11.13 09:31

진보 신문 몇 곳에서 시스젠더 여성성이 진짜 여성성이라고 선언하는 저명한 페미니스트들사설을 실었다. ‘진짜 여성성’을 선언하는 언어가 수 세기 전부터 사용되어온, 인종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인 압제와 비인간화의 전략임을 그들 모두 간과했다. 한 가지, 한 경험, 한 인간의 삶을 ‘진짜’라고 규정하고 나머지 전부를 해칠 필요가 있는지, 나는 궁금해진다.

AMC의 쇼 ‘매드 맨 Mad Men’의 배경이 된, 광고의 전성기였던 50년대 말과 60년대 초에 ‘진짜 여성’이라는 개념이 주류에 들어왔다. 진짜 여성은 제대로 된 팬티 스타킹을 입고, 진짜 여성은 제대로 된 요리를 하고, 진짜 여성의 몸매는 이러이러하다. 남성 광고 기획자들은 여성성의 이상적인 버전을 만들어 자본주의에 맞게 고친 다음 신문, 라디오, TV 광고로 쏟아냈다. 가부장제가 초대형 선전 캠페인으로 변했다. 그 무렵의 광고를 연구하는 사람은 광고의 ‘진짜 여성’이 결혼했고, 이성애자고, 시스젠더이고… 백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할래야 할 수가 없다.

당시의 ‘진짜 여성’은 현실의 여성이라면 거의 맞출 수 없는, 불가능한 기대치들을 갖춘 여성들이었다. 여성성을 달성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은 자본주의를 번성하게 했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찾아 언제나 ‘타인들’의 신체에 대한 체계적 억압 시스템을 조종해왔다.

그렇다면 ‘진짜 여성’이 되어 정말 좋은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 한 여성은 진짜고 다른 여성은 가짜라고 선언할 때, 그 말의 진짜 의미는 ‘진짜’ 여성은 우월하며 ‘가짜’인 여성들이 추구해야 할 목표라는 뜻이다. 이는 모든 여성들 사이의 실제 차이를 무시하는 거짓 구분이다.

트랜스젠더 여성인 나의 여성성은 언제나 도마에 오른다. 신문 뿐 아니라 코미디에서, 내 정부에 의해, 내 선출직 공무원에 의해, 심지어 내 가족에 의해 의심받는다. 나는 왜 그렇게 난리인지 잘 모르겠다. 내 여성성은 내 일부에 불과하다. 나는 부모이고, 작가이며,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고 툭하면 운다. 책 페이지의 느낌이 좋아서 문고판을 좋아한다. 트위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다. 올 여름엔 하이킹 가고 싶다. 내 연애 생활은 다른 모든 미혼자들과 마찬가지로 형편없다. 여성이라는 것은 나의 정체성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나는 내가 시스젠더 여성과 똑같지 않다는 걸 기꺼이 인정한다. 그들이 무엇을 겪었는지 내가 정확히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유색인종으로 사는 게 어떤지, 가톨릭 신자로 자라지 않았다는 게 어떤지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시스 여성들이 내 삶을 모른다는 것도 나는 안다. 그들은 내가 어렸을 때 또래 성폭력을 겪은 생존자라는 것도, 10살 때 학교 화장실에서 강간 위협을 받았다는 것도 모른다. 나는 내가 여성 같이 느낀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여성이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를 정의하는 단 하나의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G.I. 조 장난감을 좋아했지만, 가지고 놀 때는 나를 여성 이름으로 불렀다. 그게 더 잘 맞는 것 같아서였다.

나는 역할을 연기하며 내 인생의 34년을 보냈다. 타인들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에 계속 나를 맞춰갔다. 그저 안전하기 위해서였다. 몇 번 내가 실수로 가면 뒤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는 처벌을 받았다. 여성스럽다고 생각되는 점을 계속 괴롭히던 아이가 나중엔 강간하겠다고 위협했다. 여자친구에게 내가 여성 옷을 입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나중에 내 라커가 부서졌고 내 물건들이 망가져 있었다. 배우자가 될 사람에게 여성 옷을 입는 걸 좋아한다고 했더니 다시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했다. 나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해서 15년을 함께 했다.

성별 불쾌감[주: 자신이 다른 성으로 잘못 태어났다고 느끼는 상태]에서 자유로워지기 전까지 그 부담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성전환하고 내 내면의 자신과 좀더 가까운 사람으로 살고 있는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성별 불쾌감이 얼마나 나를 지배했는지 깨닫고 공포에 질린다.

나는 성전환 전에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진심이다. 법을 어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알코올 등의 남용 문제는 없었고, 마약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평생 성적 파트너는 단 한 명뿐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나는 모든 걸 다 제대로 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공허했다. 겉모습 이상을 보았다면 나는 게으르고 부주의하게 보였을 것이다. 사실 그랬다.

성별 불쾌감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한데, 나는 그게 문제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트랜스 여성들을 ‘진짜’ 여성성에서 배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성별 불쾌감을 감정과 동일시하려 하지만, 그게 정확한 걸까? 나는 성별 불쾌감은 감정을 ‘유발’하지만, 그 자체로 반드시 감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 성별 불쾌감은 머릿속에서 벌떼가 쉬지않고 잉잉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상황이 겉보기와는 다른 것 같다, 는 기분을 아는가? 그것과 조금 비슷하지만, 그런 게 언제나 느껴지고 강도가 세졌다 약해졌다 한다.

성별 불쾌감이 내게 유발한 감정들은 역겨움, 수치, 그리고 주로 죄책감이었다. 내 몸이 이런 기본적인 것에서 나를 저버렸다는 수치. 나는 멍청하거나 망상을 품지는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가 이렇게 태어나서는 안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했다. 내 몸의 감옥에서 벗어나,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몽상하고 난 뒤에는 죄책감을 느꼈다. “남자애들은 여자애가 되는 꿈을 꿔선 안돼, 이 역겨운 놈아.” 역겨움은 늘 느꼈다. 내 몸의 털, 점점 벗어지는 내 앞머리, 내 납작한 가슴, 내 키, 내 페니스가 역겨웠다. 나는 페니스가 달린 여성이었다. 이 말이 역겹게 들리는가? 정말 그렇게 역겹게 느꼈다.

하지만 전환을 하니 도움이 되었다.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도움이 되었다. 플라시보 효과일지도 모르지만, 에스트로겐 호르몬이 내 뇌를 굴리기 시작하니 개인적 생산성이 훨씬 높아졌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다. 하루 전체를 온전히 살게 되니 더욱 유용한 인간이 되었다. 성별 불쾌감이 일으키는 감정들과 매일같이 싸우며 들였던 노력을 이제 다른 일에 돌릴 수 있었다. 내 젠더에 대한 모든 생각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성전환이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성전환에 따른 문제들도 있었다. 이제 남성들은 내 말을 끊고, 내 권위나 자격을 믿지 않는다. 거리에서 내게 소리를 지르고 바에서 내 몸을 더듬는다. 평범한 고객 서비스 중에 갑자기 상대 남성이 내가 ‘스모키 화장을 한 눈으로 이리 와보라는 눈길을 보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여성혐오는 누가 ‘진짜’ 여성인지 아닌지 상관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 같은 트랜스 여성들이 강간과 가정 내 폭력의 피해자가 될 확률은 시스 여성들과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진짜’ 여성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시스 여성들이 받을 수 있는 지원을 우리는 받지 못한다.

트랜스 여성은 ‘진짜’ 여성이 아니라는 걸 자신의 개인적 임무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진심으로 궁금하다. 내가 이해 못하는 걸까. 그들은 내가 정체성을 숨겼을 때 남성의 특권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커밍아웃하지 않은 LGB들은 이성애자 특권을 누리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 해도, 그러면 그들은 커밍아웃 후에도 진짜 게이가 아닌 걸까? 난 게이가 아니다. 나는 타인의 자기 자신의 그토록 필수적인 면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떤 여성이 ‘진짜’ 여성이고 다른 여성들은 ‘진짜’가 아니라는 게 일부 사람들에겐 너무나 중요한 이유를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가 보다.

허핑턴포스트US의 What People Who Want To Exclude Trans Women From ‘Real’ Womanhood Should Know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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