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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때문에'가 착한 영화라고?

이 영화의 선의는 굉장히 한국적이면서도 위험한 종류이다. 한국적인 건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한 타인의 오지랖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이고, 위험한 건 미리 정답을 주고 여기에 대한 의심과 질문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판타지지만 이 익숙한 자칭 '선의'는 아니다. 이 영화의 뽀샤시한 예쁨에도 불구하고 러닝타임 내내 미심쩍은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 듀나
  • 입력 2017.01.10 10:28
  • 수정 2018.01.11 14:12

〈광속인간 샘〉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던 〈퀀텀 리프〉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물리학자 샘 베켓은 시간여행 실험을 하다가 과거에 사는 사람들의 몸속에 기생하는 신세가 된다. 그가 홀로그램으로 나타나는 친구 알 칼라비치와 슈퍼컴퓨터 지기의 도움을 받아 숙주의 인생을 더 나은 것으로 바꾸면 그는 다음 숙주의 몸으로 들어간다.

주지홍 감독의 〈사랑하기 때문에〉도 거의 같은 설정을 취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차태현이 연기하는 작곡가 이형은 교통사고를 당한 뒤 샘이 그랬던 것처럼 기억을 잃고 다른 사람의 몸에 갇힌다. 에스에프(SF)와 시간여행 설정은 사라졌지만, 이형이 숙주의 몸을 떠나려면 그들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설정은 같다.

그런데 더 나은 삶이란 무엇일까? 〈퀀텀 리프〉에서는 이게 분명하다. 현대 시간대에 있는 알과 지기가 샘에게 어떤 위기가 닥칠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샘의 목표는 그 주어진 위기를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에서 이형에겐 그런 정보통이 없다. 이형은 그 와중에도 최선을 다한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주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몸을 빠져나갈 수 있는 규칙을 알아내어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려 하는 것이다. 그는 그 규칙을 만들어낸 어떤 존재가 선하다고 믿는다.

그 존재는 바로 이 영화의 작가들이다. 나 역시 영화를 보다 보니 그 작가들이 인간들 사이의 사랑을 믿으며 근본적으로 선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만든 규칙이 옳은지, 그 선한 의도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긴 하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이혼을 앞둔 부부가 있다. 남편의 몸속에 들어간 이형에게 그 집 아이가 말한 것처럼, 이혼은 늘 싸우는 부부에게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모르는 사연이 있어서 그 사연을 해결하면 다시 관계를 되돌릴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단 한 번도 이들의 과거를 깊이 파지 않는다. 이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형을 통해 둘 사이의 감상적인 감정만을 자극할 뿐이다. 부부는 결국 이혼을 포기하지만 그게 올바른 선택이란 걸 어떻게 아는가.

이형이 첫번째로 들어간 고등학생 이야기는 조금 더 심각하다. 1등을 놓친 적 없는 그 학생은 지금 임신한 상태다. 이형은 당연히 낙태를 선택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작가들은 그 상식적인 선택을 거부하고 남자친구의 사랑과 키스, 그리고 대책없는 낙천주의를 선택하게 한다. 그 낙천주의가 믿을만한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판단 근거를 주지 않는다. 영화가 끝날 무렵, 우린 그 학생이 아기를 낳았고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가 아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상황에 빠진 여자들이 당연히 마주치게 되는 역경을 그 학생이 어떻게 뚫었는지에 대해서는 티끌만한 정보도 주지 않는다.

이 영화의 선의는 굉장히 한국적이면서도 위험한 종류이다. 한국적인 건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한 타인의 오지랖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이고, 위험한 건 미리 정답을 주고 여기에 대한 의심과 질문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판타지지만 이 익숙한 자칭 '선의'는 아니다. 이 영화의 뽀샤시한 예쁨에도 불구하고 러닝타임 내내 미심쩍은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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