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최고 한국 영화를 뽑는 대신 그냥 올해의 한국 영화를 뽑는다면? 나 같으면 두 편을 뽑겠다. 이사랑의 '리얼'과 박훈정의 '브이아이피'다. 종류는 다르지만 두 영화 모두 민망할 정도로 끔찍한 영화이며 지금 충무로의 영화쟁이들이 무슨 영화를 의도적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성 중심 조폭 영화, 그러니까 여성판 '신세계'에 대한 기대는 좀 어이가 없다. 물론 모든 장르 영화는 어느 정도 허구의 세계를 다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현실과 접점이 닿아 있는 부분은 있어야 한다. 한국 조폭 세계는 언제나 남자들의 폭력과 사고방식에 의해 지배되는 곳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 세계에서 여혐을 빼면 솔직히 남는 게 없다.
'아이 캔 스피크'가 여성의 경험과 연대가 큰 의미를 차지하는 영화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 순서는 당연하기 짝이 없다. 물론 감독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하나의 영화를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그 이야기가 어떤 사람들을 만나 어느 과정을 통해 완성되었는지도 그만큼이나 중요하지 않을까?
불쾌한 것은 이 영화에 나오는 얼마 되지 않는 여자들 중 이름이 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며, 이들 대부분은 시체 역이고 살아 숨쉬는 사람들은 곧 스크린에서 살해당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운이 좋아야 폭행 피해자가 되는 정도. 여기서 가장 큰 비중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소녀'라고 불리는 첫 희생자인데, 당연히 캐릭터는 없고 시작부터 관음의 대상, 그러니까 살인자들의 눈요기이며 결국 긴 강간, 고문, 살인 장면으로 끝이 난다. 〈브이아이피〉와 관련된 기사의 댓글 중 "나중에 엑기스나 다운받아 봐야지"라는 게 있었는데, 아마 그 댓글을 쓴 사람들이 생각하는 '엑기스'가 바로 이런 것일 거다.
결국 역사적 상상력의 문제이다. 기록의 뼈대 위에 어떻게 믿음직하고 생생한 허구를 덧씌우는가. 〈군함도〉는 너무 나갔고 〈택시운전사〉는 지나치게 무난한 길을 택했으며 〈박열〉은 그런 것을 꺼낼 여유도 없이 실화에 끌려다닌다. 결국 자신이 다루는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통제한 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던 셈이다. 이 정도면 날 잡아 역사적 상상력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가 된 게 아닐까.
완벽한 성비의 균형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향해 열린 길이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발전의 과정은 그 결과물보다 더 즐겁다. 나라 밖의 변화를 즐기다 보니 내가 '알탕 영화'들을 무한 생산하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된 여성 캐릭터가 너무 적어서 그냥 무난한 명예 남성 역으로 나와 비중을 챙겨도 다들 눈물을 흘리며 감지덕지하며 고마워하는 상황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나 되어야 이 어이없는 시차가 극복될 수 있을까?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는 우리가 이상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끄럽고 장황한 증거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오로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자신의 악담 능력의 한계를 실험해보고 싶은 평론가들에게나 의미가 있다. 완성된 영화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조악하고 지루해 빠졌는데 150분이나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멀티플렉스관 절반을 점유하고 있고 사람들은 형편없는 입소문에도 그 영화를 보러 가고 돈도 꽤 벌어들인다. 어떻게 이런 영화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결국 〈원더우먼〉이 나왔는데, 결과는 단순 명쾌하면서도 놀랍다. 선정성이 완전히 없어졌다고는 말을 할 수 없다.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잘생긴 배우의 몸은 그 자체로 선정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캐릭터를 보여주면서 그 선정성을 과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익숙한 옷을 입은 원더우먼은 끊임없이 달리고 점프하고 탱크를 박살내고 총알을 막고 올가미를 던지고 적군을 두들겨 패며 카메라는 육체 자체보다 그 육체를 통한 액션에 집중한다. 액션이 나오지 않을 때는 최대한 복장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원더우먼 복장은 늘 액션과 연결된다.
지금 영화관은 거꾸로 가는 것 같다. 최상의 상영 조건보다는 관리와 운영의 편의가 더 중요해졌고 모든 게 점점 유원지스러워지고 있다. 심지어 요새는 뻔뻔스럽게 떡볶이를 파는 체인점까지 생겼는데, 정말로 그걸 사들고 오는 관객이 내 옆자리에 앉을까봐 벌써부터 두렵다. 영화제를 가는 것도 이전만큼 즐겁지 않은데, 상영관의 전반적인 질적 하락 속에서 영화에 맞는 상영관을 선택하는 것은 거의 복권 당첨에 가깝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왜 저 남자는 처음 만난 여자에게 반말을 하며 으스대지? 왜 저 여자는 별로 나이가 많지도 않은 저 남자를 아저씨라고 부르지?"라는 질문이 먼저 떠오르는 건 심각한 문제다. 어떻게 되었는지 알 것 같다. 이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고 각본을 쓰고 감독한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이게 문제가 된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텔레비전만 틀어도 툭하면 처음 보는 여자들에게 반말을 해대는 무례한 남자들과 그들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맥 빠진 여자들이 부글거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정상이 되는 건 아니다. 비정상인 언어가 많을 뿐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애플렉은 2010년 같이 일했던 동료 여성영화인들로부터 성추행을 이유로 고소당했다. 이 사건은 합의로 종결되긴 했지만 여전히 불쾌하며 이 사건을 알게 된 뒤로는 자연인 애플렉의 얼굴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보기는 어렵다. 허구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상 매체에서 매력적이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한 점은 우리가 영화나 시리즈에서 매료되고 감정이입한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캐릭터와 분리된 본체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몰입한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에 무시할 수 없는 결함이 있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존이 요새 우디 앨런 영화 속 주인공이었다면 끝까지 자기연민과 자기기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매기스 플랜〉에서 그는 이 악순환에서 빠져나갈 기회와 마주친다. 우디 앨런 영화와 〈매기스 플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건 이 영화가 존에게 감정이입할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는 여성 작가/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존이 자신에게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 연구 결과를 존에게 통보한다. 그리고 존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이 영화의 선의는 굉장히 한국적이면서도 위험한 종류이다. 한국적인 건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한 타인의 오지랖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이고, 위험한 건 미리 정답을 주고 여기에 대한 의심과 질문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판타지지만 이 익숙한 자칭 '선의'는 아니다. 이 영화의 뽀샤시한 예쁨에도 불구하고 러닝타임 내내 미심쩍은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연말이 되면 한국갤럽에서는 올해를 빛낸 영화배우를 발표한다. 여자는 9위에 오른 전지현 한명이다. 이 리스트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정답이다. 기사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좀 진지하게 반응하려 해봤다. 〈비밀은 없다〉 〈덕혜옹주〉의 손예진이 빠져 있는 2016년 배우 리스트가 과연 정상인가? 〈아가씨〉의 배우 중 유일하게 순위에 오른 사람이 하정우라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9위에 전지현이 오른 걸 보고 조용히 포기해버렸다. 전지현은 지금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맹활약하고 있긴 하지만 올해는 영화 작품이 없다.
경제적 빈곤, 장래의 불안함, 자신만의 공간의 소중함, 준장거리 연애의 난감함, 사회적 압력은 동성애자들만의 주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침대에서 상대방의 요구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지수의 태도는 이성애자들도 배워 마땅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담〉은 이성애 연애 이야기로 전환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연애담〉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이 터진 것은 이 영화가 오로지 여성 동성애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딱 맞아떨어지는 내용과 디테일을 잔뜩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기술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이고 언젠가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직사각형의 한계를 초월할 것이다. 그건 바꿀 수 없는 미래이다. 하지만 기술과 그 신기함에 의지하며 관객들에게 호소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 같다. 그리고 그건 할리우드 밖에서 영화를 만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희망적인 일이다. 대자본 스펙터클이 일상화되었다면 다른 일상이 그 스펙터클과 일대일 대결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이런 영화들에 대한 비판에서 중요한 점은 이들이 비판하고 있는 것이 개별영화가 아닌 이런 부류 영화의 유행과 흐름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알탕 영화들은 대부분 여성혐오적이지만 그와 별도로 남자들만 나오는 영화를 하나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이런 영화들이 비정상적으로 많고 그 비정상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풍토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이런 영화들 중 상당수는 핑계만 생기면 조선 땅을 뜨거나 뜨려고 발버둥치고 주인공들은 대부분 탈주를 꿈꾸고 그러는 게 가능한 사람들이다. 상하이, 만주, 도쿄, 블라디보스톡, 하와이. 목적지는 어디라도 상관없다. 이러니 이 영화들이 내민 진지한 주제보다 '아가씨'의 숙희가 속으로 내뱉는 독백이 가장 솔직해보이고 또 마음을 울리는 것이다. "한 밑천 잡아서 조선 땅 뜬다. 조금만 참자. 이 시골뜨기 종년들." 하긴 어찌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월호 영화들의 존재는 오로지 자연스러운 망각만이 애도의 유통기한을 설정하며 어떤 때는 그런 망각마저도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극을 일으킨 원인이 아직도 남아 있고 제대로 된 해결책이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비극과 그 원인을 계속 상기시키는 것이다. 만약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이 계속된다면 그 과거는 계속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야기꾼의 임무이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관객들의 임무이기도 하다. 이런 기억의 과정은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