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싱크탱크'의 딜레마

시장 논리로 보자면, 초당파적·독립적 싱크탱크의 출현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다. 두뇌는 밥을 먹어야 작동하는 법인데, 그 밥값을 댈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념적·정치적 지향성을 확산시키거나 그 어떤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밥값을 대는 주체는 많지만 사회적 갈등 조정과 타협을 위해 돈을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밥값을 스스로 부담하는 자원봉사 두뇌들도 있지만, 이들이 정·관계 진출·참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건 '외상'이지 순수한 자원봉사는 아니다.

  • 강준만
  • 입력 2016.10.17 08:07
  • 수정 2017.10.18 14:12
ⓒ연합뉴스

최근 초당파적이고 독립적인 싱크탱크를 표방한 여시재의 출범은 고무적이다. 이헌재 여시재 초대 이사장은 "정파를 뛰어넘어 여러 현안에 실질적 대안을 제시하는 솔루션 탱크가 되겠다"고 했고, 출범식에 참석한 정치인들은 "정치적 입장차 탓에 작은 것조차 합의하기 힘들었는데, 여시재처럼 중립지대가 생겨 이곳에서 의견 접근을 봤으면 한다"는 희망을 나타냈다.(<한국경제> 10월13일치 기사)

여시재가 "대한민국이 미래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선 변화를 주도하는 창조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취지로 정한 4대 연구 주제(세계의 변화, 디지털 사회, 지속가능한 발전, 동서양을 초월한 신문명)는 워낙 거시적인 것이어서 당장 국민적 혐오의 대상이 된 정치를 바꾸는 데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시재가 명실상부한 초당파성과 독립성을 보여준다면, 현실적인 정치개혁을 목표로 삼는 작은 규모의 초당파적·독립적 싱크탱크들이 생겨나는 데에 좋은 자극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싱크탱크는 대학의 지식인들이 주로 총론으로만 다루는 현실 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과 아울러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대학에서의 과도한 분업 체제로 인한 분과학문간 소통 단절을 넘어선 융합적 지식을 생산해낼 수 있고, 고급 두뇌의 공공적 참여를 진작시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싱크탱크의 본산지인 미국의 경험은 우리에게 반면교사의 교훈을 준다.

싱크탱크는 마치 큰 수영장처럼 보이는 방(tank)에 들어가 생각을 한다는 의미로 두뇌집단을 뜻하게 되었는데, 늘 문제는 그 방을 제공하고 관리하는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말 이래로 미국의 싱크탱크는 거의 전적으로 기업의 돈과 보수적인 정치철학에 지배되어 왔다. 뒤늦게 자유주의·진보적 싱크탱크들이 많이 생겨나긴 했지만, 문제는 어느 쪽이 더 강하냐에 있는 게 아니다. 이념적·정치적 지향성이 어떠하건 싱크탱크가 정치권 당파주의와 갈등의 복사판으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싱크탱크가 꼭 필요하긴 하지만 탱크의 제공자와 관리자가 문제인 상황, 이게 바로 싱크탱크의 딜레마다. 제공자와 관리자의 이념적·정치적 지향성을 반영하는 지식 생산을 해내는 싱크탱크는 선전기구에 불과하므로 없느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언론이 그런 문제들을 잘 걸러내주면 좋겠지만, 언론 역시 특정한 이념적·정치적 지향성을 갖고 있기에 그런 싱크탱크와 한통속으로 놀아날 때가 많다. 중립적인 언론일지라도 기사 생산 비용 절감에 집착하다 보면 제법 상품성이 높은 정보와 지식을 제공해주는 그런 싱크탱크들의 생산물을 선호함으로써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는 공범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념적·정치적 지향성이 나쁜 건 아니다. 그것 없이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싱크탱크가 정치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싱크탱크의 정치화'는 사실과 의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갈등의 조정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데에 있다. 구성원들의 정·관계 진출·참여 가능성이 높은 싱크탱크의 경우엔 승자 독식주의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보다는 '반대편'을 공격하고 '우리편'이 이기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파적 성격의 지식 생산에 기울기 마련이다. 즉, 사회적 갈등 조정 비용을 낮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높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시장 논리로 보자면, 초당파적·독립적 싱크탱크의 출현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다. 두뇌는 밥을 먹어야 작동하는 법인데, 그 밥값을 댈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념적·정치적 지향성을 확산시키거나 그 어떤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밥값을 대는 주체는 많지만 사회적 갈등 조정과 타협을 위해 돈을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밥값을 스스로 부담하는 자원봉사 두뇌들도 있지만, 이들이 정·관계 진출·참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건 '외상'이지 순수한 자원봉사는 아니다. 초당파적·독립적 싱크탱크는 나중에라도 줄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런 '외상 처리'도 불가능하다. 기금 출연자가 싱크탱크의 구성과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 여시재는 매우 드문 사례다. 지금으로선 여시재가 큰 성과를 거둬 비슷한 싱크탱크들이 더 생겨나거나 기존 싱크탱크들의 성찰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여시재 #싱크탱크 #강준만 #사회 #정치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