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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의 시대에 의미있는 대화를 구해내는 법

  • 김도훈
  • 입력 2016.08.23 11:17
  • 수정 2016.08.23 11:20

캐나다 학자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통찰력 있는 트윗이나 재치있는 경구를 쓴 게 아니었다. 그는 예술가가 선택하는 매체가 메시지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메시지는 그 매체 특유의 것이어서, 본질적인 변화를 거치지 않고 다른 매체로 전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고대 철학자들은 이런 주제를 이해했고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월터 J. 옹과 같은 20세기 철학자들은 이런 것으로 커리어를 쌓았다. 이런 철학자들은 한 시대의 우세한 미디어가 어떻게 그 시대를 정의하는지를 이해하려 했다. 이러한 문제는 소셜 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에 큰 영향을 준다. 수세기 전 플라톤은 구전 전통의 죽음과 손 글씨 문화의 탄생을 비통해 했다. 입으로 하는 말은 손으로 쓴 글이 갖는 상품성과 영속성이 없는 개인적인 매체이기 때문이다. 거르지 않고 나왔다 덧없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구전 전통과 연관된 덕목들이 온라인 소셜 세계라는 최신 매체에서 현실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페이스북 친구들은 플라톤 적인가?

플라톤은 우화의 끝부분에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글쓰기의 발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전까지 대화의 대부분은 글쓰기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 의사소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크라테스의 우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집트 왕 타모스가 글쓰기를 발명한다. 타모스는 세우스 신에게 글쓰기를 보여주며 얼마나 멋진지 자랑한다. 세우스 신은 글쓰기는 지식을 키우는 발명이 아니라 사람들이 까먹게 만드는 발명이라고 대답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글쓰기는 지식의 원천이 아니라 지식의 겉모습에 불과하다.

마샬 맥루한

플라톤은 인간이 구전 전통에서 글쓰기 전통으로 가면서 무언가 중요한 것이 영영 사라졌다고 말한다. 글쓰기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사람이 가진 저장 장소는 기억뿐이었다. 누군가 오딧세이의 12,000줄을 전부 기억해야 했다. 호머 이후 수세기 동안 오딧세이 등 사람들이 즐기던 서사시(몇 개 있었다)는 암기했다. 글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암송 시는 오늘날처럼 표준화되지 않았고 여러 버전이 있었다는 이론이 입증된 바 있다.

우리가 더 이상 오딧세이를 암기하지 않는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겐 책이 있다는 점이다. 책은 훌륭하다. 책은 우리를 위해 정보를 담고 있고, 결코 인간처럼 까먹지 않는다. 그러나 플라톤은 기억 능력을 책에게 뺏겼으며 그건 되돌릴 수 없는 실수라고 생각했다. 첫째,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책들이 있다. 한 인간이 평생에 다 읽을 수 없을 정도다. 둘째, 책을 읽는 것은 저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과는 토론할 수 있고 때로는 설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은 독단적이고 고정되어 있어 대화와는 다르다.

구전 전통의 상실을 한탄한 철학자는 플라톤만이 아니었다. 옹은 큰 영향력을 준 저서 ‘구술성과 문자성’에서 필기 문화가 구전 문화를 몰아낸 것을 연구했다. 옹에 의하면 학계가 필기를 더 선호함에 따라 구전 작품은 희생되었다. 학계와 필기 저작은 목적이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는 각자의 선조가 형식화된 것인데, 이 형식화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녔다. 그전까지는 목소리의 한계라는 제약이 있었으나, 글쓰기는 한 가지 생각을 철저하게 연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옹에 의하면 글쓰기는 순수한 구술 문화에서는 불가능한 수준의 추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했다. 구술 문화에서는 추상화는 지극히 어렵다. 단어와 정의가 고정적이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영구성과 현실성이 있어서 추상화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야기와 생각이 고정되면서, 글쓰기의 영구성은 정설이라는 개념도 만들어냈다.

옹은 구전 문화가 ‘현재에도 균형을 이루며 살아 있다’고 한다. 과거나 미래에서 말을 할 수는 없다. 반면 책은 미래의 독자들을 위해 쓰여지며 직접성이 없다. 글쓰기, 그리고 뒤따른 인쇄의 발명은 시간과 거리를 넘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가능케 했으나 그 결과 말의 직접성을 잃었다. 책은 다른 나라에서도, 심지어 저자가 이미 죽은 뒤에도 읽을 수 있다. 말로 하는 대화는 시간과 장소에 의존하지만 글쓰기는 시간과 장소에서 떨어져 있다. 글쓰기가 시공간에서 독립되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혁명적이라 사상의 본질을 크게 바꿔 놓았다.

이게 당신과 당신의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당신 생각 이상의 의미가 있다. 소셜 미디어는 그저 새로운 유행 정도가 아니다. 의사 소통의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다. 소셜 미디어는 구전과 글쓰기 정통의 요소를 합친 것이다. 즉각적이고 여과되지 않은 의사 소통이다. 시공간에서 독립적이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에 대한 당신의 개인적 견해가 어떻든 간에, 이것이 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일단 수십 억의 사람들이 소비하고 만들어 내는 정보의 양을 늘렸다. 또한 소비하고 만드는데 드는 시간을 줄였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용량이 한정되어 있고, 우리가 매일 소비하는 정보의 양이 기억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선다면, 우리는 정보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게 될까? 메시지에서 이해하는 것이 없다면, 메시지가 있긴 있는 것일까?

한 걸음 물러서 보자.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와 같았던 때가 있었다. 인쇄가 생겨 책을 저렴하게 만드는 게 가능해졌을 때, 생각을 배우고 전달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므로 정보의 양이 생각의 본질을 바꾸는 순간은 존재한다. 우리가 소비하는 정보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정보가 많을수록 이해는 줄어든다. 즉 정보가 더 많다고 해서 지식이 더 많지는 않다는 의미다. 정보가 곧 지식이라면 구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알 것이다. 혹은 기사를 가져다 올리는 사람은 그 글을 쓴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공유는 창조가 아니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고 그 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만약 옹의 말대로 ‘글은 아는 사람과 아는 사실을 분리시킨다’면, 우리가 엄청난 양의 정보를 이해하지 않고도 공유할 수 있다면, 소셜 미디어는 이해라는 행동을 지식에서 더욱 더 멀리 떼어 놓았다. 어쩌면 이 매체에는 메시지가 없는지도 모른다.

인쇄가 말의 산업, 말의 상품화라는 결과를 낳았다면, 그리고 소셜 미디어가 책이나 말을 파는 건 아닌데도 엄청난 수익을 만들어 낸다면, 그건 소셜 미디어는 사람의 상품화이기 때문이다. 만들고 소비하는 사용자들이 상품이다. 예를 들면 페이스북은 매달 약 17억 명의 사용자가 활동하고 매년 180억 달러에 가까운 수익을 올린다. 연 수입을 달로, 다시 순 방문자 수로 나누면 페이스북의 광고주와 회계팀에겐 인간 한 명은 1달러가 조금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네오 러다이트를 옹호하는 글은 아니다. 당신에게 일리아드를 암기하라고 권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가 우리의 의사 소통 방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고려해 볼 필요는 있다. 나는 이 글을 쓰고 공유하는데 테크놀로지를 사용했다. 옹은 ‘말이 테크놀로지화되고 나면, 가장 높은 수준의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지 않고 테크놀로지가 말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비평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즉 인터넷이 우리의 정신적 용량이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가졌다 해도, 인터넷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테크놀로지는 그렇게 움직인다. 이전의 것들을 압도하고 대체한다. 플라톤 역시 이걸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글이 말을 압도하는 것을 슬퍼했으면서도 글을 썼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하면 나는 소셜 미디어를 매장하기보다 칭찬하는 쪽이다. 즉각적 연결성과 대중 보급과 같은 능력을 높이 산다. 인류 역사상 어떤 것도 대중의 참여, 대중의 인식, 정보 교환에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능력에 대가가 따를까? 적어도 콘텐트의 덩어리가 따르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는 어디에나 있는 말과 콘텐트가 말과 생각이 상품이라는 걸 드러낸다. 콘텐트에는 브랜드가 붙어 팔리고, 스폰서가 붙고 광고가 따르고, 마침내 아카이브되고 잊혀진다. 모두 글을 쓰고 공유해서, 이미 과포화된 정보 세계에 또 정보를 보탠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친구들,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로 구성되지만 꼭 당신이 아는 사람들, 관심이 비슷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이런 온라인 커뮤니티는 공통점을 찾고 협조하기를 거부한다. 어떤 커뮤니티들은 타인들을 악인으로 만들고 배척하려 하기도 하고, 착취하고 상품화하려고도 한다.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고 이성적, 변증법적 방식으로 생각을 공유하려는 커뮤니티는 많지 않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아테네의 아고라처럼, 인터넷은 일어나서 연설을 하는 사람들과 그걸 듣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친구들은 표면상으로는 진실과 미에 관심을 갖고 길게 토론했다. 소크라테스의 지도에 따른 이들의 대화는 솔직했고 진실을 추구했다. 그들이 관심을 가진 주제는 단명하지도 돈에 관련되지도 않았다. 그들의 대화는 축소와 파괴를 부르기 보다는 진보적이고 건설적이었다. 인신 공격, 거짓 이분법, 수사적 속임수를 통해 대화를 파괴하려던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와 친구들과는 다른 목적을 가졌다. 소크라테스와 친구들은 그들을 소피스트라고 불렀다.

매체는 그 매체의 고유한 메시지만 전달할 수 있다. 소셜 미디어는 친근한 짧은 형태의 메시지만 전달할 수 있다. 다른 것들은 전부 적합하지 않다. 예를 들면 철학은 글을 통해서만 발달될 수 있었다. 길고 분석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글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만약 철학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발달되었다면, 일화, 인용문 카드, 경구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소셜 미디어는 플라톤적이지 않지만 정보를 퍼뜨리는 공유의 도구는 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좋지 못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지 않는다면 내가 게으른 것일 것이다. 끝없이 추락하는 이런 대화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의미있는 대화를 구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진실을 원하게 될까? 내가 할 수 있는 제안은 아주 작은 것이다. 당신과 내가 실천에 옮길 수 있을 정도로 작다(진짜 변화는 사실 당신과 나에게서만 온다).

과잉, 허영, 공허함에 대한 답은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것이다. 잘 살고 잘 생각하는 것은 자기 훈련, 고려, 협력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들은 소셜 미디어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활용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헤겔이 말한 동일성이 현재 소셜 미디어에 없다는 생각에 기반한 제안이다. 소셜 미디어에서 읽고 공유한 주장에 기반해 새로운 이해를 얻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사람들은 미세 문화와 피드를 직접 고르고 거기에서만 정보를 잔뜩 얻는다.

어쩌면 민망한 것일지도 모를 나의 제안은 당신을 더 유연하게 만들고, 당신의 이해를 제공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듣고 당신의 이해의 일부로 만들라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와 같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을 활용하여 의도와 이성, 협력이 있는 대화를 만들어 공동의 이해를 창조해내고 지속성과 수준을 지키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는 즉각적인 전세계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다. 관심과 정보를 가진 사람들의 종합적인 커뮤니티다. 현재 소셜 미디어는 지나친 친근함과 일시성의 구속을 받고 있으나 인터넷의 일부로서, 또는 조직화, 교육, 이해를 위한 더 진지하고 사려깊은 매체의 전신으로서, 대화의 미래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제목의 시대착오적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다. 아직은 힘들지만 언젠가는 가능할 수도 있다.

허핑턴포스트US의 How to Salvage Meaningful Conversation in the Social Media Age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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