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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추행당한 남성이고 그 사실을 깨닫는 데 수년이 걸렸다

피해자라는 건 약한 것도 창피한 것도 아니다

ⓒKAIPONG VIA GETTY IMAGES

지금부터 공유할 이야기가 내 체험담을 바탕으로 한 게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내게는 매우 복잡한, 남성 피해자 관점의 성추행 사건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할 재간이 없다.

나는 아직도 그때 당한 일을 ‘폭행(assault)‘이라고 표현하는 데 익숙지 않다. 사실 그 단어를 어떻게라도 피하고자 나는 올림픽 체조선수급의 심리적 몸부림을 친다. 폭행 대신 ‘부적절한 행동’ 또는 ‘육체적으로 이용당했다’ 등의 말을 쓴다.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는 걸 나 자신에게 인정하는 데만 18개월이 걸렸다. 그 사실을 타인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데는 12개월이 더 걸렸다.

당시 나는 만 23세 대학생이었다(재미없는 상식 하나: 만 18에서 24세 사이의 남성 대학생은 대학교에 다니지 않는 또래 남성보다 성추행당할 확률이 5배나 더 높다). 새로운 일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 업계 관련 큰 행사에 갔다. 행사 첫날 밤 소셜미디어를 통해 안면이 있는 그녀를 지인의 소개로 정식으로 만났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잔뜩 취해 있었다.

약 90초간의 대화를 주고받은 다음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자기 혀를 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똑같은 행동을 두 차례 더 반복했다. 나는 간신히 그녀로부터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몇 차례 더 내게 다가왔고 만취한 상태에서 계속 말과 행동으로 욕구를 표시했다. 그녀는 업계에서 잘 나가는 스타였으며 나이도 나보다 몇 년 위였다. 나는 최하위에 속하는 새내기였다.

호텔 방에 돌아왔다. 그러나 뭔가 뒤틀린 느낌이었다. 방금 있었던 일은 정상이 아니라는, 옳지 않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표현하기 모호한 창피감과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또 그 상황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면 입방아를 미리 차단하겠다는 계산에서)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다. 전날 밤 사건에 대해 자랑한 것이다. 흥청망청한 파티 분위기에서 일어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인 척 포장했다. 나 자신도 내 이야기에 설득됐다. 며칠 후 그녀를 다시 만나려는 시도까지 했다. 그러니 문제는 무슨 문제? 난 괜찮았다. 사건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나. 피해자가 아니라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나. 모든 게 괜찮은 나니까.

그러나 내 실제 상태는 달랐다. 나는 사건 이후 몇 달 동안 그녀를 업계 행사에서 지나칠 때마다 공황발작을 일으켰다. 내 상태는 쌍방이 모두 아는 지인 앞에서 그녀가 그 사건을 농담인 듯 말한 다음에 더 악화됐다. 다시는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업계 사람이니 다시 만날 확률은 매우 높았다. 문제를 언급하거나 해결책(그런 상황에서 해결책이라는 게 대체 뭔지 잘 모르겠지만)을 물색하는 대신 나는 그 찜찜한 기분이 점점 더 썩어가도록 내버려 뒀다. 엄청난 노력으로 성취한 사회인으로서의 내 자리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성추행 당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아니, 나 자신에게 그런 생각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면 개념적으로 남성도 성추행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과 내가 실제로 성추행 피해자였다는 걸 인정하는 데는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성은 자율성을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도록 자신도 모르게 훈련돼 있다. 나는 내 마음과 몸을 통제할 수 있으며 모든 게 나의 조정하에 있다는 생각 말이다. 그런데 피해자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 ‘나’는 내 삶에 대한 주체라는 착각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문제는 자기에게 자율성이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인정하는 순간 사람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즉, 남성은 아무 때나 섹스할 준비가 돼 있다는 인식. 남성은 섹스를 절대로 거절할 수 없게 만들어졌으므로 그 어떤 상황에서든, 그게 언제든 원치 않는 성적 접촉에 피해를 본다는 건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 그래서인지 성추행 체험을 밝히는 남성도 간혹 있지만 그럴 경우 사람들은 오히려 행운이라느니 좋은 경험이라느니 하며 불평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주로 트위터 알계정들이 그런다).

그래서 나는 거의 2년 동안 아무 일 없었던 듯 지냈다. ‘추행‘, ‘폭행‘, ‘피해자’ 같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더러 그런 생각이 혹시 머리에 떠오르려고 하면 나는 나 자신에게 성추행당한 게 아니라고, 성추행당했다면 왜 그녀와 계속 소통했겠냐고 물었다. 솔직히 말해 그녀와 키스하고 싶지 않지는 않았잖은가? 물론 그런 상태에 빠진 그녀와 그 공간, 그 순간에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섹스까지 강요당한 것도 아니잖은가?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가?

그런데 이런 생각은 피해자의 정신적 상태, 바로 내 실태를 무시한 것이었다. 화해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다시 찾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무시했고, 서로 좋아할지라도 허락 없는 성적 접촉은 옳지 않다는 사실도 무시했다. 왜냐면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카운슬러를 만났다. 내게 있었던 일이 내 허락 없이 일어난 성추행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계기였다. 몇몇 친구와 지인들에게도 내 사연을 공유했다. 그들은 내 상황을 이해하고 지지하며 내가 겪은 일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매우 운이 좋았다. 내가 생각해온 ‘남성’이라는 정체성과 충돌되는 일을 내가 겪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으니까 말이다.

성추행 사례를 인정하는 건 자신의 자율성이나 주체성을 포기하는 게 결코 아니다. 그 반대다. 자기에게 나쁜 일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는 건 오히려 자기 주체성을 되찾는 길이다. 남성 피해자에 대한 대화를 조롱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맞서는 행동이다. 남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마약과도 같다. 떨치기가 매우 어렵다.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 건 쉽지 않다.

나는 미투 운동가들에 감사하며 특히 남성 피해자의 입장을 세상에 알린 테리 크루즈에게 감사한다. 그들 덕분에 남녀 피해자 모두 자신들이 당한 트라우마, 또 자기가 스스로 입힌 트라우마를 두려움 없이 논의할 수 있게 됐다.

사실 내 상황은 예외적이지 않다. 자신은 성추행당한 적이 없다고, 남성 피해자라는 명칭에 딸린 오명이 두려워 별의별 심리적 몸부림을 다 치는 남성들을 나는 안다. 올바른 대응법이 아니다.

성추행에 대한 대화 범위를 더 넓히는 과정에서 기억할 게 있다. 자신에게 일어난 성추행 사례를 남성도 두려움 없이 공유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피해자라는 건 약한 것도 창피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허프포스트US의 글을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김태성 에디터 : terence.kim@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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