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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할아버지 돌아가시면 경조휴가, 외할아버지 돌아가시면 개인연차 : 친가와 외가 차별하는 이상한 사내 복지 제도

친가만 ‘직계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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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사진 ⓒ게티이미지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20대 ㄱ씨는 최근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 외할아버지를 입원시키려다 황당한 일을 겪었다. 직원 가족이 입원하면 치료비를 감면해주는 ‘가족감면할인’ 제도가 친조부모에는 적용되나, 외조부모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원무과 직원으로부터 들은 것이다.

병원 내규에는 환자가 직원의 ‘직계가족’이면 진료비 할인이 된다고 적혀 있었으나, 실제 운영은 ‘친조부모’만을 대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ㄱ씨 외할아버지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은 ‘지인할인’이 유일했다. ㄱ씨가 일하는 병원에서 ‘가족할인’을 받으면 진찰료 100%, 외래 입원비 30%를 감면해준다. ‘지인할인’으로는 진찰료나 외래 입원비 할인을 받지 못하고, 비급여 진료비의 일부만 할인해 준다.

ㄱ씨는 “요즘 외조부모 손에 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냐. 그런데도 친가만을 가족의 테두리에 넣는 사내 복지 제도는 문제가 많다. 업계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경조 휴가 기간은 물론, 장례물품이나 화환까지도 친가와 외가를 차등 취급하는 회사가 대다수였다”고 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ㄱ씨는 지난 12일 청와대에 ‘친가, 외가를 나누어 복지 혜택을 차등부여하는 기업행태를 근절해달라’는 제목의 국민청원을 올렸다. 해당 청원글에서 ㄱ씨는 “무려 ‘복지’의 영역까지 성차별로 고통받게 하는 일부 기업들의 행태를 외면하지 말아달라.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경조휴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개인연차를 써 빈소를 지켜야하는 불공평함을 어느 누구를 잡고 토로해야 한단 말이냐”고 호소했다. 이 글에는 21일 오후 4시30분 현재 1만1151명이 동의했다.

친가와 외가를 차별하는 사내 복지 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는 꾸준히 있었다. 2013년 국가인권위원회는 “기업들이 경조 휴가 기간, 경조비 지급에 친조부모와 외조부모를 달리 취급하는 관행을 개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 표명과 함께 82개 기업을 직권조사했다. 그 결과 41곳이 경조 휴가 기간 또는 경조비 지급에서 친가와 외가에 차등을 둔 것으로 나타났다.

인권위는 2012년 가족할인 대상에 기혼 여성의 시부모만 포함하고 친부모는 제외한 경북대병원에 개선을 권고하기도 했다. 당시 인권위는 “이러한 진료비 감면 제도가 ‘결혼한 여성은 출가외인이므로 친정의 일에 남성인 자녀와 동일한 책임과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다’는 통념이 작용한 차별”이라고 판단했다.

관련 법안도 발의됐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7월 경조사에서 친가·외가 차별을 금지하는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은 사망한 사람의 성별이나 부계 또는 모계 혈족을 이유로 휴가 기간을 다르게 해서는 안 되고, 이를 위반한 사업주에 과태료를 부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박주민 의원은 “평등을 기초로 한 가족생활을 보장하는 것은 헌법이 정한 국가의 의무인 만큼, 노사합의를 거쳐 회사가 자율적으로 개선하도록 기다리기보다는 법 개정을 통해서 제도화 해야 한다”고 했다.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이 1년째 계류 중인 까닭

개정안은 1년째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소관 부처와 환노원 전문위원 모두 법안 마련에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송주아 전문위원은 법안 검토보고서에 “법안 취지는 이해하나, 단체협약 등 노사 자율로 정하는 경조사 휴가를 개정안과 같이 법적으로 강제하기 위해서는 노사 의견 수렴 등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썼다. 박화진 고용노동부 차관도 지난해 12월 환노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신중 검토 의견”이라고 했다.

‘노사가 알아서 정할 일’이라는 식인데, 현실에선 말처럼 쉽지는 않다. 노사협약에서 가장 먼저 다뤄지는 것은 임금이다. 게다가 노사협약에 나서는 노조 대표, 교섭위원 대다수가 남성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9년 한국노총·민주노총에 가입한 441곳 사업장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노조 대표가 남성이라고 응답한 곳이 391곳(89.1%)이었다. 사측과 직접 교섭하는 교섭위원에 여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업장이 217곳(58.5%)에 달했다. 구미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업이 친가, 외가에 차별적 복지 제도를 운영하는 이유는 비용 부담 때문일 것이다. 적용 대상에 제한을 두지 않고, 적용 횟수에 상한을 두는 방식 등으로 복지 제도 운영 방식에 변화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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