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디터의 신혼일기] 아가씨도 도련님도 며느리도 서로 다 불편하지만

2일, 국립국어원은 '새로운 시대에 대응'한 언어 예절 안내서를 공개했다.
국립국어원 '우리, 뭐라고 부를까요?' 중
국립국어원 '우리, 뭐라고 부를까요?' 중

허프 첫 유부녀, 김현유 에디터가 매주 [뉴디터의 신혼일기]를 게재합니다. 그닥 진지하지 않고 의식의 흐름만을 따라가지만 나름 재미는 있을 예정입니다.

중학교 때 이후로, 나는 우리 엄마가 시댁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호칭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정한 부분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던 것이다.

  • 왜 엄마보다 나이가 어린 것은 물론, 나하고도 6세밖에 차이가 안 나는 아빠의 사촌동생(즉 나에겐 오촌 아저씨)을 엄마가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가?
  • 아빠는 엄마의 동생들(즉 나의 삼촌과 이모)에게 “XX야, XX야”라고 이름을 부르는데 엄마는 아빠의 누나들과 그 남편들(즉 나의 고모와 고모부들)을 향해 깍듯하게 ”형님, 아주버님” 해야 하나?

세상의 이런 비합리적인 호칭은 변하지 않은 채 나는 결혼했고, 결혼하고 맞는 첫 번째 명절이던 지난해 설날 시할머니 댁을 아침 일찍 찾았다. 제사를 지내고 세배를 마친 뒤 아침 식사를 하는데 나와 동갑인 남편의 사촌동생이 내 옆에 앉았다. 할머니께선 당신의 손자에게 직접 술을 한 잔 주고 싶다고 하셨고, 마침 술 주전자는 내 옆에 있었다.

[문제] 이 경우, 내가 남편의 사촌동생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단, 할머니께 바로 드리기엔 거리가 있다.) (3점)

도련님, 주전자 여기 있어요.”

으, 그 단어. 엄마가 저 단어를 왜 쓰는가 싶었던 그 단어를 내가 해 버렸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나와 동갑, 그런 전통적인 호칭에 대해 들어 왔지만 현대 사회와 맞지 않게 고리타분하다고 느껴왔을 게 분명한 90년대생 20대인 남편의 사촌동생은 잠시 멈췄다가,

″으윽, 도련님이라니. 편하게 하세요 형수님. 편하게”

라고 소름끼쳐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건 어렵다. 바로 눈 앞에 할머니와 어르신들이 잔뜩 계시는데 내가 ”아 그럼 우리 반모 콜?”하기는 좀...

벤토리처럼 반모 콜?
벤토리처럼 반모 콜?

그렇다고 해서 도련님 말고 마땅한 호칭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작 ‘도련님’ 역시 나를 ‘형수님’이라고 칭했다. 만약 나한테 벤틀리 같은 자식이 있었더라면 ”누구누구 막내삼촌”이라며 말도 조금 편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자식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색하게 주전자를 건네며 하하, 웃었다.

어색한 건 ‘도련님‘만이 아니다. 남편의 또 다른 사촌동생은 나의 대학 선배다. 다른 과였지만, 만약 학교에서 처음 만났다면 나는 응당 그녀를 ”언니”라고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결혼 후, ‘언니‘라고 불리는 건 내 쪽이 됐고 나 역시 자연스럽게 그녀를 ‘아가씨’라고 부르게 됐다.

그러잖아도 어색한 시할머니댁에서 만났으니, 딱히 부를 호칭이 애매한 것보단 도련님이니 아가씨니 상관없이 이렇게 부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결혼 전 남친의 사촌동생으로서 만났을 땐 그냥 학교 선배처럼 편했던 그녀인데, ‘언니-아가씨’ 하다 보니 괜히 ‘시댁식구-며느리’라는 선이 그어져 심적으로 더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도련님‘, ‘아가씨’라 불리는 입장도 썩 불편할 것이다. 나이도 비슷하고, 남녀평등해야 하는 21세기에 이런 호칭은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함께 배워온 입장에서 듣기에 아주 어색하고 민망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대체해 부를 말이 없으니, 조금씩 불편을 느끼면서도 21세기가 20년이나 흐른 지금껏 이어져 온 게 아닐까.

벤토리도 반모가 좋대요!
벤토리도 반모가 좋대요!

지난 2일, 국립국어원은 새로운 시대에 대응한 언어 예절 안내서 ‘우리, 뭐라고 부를까요?’를 공개했다. 이는 ”특정한 호칭이나 지칭어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나 상황에 따라 상대를 배려하고 자유롭게 소통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고 한다. 이를 잘 살펴보니 ‘도련님‘, ‘아가씨’ 같은 호칭은 이제 ‘XX씨’라고 부르거나 이름을 직접 부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상상을 해 보았다. 우리끼리 ”우리 그럼 이제 아가씨 도련님 하지 말고 XX씨 해요” 할 때의 상황.

그냥 귀여워서 넣었다.
그냥 귀여워서 넣었다.

직접적으로 눈총을 주는 어르신이 많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지적을 할 것이고, 그럼 우리는 괜히 눈치를 보게 될 터였다. 특히 피가 하나도 안 섞인 며느리인 내가... 그러다보면 서로 잘 부르지 않게 되고, 말수가 줄어들게 되고, 1년에 두세번 보는 자리가 더더욱 어색해지게 되고... 국립국어원이 공개한 ‘언어 예절 안내’는 그런 식으로 무색해질 터였다.

그래도 답은, 지금부터 시작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호칭들이 편하게 사라지는 그날까지 우리 세대가 계속 눈치를 조금 보고 어색하더라도 말이다. 시댁이라고 해서 며느리에게 마냥 못되게 구는 막장드라마 속 세상도 아니고, ‘도련님‘이니 ‘아가씨’니 하는 호칭들은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어색하기 그지없으니까.

애초에 이렇게까지 복잡한 호칭은 대체 누가 만든 걸까? 서로를 올려서 칭해주는 그 예절이 담긴 마음만 제외하면 모두 사라져도 무방할 것 같다. 답은 벤틀리 말대로 예의바른 반모 뿐이야.

김현유 에디터: hyunyu.kim@huffpos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