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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05일 12시 45분 KST

'학자금 대출 3천+전세 대출 6천' 내 코가 석자인데 굳이 데이트에 돈 써가며 만날 만한 남자가 과연 있을까? (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

손희정의 영화담(談)

연애 빠진 로맨스
손석구-전종서 

한국 영화에서 청춘 남녀의 섹스가 진지하게 그려지지 않은 지는 좀 되었다. 지난 몇년간 가장 인상적인 섹스 신은 <소공녀>(2017, 전고운)의 한 장면이었다. 변변한 가구 하나 없는 좁은 집에서 게임을 하며 장난을 치던 연인이 마음이 맞아 옷을 벗기 시작한다. 외투를 벗고, 웃옷을 벗고, 바지를 벗고…. 그러다 두 사람은 문득 멈춘다. 그러곤 멋쩍게 웃으며 옷을 다시 주섬주섬 입기 시작한다. 방을 데우기 위해 보일러를 틀 수도 없을 정도로 빈곤한 두 청춘이 냉골을 이기지 못하고 섹스를 포기한 것이다. 섹스 없는 섹스 신. <소공녀>가 그리는 ‘섹스리스 청춘’은 물질적 조건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대한민국 현실에 대한 풍자였다. 

연애 빠진 로맨스
연애 빠진 로맨스 스틸컷 

그로부터 4년 뒤, 또 한편의 흥미로운 청춘 영화가 이곳에 도달했다. 독립영화 신에서 여자의 성과 연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도발적 영화들로 주목을 끌어온 정가영 감독의 첫 상업 로맨틱 코미디 <연애 빠진 로맨스>다. 섹스는 포기할 수 없지만 연애는 제쳐버릴 수밖에 없는 ‘연애 빠진’ 2030의 이야기가 스크린에 펼쳐진다.

 

연애는 글쎄, 이성은 그리운 청춘

팟캐스트 론칭을 준비 중인 ‘함자영’(전종서)은 섹스는 하고 싶지만 연애는 달갑지 않은 스물아홉이다. 첫사랑에게서 받은 상처가 계속해서 그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와중, 현실적으로도 남자를 진득하게 만날 수 있는 상황이 못 된다. 술에 잔뜩 취해 함자영은 외친다. “학자금 대출 3천에 전세 대출 6천. 이 빚 갚아가면서, 데이트에 돈 써가면서, 만날 만한 가치가 있는 남자가, 있냐?!” 한달 만난 ‘하찮은’ 남자에게 차인 날, 함자영은 홧김에 데이팅 앱 ‘오작교미(ME)’에 가입한다. 하루 종일 띠링띠링 앱 알람은 울리지만, 여기에서 “성병에 안 걸린” 그럴듯한 남자를 만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한다.

연애 빠진 로맨스
박우리 

다른 한쪽에선 마찬가지로 뭐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33살의 남자 ‘박우리’(손석구)가 얼추 살아가고 있다. 짝사랑하는 회사 선배는 남자친구와 싸울 때마다 박우리를 찾아와 ‘위로’를 받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딱 거기까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섹스 파트너로 이용당하는 것도 괴로운데, 근무하는 잡지사의 편집장은 독자들을 사로잡을 ‘섹스 칼럼’을 내놓으라고 괴롭힌다. 인터뷰를 하든, 섹스토이로 자위를 하든, 진짜 여자를 만나든, 뭐든 써내라는 닦달에 박우리는 결국 ‘오작교미’에 접속한다. 그리하여 외로운 여자 함자영과 일을 해야만 하는 남자 박우리가 ‘원나잇’을 위해 만나게 된다.

이후의 이야기는 당신이 예상하는 그대로다. 무언가 부족한 두 사람이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위안을 찾는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잠깐, 남자가 여자를 만나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쓴 ‘섹스 없는 섹스 칼럼’이 대박이 나면서 여자 역시 그 칼럼에 대해 알게 된다. 남자는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여자를 되찾고자 하지만 여자의 마음은 이미 굳게 닫힌 상태. 그렇게 영원히 이별일 것만 같던 어느 날, 두 사람은 우연히, 혹은 계획적으로, 길에서 재회한다. 이야기의 전개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 우리는 이 로맨틱 코미디에 빠져들고 만다. ‘로코’의 매력이란 그 뻔한 스토리를 채우는 두 사람의 끊임없는 재잘거림과 알콩달콩한 밀당, 그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아슬아슬한 성적 긴장감이고, 전종서와 손석구, 두 사람(아니 감독까지 포함해서 세 사람)이 만들어내는 화학 작용은 동 장르 내 최상급이기 때문이다.

연애 빠진 로맨스
스틸컷 

손석구의 박우리는 날카로운 눈매 속에 야생성을 품고 있으면서도 손을 내밀어 턱 밑을 조금만 긁어주면 쉽게 길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순한 남자다. ‘강아지 같은 무해한 남자.’ 정가영 감독이 손석구에게 주문한 캐릭터였다. 전종서의 함자영은 자신이 원할 땐 다가왔다가 욕구가 채워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기 자리로 돌아가 몸을 웅크리고 낮잠을 자는 고양이 같다. 그리고 이 고양이 같은 여자는 성적 에너지를 숨길 생각이 전혀 없다. 꼬리를 살짝 내린 남자는 꼬리를 바짝 올린 여자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너는 좀 야해.” 함자영은 그 말을 듣고 살짝 미소 짓는다. 이 장면은,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로코 역사상 가장 설득력 있는 순간이었다.

 

납작한 캐릭터 아닌 진짜 주인공으로

이 영화를 사랑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함자영이 ‘야한 여자’라는 것이다. 영화는 그 야한 여자에게도 학자금 대출이 있고,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다고 말한다. 그간 한국 영화는 ‘연애할 여자 따로, 결혼할 여자 따로’라는 진부한 이분법 안에서 성과 사랑과 연애와 ‘정상가족’에 대해 그려왔다. 덕분에 야한 여자에게도 삶이 있다는 이야기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전종서가 연기했던 <버닝>(2018, 이창동)의 ‘해미’만 해도 그렇다. 젊은 남자의 성욕을 자극하는 젊은 여자는 가족도 친구도 없이 남자들에게 들러붙어 있다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다. 아마도 돈 많은 미국 교포에게 살해당해 어딘가에 파묻혔을 것이다. 물론 전종서는 그런 납작한 캐릭터에게조차 눈부신 숨결을 불어넣었다.

연애 빠진 로맨스
함자영 

무엇보다 함자영에게는 섹스 말고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것. 그게 함자영이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김영옥)를 주인공으로 팟캐스트를 제작하려는 이유다. 재미있는 건, 첫사랑과의 이별, 박우리와의 로맨스, 그리고 할머니와의 협업을 통해서 함자영이 배우는 건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주인공일 수는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주연일 수도, 엑스트라일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쿨한 조연’이 될 수도 있다. 영화는 그렇게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로코는 세계 영화사에서 ‘여성의 영화’로 평가받아온 장르다. 하지만 한국 영화에서는 한동안 로코에서조차 남성 캐릭터의 시선과 목소리에만 주목했다. 함자영, 박우리와 함께 새로운 로코 시대가 열릴까? 그 어려운 일을 로코 장인 정가영이 해낼 수 있을까? 기대가 된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