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이 시위 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히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드는 듯한 발언을 했다가 백악관에 다녀온 뒤 급작스럽게 병력 철수 지시를 번복하는 일이 벌어졌다.
백인 경찰관의 강압적인 체포로 목숨을 잃은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시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군대를 시위 진압에 동원하는 문제를 두고 국방부와 백악관의 긴장이 이례적으로 고조되는 분위기다.
에스퍼 장관은 3일(현지시각) 국방부 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는 군 병력을 시위 진압에 동원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지사들에게 강경한 대응을 주문하며 정규군 투입을 위협했던 트럼프 대통령에게 사실상 반기를 든 것이다.
그는 연방 군 병력을 국내 치안 문제에 동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반란진압법은 ”가장 다급하고 대단히 심각한 상황들”에서만 ”최후의 수단”으로 활용되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상황에 처해있지 않다.”
그는 ”나는 (군 병력 동원을 위한) 반란진압법 발동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라고는 별로 없는, 분명한 어조였다.
이날 브리핑에 앞서 에스퍼 장관은 시위 격화에 대비해 워싱턴DC에 배치시켰던 제82공수사단 소속 현역군인 200여명의 부대 복귀를 지시했다. 시위가 한층 평화적인 양상으로 진행되자 병력을 비상대기시킨 지 이틀 만에 철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뒤, 에스퍼 장관은 병력 철수 지시를 번복했다. 백악관에 다녀온 뒤의 일이다. 육군장관 라이언 매카시는 에스퍼 장관의 백악관 방문 뒤 철수 결정이 번복됐다고 AP에 확인했다.
AP는 트럼프 대통령이 에스퍼 장관이 ”유약함”을 내보였다며 그의 군 병력 투입 반대 발언에 언짢아했다고 전했고,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에스퍼 장관을 불러 맹비난을 퍼부었고, 병력 철수 결정을 번복할 것을 지시했다고 전했다.
에스퍼 장관은 이틀 전(1일) 트럼프 대통령의 교회 앞 ‘사진 촬영 이벤트’에 동행한 일로 비판을 받아왔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도보로 백악관을 나서 세인트 존스 교회를 방문하기에 앞서 경찰과 군경찰 병력 등은 이 지역에서 평화적으로 시위를 이어가던 사람들을 최루가스와 고무탄을 동원해 강제로 해산시켰다.
에스퍼 장관은 또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들을 언급하면서 ”전장(battle space)”이라는 표현을 써서 논란을 불렀다. 마틴 뎀프시 전 합참의장은 ”미국은 전장이 아니다. 우리 동료 시민들은 적이 아니다”라는 말로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해외의 위협으로부터 국가안보와 시민들의 생명을 수호해야 할 국방부가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소품’으로 전락해버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군 미군 현역 군 병력의 40%가 유색인종인 만큼, 병사들의 사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비판과 우려를 의식한 듯, 이날 브리핑에서 에스퍼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과 거리를 두는 듯한 말들을 했다.
그는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로즈가든 기자회견 뒤에 교회 앞 ‘사진 촬영 이벤트’가 있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고 말했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는 자신의 노력이 ”성공적일 때도 있고, 성공적이지 않을 때도 있다”면서도 ”나의 목표는 국방부를 정치에 엮이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위 장소에 대해 ”전장”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군인으로서 익숙하게 쓰던 표현일 뿐이라며 미국 시민들을 겨냥한 말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에스퍼 장관은 또 플로이드의 사망은 ”끔찍한 범죄”라며 연루된 경찰관들은 ”살인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했고, 모두가 힘을 모아 ”미국의 인종차별”에 맞서야 한다고도 했다. ”우리는 이런 비극이 너무 자주 반복되는 것을 목격해왔다.”
이날 케일리 매커내니 백악관 대변인은 ‘대통령이 여전히 에스퍼 국방장관을 신임하느냐’는 기자들의 반복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현재로서 에스퍼 장관은 여전히 에스퍼 장관이다. 나중에 대통령이 신임을 잃게 된다면 우리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