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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3월 08일 15시 04분 KST | 업데이트됨 2021년 03월 10일 16시 49분 KST

“동거하면 '쉬운' 여성인가요?” 같이 동거해도 숨 쉬듯 ‘낙인’ 찍히는 이는 여성뿐이었다 (인터뷰)

‘세계 여성의 날’이 지정된지 3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성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EBS
EBS '까칠남녀(2017)'에서 '동거'를 주제로 이야기한 사유리와 전원주

“남자는 큰 흉이 안 되지만 여자는 상처가 생기고 낙인이 찍힌다.” 원로 배우 전원주가 한 방송에서 ‘동거’에 대해 한 말이다. 낙인(烙印)이라니. 낙인은 다시 씻기 어려운 불명예스러운 평판을 뜻한다. 같이 동거했는데 왜 여자한테만 이런 무시무시한 낙인이 찍힌다는 걸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로남불’ 논리지만, 최근 허프포스트가 만난 동거 경험자들은 이같은 피해를 몸소 겪은 적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동거가 왜 남성한테만 이득이죠?” 여성에게 유독 가혹한 ‘동거’

“글로 차마 적기 어려운 모욕적인 댓글과 ‘남자만 이득이네’, ‘여자 나중에 뼈저리게 후회할 듯’ 등 차별적인 댓글을 보며, 잘못한 게 없는데, 주눅이 들었어요.” 남자친구 홍영돈(27)씨와 2년 반 동거 끝에 결혼한 유튜버 김나래(23)씨는 과거 한 매체에 동거 유튜버로 소개됐다가 일부 악플러에게 시달린 적이 있다고 고충을 전했다. 영돈씨는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를 향해 성적인 댓글이 많이 달려 화가 났다”면서 동거를 문란한 성생활과 동일선상에서 보는 현실에 씁쓸함을 느꼈다고 했다. 

유튜버 '너구리부부' 제공
유튜버 ‘너구리부부’로 활동하고 있는 김나래·í™ì˜ëˆì”¨ 부부. ìœ íŠœë¸Œ 방송 중 동거 경험을 밝힌 바 있다.

결혼 준비 과정에서 잠깐 동거한 기혼 여성 박주미(30)씨도 나래씨와 비슷한 고충을 전했다. “동거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고, 거기에서 오는 피로감을 제가 견디지 못할 걸 알기에 선택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남자친구와 동거 중인 여성 A(28)씨는 “아무래도 주위 이웃들이 부부라고 생각하셔서,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그냥 신혼부부인 척 지낸다”고 말했다.

“남성인 제가 (여성들보다) 편견으로부터 그나마 더 자유롭다는 걸 실감했다”는 영돈씨의 말처럼 실제 우리 사회에서 ‘동거’ 경험은 여성에게 더 가혹하다. 최근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20~30대 미혼 남녀 511명을 대상으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애인의 과거’를 주제로 설문조사한 결과 남성 응답자(245명)가 압도적으로 꼽은 1위는 ‘동거경험(49%)‘이었다. 반면 여성 응답자(266명)는 ‘양다리 경험(33.8%)‘을 가장 많이 꼽았고 ‘동거 경험’을 택한 응답자는 12%에 불과했다. 

왜 남성은 절대 여성의 과거 동거 경험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걸까. 기사를 발행하는 3월 8일이 공교롭게도 ‘세계 여성의 날(세계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1977년 공식 지정된 기념일)’이라는 점에서, 동거를 향한 성차별적 인식은 더욱 씁쓸하게 다가온다.

해당 결과에 팟캐스트 ‘큰일은 여자가 해야지’ 공동 운영자이자 프리랜서 작가 정만춘은 날카로운 질문으로 정곡을 찔렀다. 그는 앞서 4명과 동거한 경험을 책으로 펴냈고, 현재도 “파트너와 동거 중”인, 이른바 ‘동거주의자’다. “아마도 ‘동거=섹스 많이 함’ 정도로 생각하고, 여성의 정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 같습니다만…같이 산다고 섹스를 더 많이 하는 것도, 성기가 닳아서 불결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제 생각엔 같이 안 살 수록 더 타오를 것 같은데요?”

웨일북, 팟캐스트 '팟빵'
매거진 '딴짓'의 발행인이자 프리랜서 작가인 정만춘이 자신의 동거 경험을 담은 책 '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하나요?'(왼쪽), 프리랜서 매거진 '프리낫프리' 편집장 아술아와 공동 진행을 맡고 있는 팟캐스트 '큰일은 여자가 해야지'.

남자친구와 1년 6개월째 동거중인 여성 B(27)씨도 비슷한 의견이다. B씨는 “동거만 안 했다 할 뿐이지, 매일 모텔 가고 여행 가면 동거와 뭐가 다를 게 있는지 묻고 싶다”며 “‘여자라서 문제지’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들은 얼마나 깨끗한지 밑이나 닦고 오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러한 편견에는 동거 경험이 있을 경우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더 성관계를 많이 했을 것이고, 그런 여성은 자신의 배우자로 적합하지 않다는 사고방식이 전제된다. 물론 이런 생각을 가진 남자라면 만나지 않는 게 좋지만, 왜 이토록 여성의 과거 성 경험에 엄격한 이들이 많은 걸까? 이는 조선시대 이래 그간 많은 여성을 희생시켜온 이른바 ‘남성 중심 혈연/가족제도’와 관련이 있다. 해당 제도가 오랜 시간 공고히 유지되어오면서 남성이 경제권을 쥐고, 여성은 이에 종속돼 부계 혈통을 잇는 역할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남성은 혈통의 순수성을 위해 여성이 남편 외 남성과 성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이 과정에서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로 ‘순결(정조)’를 강조했다.

게티이미지
자료 사진

 

같은 ‘동거’여도 결혼 전제로 할 땐 우호적?  

이러한 남성 중심 가족 문화는 그나마 ‘동거’가 결혼을 전제로 할 때 우호적이라는 사회 인식과 맥락을 같이한다.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44세 미혼남녀(남성1140명, 여성 10324명)를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는 이를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당시 남녀 10명 중 7명은 ‘결혼 전제 동거(혼전동거)’에 찬성한다고 밝혔으나,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동거에 대해선 전혀 다른 생각을 보였다.

남성은 절반이 넘는 56.5%가 찬성한 데 비해, 여성은 52.3%가 반대 의사를 전했다. 당시 연구원은 해당 결과를 공개하면서 ’(동거와 관련해)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부정적인 인식과 편견이 더 많이 작동하는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여성 A(28)씨는 해당 결과에 “여성의 경우 동거 중 임신할 수도 있기 때문에, 부정적 편견이 많은 것 같다”고 씁쓸해했다. 그러면서 자신 역시 남자친구와 동거할 수 있었던 것은 “남자친구와 결혼 약속 후 양가 부모님을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타인의 생활 방식을 제3자가 찬/반 형태로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것일까. 동거 경험자들 역시 이 설문 결과에 반기를 들었다. 김나래·홍영돈씨 부부는 “저희는 동거 후 결혼을 했으니 ‘혼전동거’가 맞긴 하지만, 일상적인 말을 할 땐 ‘혼전동거’라는 단어를 지양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혼전동거에는) 동거가 결혼을 전제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요. 저희는 결혼을 전제하지 않고도 동거할 수 있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 파트너와 동거 중인 정만춘 작가도 “‘혼전’이라는 말에는 ‘언젠가 결혼을 할 것’이라는 함의가 있다”며 “사람의 생활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지금 제 마음과 상황에 가장 잘 맞는 방식이 동거일 뿐”이라고 쿨한 답변을 내놨다. “동거는 결혼을 위한 준비단계나 테스트가 아니에요. 또한, 누군가와 함께하는 방식은 (동거나 결혼 외에도)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장 행복한 방식이 무엇일까 고민해보셨으면 좋겠어요.” 

  

“혼인신고 안 했다고 각종 정책에서 배제돼” 

“혼인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러 정책에서 배제되고 있어요.” 동거 경험자들이 허프포스트에 공통으로 꼽은 ‘동거’의 단점이다. 동거 후 결혼한 박주미·이지훈씨 부부는 “같이 살 거면 세금이나 복지 면에서 유리한 결혼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나래·홍영돈씨 부부도 같은 의견이다.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하는 공공기관 주택 사업으로 집을 구했어요. 입주 전까지 법적 부부가 되어야 해서 자연스레 혼인신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정만춘 작가는 여러 정책에서 배제된 ‘동거’ 가구로서 실질적인 차별을 겪고 있다.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주택이나 청년주택 등 정부에서 지원하는 주택 사업에 지원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어요. 또한, 나이가 든 동거인들의 경우 재산 상속이나 수술 동의서 작성, 장례 문제 등에서도 여러 차별을 겪고 있습니다.” 

동거 후 결혼을 택한 이들 역시 이러한 고충에 공감한다. 박주미·이지훈씨 부부는 말했다. “사실 결혼은 가족과 가족이 합쳐지는 거라(당사자 외 다양한 혈연관계가 얽히는 거라) ‘동거’만 하고자 하는 분들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아직 동거가 우리나라에서 ‘정상적이지 않은’ 가족 형태로 보여지기 때문에 다양한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요. 결혼했다면 굳이 설명하지 않을 부분도 설명해야 할 것 같고. 제도적으로 먼저 인정해주면 인식은 따라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유튜버 '쭘이지부부' 제공
유튜버 '쭘이지부부'로 활동하고 있는 이지훈, 박주미씨 부부. 유튜브 방송 중 동거 경험을 밝힌 바 있다.

 

이처럼 다양한 가족형태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시점에서,  지난 1월 여성가족부가 동거 가구 등 기존 정부 정책에서 소외된 이들을 ‘가족’으로 포함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은 희망적이다. 

하지만 이들의 바람처럼 다양한 가족 형태가 현실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이른바 이성 부부와 자녀로 이뤄진 형태만을 ‘정상가족’ 취급하는 기존의 민법과 가족관계법 개정이 필요하다. 현행 민법 제779조는 가족 범위를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로 규정하며, 각종 가족정책의 법적 토대인 ‘건강가정기본법’도 가족을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뤄진 사회의 기본단위(제3조 제1항)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가부는 법률 개정과 관련해 해당 부처와 계속 협의해나간다는 계획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가족구성권연구소 등의 단체는 공동성명을 내고 “개정안은 아주 오래 유예된 변화를 받아들이는 첫 발걸음일 뿐”이라면서 “서로를 돌보고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을 지원하고 사회적인 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도 “현재 3~4인 가족이라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들어간 이들만이 복지, 주거, 세제, 의료 혜택을 독점하고 있다”며 “이번 여가부 발표는 1~2인 가구 증가 등 시대적 변화를 잘 수용한 방안이라고 평가한다. 다만 어느 정도까지 법제화될 수 있을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한겨레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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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무산된 ‘생활동반자법’ 다시 살려야  

더욱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기 위해선, 관련 법 개정과 함께 생활동반자법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생활동반자법은 프랑스의 팍스(PACS, 동거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시민연대계약제)에서 모티브를 얻은 법으로, 결혼이 아닌 다양한 동반자 관계를 법적으로 보호하자는 것을 골자로 한다.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014년 발의를 준비했으나 일부 반발로 인해 끝내 무산된 바 있다. 당시 진선미 의원 보좌진으로 지냈던 황두영 작가는 최근 책 ‘외롭지 않을 권리’를 펴내 해당 법의 효용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생활동반자법은 혼인과 혈연 이외의 사람들이 함께 살 때 필요한 사회복지 혜택과 제도적 권리를 보장하고, 동거생활을 시작하거나 해소할 때 필요한 절차를 규정하는 법입니다.”

이쯤에서, “다양한 형태의 결합을 큰 테두리의 가족으로 인정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더 많은 국민의 행복을 만드는 게 국가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라는 정만춘 작가의 질문이 떠오른다. 그의 말처럼 더 많은 이들의 행복을 위해 이제는 국가가 나서야 할 시점이 아닐까. 더는 “동거는 낙인”이라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은 사양하고 싶다.

 

이인혜 에디터 : inhye.lee@huffpos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