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2020년 07월 19일 16시 49분 KST | 업데이트됨 2020년 07월 19일 16시 57분 KST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전설 존 루이스 하원의원이 별세했다

1960년대 미국 시민권 운동을 이끌었던 '빅 6' 지도자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이 나왔던 1963년 ‘워싱턴 행진‘을 조직했으며, 훗날 ‘의회의 양심’으로 불렸던 전설적인 시민권운동 지도자 존 루이스 미국 하원의원(민주당, 조지아)이 17일(현지시각)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표한 바 있다.

″나는 거의 평생 동안 자유, 평등,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를 위한 싸움을 벌여왔다.” 루이스 의원이 암 진단 사실을 밝히는 입장문에서 한 말이다. ”지금의 이런 싸움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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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3월25일, 앨라배마주 셀마를 출발해 몽고메리로 향하는 행진의 선두에 선 수녀와 목사, 시민권 운동 지도자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당시 비폭력학생조정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던 존 루이스.

 

그는 평생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최전선에 섰다.1940년 2월21일에 앨라배마주 트로이 외곽의 한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분리(흑인 전용) 공립 학교를 다녔다. 1955년 몽고메리 버스보이콧 운동으로 촉발된 액티비즘을 목격하고, 라디오에서 접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연설에 자극 받은 루이스는 시민권 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이래로 평생을 투표권 쟁취를 비롯한 흑인 인권운동에 매달렸다.

루이스는 피스크대학교 재학 중이던 시절, 테네시주 내슈빌의 분리 식당에서 연좌농성을 조직했다. 21세이던 1961년에는 남부주들에서 실시되던 인종 분리 정책에 항의하는 뜻으로 일부러 백인 전용 좌석에 앉는 ‘프리덤 라이더스(Freedom Riders)’ 운동에 참여했다. (이 운동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 양보를 거부해 체포된 사건으로 촉발된 1955년의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여기에 참여한 흑인들이 백인들의 ‘보복’으로 목숨을 잃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루이스는 또 ‘비폭력학생조정위원회(SNCC)를 설립하고, 시민권 운동의 정점이었던 1963년부터 1966년까지 회장을 지냈다. 그는 SNCC를 통해 학생 운동을 조직했고 훗날 킹 목사와 함께 시민권 운동의 ‘빅 6’ 지도자(마틴 루터 킹 주니어, 제임스 파머, 존 루이스, A. 필립 랜돌프, 로이 윌킨스, 희트니 영)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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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4월16일, 미국 신문편집인협회(ASNE) 모임에서 연설하는 존 루이스.

 

루이스는 23세이던 1963년 8월에 열린 ‘워싱턴 행진‘에서 최연소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미시시피 자유 여름’ 운동이 벌어졌던 1964년에는 흑인 유권자 등록 운동을 출범시키는 데 관여했다. 

그는 시민권 운동 지도자로 활동하는 기간 동안 폭력에 시달렸다. 경찰에 수없이 체포되고 구타 당했으며, (흑백 인종 분리를 규정한) 남부의 짐 크로 법에 ‘감히’ 도전하고 투표권을 요구하는 것에 분노한 폭력배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1965년 3월, 앨라배마주 셀마의 에드먼드 피터스 브릿지에서 열린 ‘셀마 행진‘에서 루이스는 600여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투표권을 요구하는 평화 시위를 벌이던 중 앨라배마주 경찰에 의해 두개골절상을 입었다. ‘피의 일요일’으로 불리게 된 이 사건의 잔혹성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루이스가 셀마로 급히 날아온 킹 목사와 나란히 행진한 연이은 행진은 그 해 투표권법 통과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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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3월21일, 앨라배마주 셀마의 브라운 채플 교회 앞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 함께 행진을 시작하는 존 루이스(왼쪽에서 세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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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5월, 메릴랜드주 캠브리지에서 존 루이스(왼쪽에서 세 번째)와 시민권 운동가들이 인종 분리 정책을 지지하는 조지 월러스 앨라배마 주지사의 연설을 앞두고 시위를 벌이며 행진하는 모습. 

 

루이스는 1981년 애틀랜타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됐고, 1986년에는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민주당 하원 원내부총무를 지냈고, 하원 세입위원회 소속으로 의정활동을 벌였다.

의정활동 기간 동안 그는 시민권을 확장하는 법안을 도입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는 2018년 조지아주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했던 스테이시 에이브럼스(민주당)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에이브럼스는 흑인 유권자들의 투표를 억압한다는 논란이 빚어지고 있는 주를 돌며 투표권 운동을 벌여왔다.

″제가 셀마의 그 다리에서 약간의 피를 흘렸습니다. 53년 전에요.” 루이스가 주지사 선거 며칠 전 에이브럼스 지원 유세에서 군중들에게 했던 말이다. ”피를 흘려달라고 요청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저 절박한 마음으로 투표에 참여해달라고 요청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투표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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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13일. 존 루이스 하원의원.

 

루이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트럼프가 아이티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거지 소굴’로 지칭한 것에 항의하는 의미로 2018년 국정연설에 불참했다. 2019년 5월, 루이스는 킹 목사가 살아있다면 그에게 ”당신(킹 목사)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시민권 운동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트럼프는 ”인종주의자”라고 말해줬을 것이라고 했다.

루이스는 권한남용과 의회방해 혐의를 받았던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2019년 12둴 탄핵안에 대한 표결을 앞두고 그는 의정활동과 시민권 운동의 경험을 언급하며 감동적이고도 강력한 연설을 했다.

″옳지 못하고, 정당하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한 일을 목격하면 무언가 해야 할 도덕적 책무가 있는 것입니다.” 시민권 운동의 아이콘인 루이스가 말했다. ”우리 자녀들과 손주들은 우리에게 물을 겁니다. ‘그 때 무엇을 하셨나요? 무슨 말을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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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슈빌의 피스크대학교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 참석하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운데)를 안내하는 존 루이스(맨 왼쪽).

 

루이스는 미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내려놓지 않았다.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으로 촉발된 전국적인 ‘블랙 라이브스 매터’ 시위에 대해,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었다.

″(시위에 참여하겠다는) 영감을 받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움직였습니다. 한 번도 시위에 나서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전에는 한 번도 행진에 나서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자녀와 손주들, 증손주들과 함께 행진에 나서고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겁니다.” 

″그 사람들이 새로운 세대의 운동가들을 교육하고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 영향이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이 운동은) 되돌릴 수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 허프포스트US의 Rep. John Lewis, Civil Rights Icon, Dies At Age 80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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