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2018년 03월 01일 11시 48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3월 01일 14시 15분 KST

문재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 언급된 여성독립운동가들

"우리에게는 건국의 어머니들도 있었습니다."

Kim Hong-Ji / Reuters

제99주년 3·1절 기념식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독립운동에는 애국지사만이 아니라 상인과 나무꾼, 기생, 맹인, 광부들도 함께 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또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던 독립운동가들의 어머니와 아내들 또한 “형무소 앞 골목에서 삯바느질과 막일을 해가며 자식과 남편의 옥바라지”를 했던 독립운동가였다고 설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강우규, 박재혁, 최수봉, 김익상, 김상옥, 나석주, 이봉창, 윤봉길 의사등이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강조했다. 그런 한편, 유관순 열사와 함께 또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열거했다.

“밤을 지새우며 태극기를 그린 부산 일신여학교 학생들,

최초 여성의병장 윤희순 의사,
백범 김구 선생의 강직한 어머니 곽낙원 여사,
3.1운동 직후인 3월9일 46세의 나이에 압록강을 건너
서로군정서에 가입한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여사,
근우회 사건을 주도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 활동을 한 박차정 열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경을 6차례나 넘나든 정정화 의사,
우리에게는 3·1운동의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의 어머니들도 있었습니다.“


기념사에 언급된 여성 운동가들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

 

뉴스1
2월 28일 오전 부산 시민들이 부산 동구 일신여학교에서 동구청 사이의 거리를 행진하며 일신여학교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부산 일신여학교는 현 동래여거고의 전신이다. 1919년 3월, 독립선언서가 부산에 전해지자 3월 10일 일신여학교 학생과 교사들은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든 후, 다음날 좌천동 거리를 누비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만세운동은 이후 부산경남의 만세운동에 불씨를 당긴 것으로 알려졌다. ‘한남일보’에 따르면, 당시 일신여학교 재학 중에 만세운동에 참여한 김난줄,김반수,김복선,김봉애,김응수,박두천,박연이,박정수,송명진,심순의는 이후 정부에서 훈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 따르면, 윤희순 의사는 시아버지 유홍석의 영향으로 의병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안사람 의병가’,‘의병군가’,‘병정가’등을 지어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여성들도 구국활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했으며 “1907~1908년의 의병운동 때에는 강원도 춘성군 가정리에서 여성의병 30여명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아 의병운동을 지원”했다. 1915년 부터는 조선독립단과 조선독립단 가족부대, 조선독립단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신빈 영릉에도 조선독립단 학교 분교를 두어 항일운동가를 양성했다.

 

국가보훈처

남자현 여사는 3.1운동 이후 중국 요녕성 통화현에 이주해 서로군정서에 가입했다. 이후 북만주 일대에 농촌을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건립하였으며 여성계몽에도 힘써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권신장과 자질향상에 주력했다. 1925년에는 당시 조선총독인 사이토마코토를 주살하기 위해 국내에 잡입했다가 실패했다. 1932년에는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천에다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마디와 함께” 당시 하얼빈에 파견된 국제연맹조사단에 전하며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국가보훈처

박차정 열사는 조선의용대에서 22명으로 구성된 부녀복무단의 단장을 맡아 활동했다. “1939년 2월 선생은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 참가하여 부상을 당하기도 하는데, 이는 선생이 의용대의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음을 말해준다.” 앞서 주도한 근우회 사건이란 “근우회의 허정숙이 대중적 위력으로 민족적 항의를 보여줌으로써 구속학생을 석방하고 민족적 기치를 들기 위해 시내 각 여학교의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도하자고 결의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었다. 당시 박차정 열사는 근우회의 핵심 간부였는데. 시위조직의 배후세력으로 주목되어 근우회의 허정숙과 함께 구속되었다.

 

정정화 의사는 ‘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 불린다.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1946년 귀국하기까지 선생은 망명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임정 요인들의 뒷바라지에 바쳤다. 백범 김구는 물론 석오 이동녕(李東寧), 성재 이시영(李始榮) 등 임정 요인들 가운데 선생이 지어준 밥을 먹지 않은 분이 없었고, 임정의 가재도구 가운데 선생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수많은 임시정부 요원들의 부상을 돌보았고, 그들이 세상을 떠날때 임종을 지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