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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6월 19일 10시 25분 KST

대학병원 전공의들이 폭행 피해와 장시간 노동에 대해 털어놨다

지난 6일 세브란스병원 산부인과 전공의들은 연세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대한전공의협의회 제공.
지난 2월엔 가천대 전공의가 36시간을 근무하다 숨진 채 발견된 뒤 전공의들이 추모 배지를 붙인 모습.

지난 6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산부인과 전공의 12명이 수년간 교수로부터 폭행·폭언에 시달렸다며 대학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지난 2월엔 가천대 전공의가 36시간을 근무하다 숨진 채 발견됐다. ‘돈 잘 버는 의사’라는 사회적 인식과 달리 대형병원 전공의들은 상급자의 폭력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한겨레가 만난 전공의 4명은 “폭행과 장시간 노동은 일부 교수의 일탈이 아닌 대형병원의 고질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의사 대비 환자 수’를 낮추는 것이 해답이라고 입을 모았다.

■ 욕설은 일상…수술 중 밖으로 불러내 폭행

“(교수가 전공의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하고 화내는 건 많이 봤어요. 수술실 들어갈 때 장갑을 2~3개 끼고 들어가는 교수가 있다는 말도 있어요. 전공의 때리고 오염된 장갑 하나 벗은 뒤 속장갑으로 수술하는 거죠.” (경기도 대학병원 전공의 ㄱ씨)

지난 15일 한겨레가 만난 전공의들은 수술실을 비롯해 의국에서 겪은 다양한 폭행과 폭언을 고백했다. 전공의들은 수술실의 ‘예민한 분위기’ 탓에 조그만 실수도 폭행으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경기도의 한 대학병원에서 전공의 수련을 받았던 ㄴ씨는 “조금만 실수해도 전공의가 모든 욕을 듣고 그는 결국 울면서 뛰쳐나간다”며 “교수가 전공의를 수술실 밖으로 불러내 때리고 다시 수술실로 들어온 일이 있었는데, 당시 국소마취를 해 의식이 있었던 환자는 폭언·폭행 소리를 고스란히 다 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폭력은 일상이었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의 ‘2017년 전공의 수련 및 근무환경 실태조사’를 보면, 설문조사에 참여한 1768명 가운데 71.2%가 언어폭력을 당했고, 20.3%는 신체 폭력을 당했다고 답했다.

■ 돈 잘 버는 의사? 실상은 최저임금 받으며 80시간 근무

폭행만큼이나 전공의들을 힘들게 하는 건 장시간 근로였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 전공의인 ㄷ씨는 주 90~100시간 근무가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했다. ㄷ씨는 “점심시간 1시간이 규정이지만 그 시간을 메워줄 사람이 없다”며 “식사는 5분 안에 해결하고 야간 업무가 있는 날은 1초도 쉴 수 없다”고 토로했다.

36시간 동안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ㄹ씨는 “쪽잠을 자라고 하는데, 언제 일이 터질지 모르는 긴장 상태니 그럴 수도 없다”고 고백했다. 주 90~100시간 일하고 이들이 받는 돈은 월 300만원 남짓으로 최저임금 수준이다.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 7조는 ‘수련병원 등의 장은 전공의에게 4주 기간을 평균해 1주일에 80시간을 초과해 수련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법은 현실을 제어할 수 없다.

장시간 노동 탓에 전공의들은 늘 피로감을 느낀다.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지난 4월 발표한 ‘전공의 업무 강도 및 휴게시간 보장에 관한 설문조사’를 보면, 전국 90여개 병원 660명의 전공의 가운데 81.1%가 ‘평소 수면을 충분히 취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고, 92.9%가 정신적 피로감을, 94.7%가 육체적 피로감을 호소했다. “이러다 죽겠다 싶은 생각을 하며 새벽까지 일한다”거나 “환자를 착각해 다른 환자에게 검사하거나 투약할 뻔한 적이 있다”는 전공의들도 있었다.

■ ‘4년만 버티면 해방’…전공의들이 참는 이유

살인적 근무와 일상적인 폭력에도 도제식 교육 과정에서 굳어진 수직적 위계관계 탓에 쉽게 문제제기를 하지 못한다. ㄹ씨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대형병원 산부인과는 ‘교수 스케줄에 맞춰 애 낳는 시간이 정해진다’는 말이 있다. 순종적으로 복종하는 문화가 그 정도”라고 말했다. ㄴ씨 역시 “밥 시간이 되면 1년차 레지던트가 교수들 방 문을 두드리며 식사시간을 알리고, 가장 직급이 높은 교수는 밥을 직접 떠다 줬다. 전공의와 교수 간 위계를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24시간 같은 공간에 머물고 ‘4년만 참으면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도 전공의들을 침묵하게 한다. ㄷ씨는 “교수와 의국에 있는 동안 몇십시간을 함께 있어야 하는데,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 한다”며 “전공의 기간 4년(인턴 1년, 레지던트 3~4년)만 참으면 되니 ‘더러워서 피한다’는 심정으로 버틴다”고 말했다. 전공의들은 부조리한 관행에 대한 침묵이, 폭력의 대물림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전문가들은 전공의에 대한 부당한 처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대형병원의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영명 보건의료노조 정책실장은 “폭행과 과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다. 교수도 장시간 근무를 하고 작은 실수는 환자 생명과 직결된다. 극도로 예민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 보니 엄격한 관계가 형성되며 그 속에서 폭언·폭행 문제가 터지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나 정책실장은 이어 “결국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면 대형종합병원의 환자 쏠림 현상을 해결해야 한다”며 “전공의법이 통과되고 주당 80시간 이내로 일을 시키라고 규정하지만 인력 충원은 안 이뤄지고 있다. 인력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전공의들이 법을 지켜가면서 일하기 어려워지거나 짧은 시간 안에 압축적으로 고강도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