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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판 우생순 - 삼척시청 vs 서울시청

[신들의 전쟁, 세상을 뒤흔든 스포츠 라이벌⑨]

ⓒhuffpost

80분간 사투를 벌인 두 팀 선수들은 모두 기진맥진했다. 과연 신은 어느 편을 들어줄 것인가. 마침 장소도 ‘신들의 성지’ 그리스 아테네였다.

아테네올림픽 폐막을 하루 앞둔 2004년 8월 29일(한국시간) 그리스 아테네 헬링코종합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덴마크의 여자핸드볼 결승전. 전반 14 대 14, 정규시간 25 대 25, 1차 연장 29 대 29, 2차 연장 34 대 34. 도대체 끝을 알 수 없는 경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동점만 무려 열아홉 차례를 이룬 한 편의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두 팀은 이미 조별리그에서도 29 대 29로 비긴 바 있었다.

사실 연장에서 한국이 끝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날 20개의 세이브를 기록하며 신들린 방어를 선보인 골키퍼 오영란이 1차 연장에서 연거푸 선방을 펼쳤고, 이상은(당시 효명건설 입단 예정)의 중앙 돌파에 이은 슈팅 성공으로 2분 30초를 남기고 29 대 27까지 앞서나가며 승기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종료 2분여를 남겨두고 ‘수비의 핵’ 허순영(당시 대구시청)이 2분간 퇴장당하면서 2골을 연속으로 내줘 29 대 29로 2차 연장에 들어간 것이다. 2차 연장에서 한국은 29 대 31, 2골 차로 밀리다가 골키퍼 오영란이 덴마크의 공격을 세 차례 연속 막아내는 사이 문필희(당시 한국체대)가 연속 3골을 터뜨리면서 32 대 31로 역전시켰고, 1골을 더 보태 33 대 31로 앞서 금메달이 눈앞에 보였다. 그러나 이후 2골을 내리 허용하고 우선희(삼척시청)가 1골을 보탰지만 경기 종료 30여 초 전, 이날 두 팀 선수 가운데 가장 많은 14득점을 올린 카트린 프루에룬드에게 통한의 동점골을 내주며 34 대 34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두 팀의 끝 모를 승부는 결국 페널티 스로(penalty throw, 승부던지기·축구의 승부차기)로 결판났다. 승부던지기에서 한국은 임오경(히로시마 메이플 레즈)과 문필희가 연속 실패하며 4골을 모두 성공시킨 덴마크에 2 대 4로 져, 덴마크가 금메달, 한국이 은메달로 메달 색깔이 가려졌다.

패배가 확정되자 한국 선수들은 서러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한국 국민들은 너무나 아쉬운 패배에 땅을 쳤지만 비인기 종목이라 찬밥 취급을 받던 선수들의 감동적인 투혼에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핸드볼 국내 대회는 관중석이 텅 빈 그들만의 리그였고, ‘핸드볼’을 ‘한데볼’이라고 자조하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핸드볼인들은 “국내 대회에서도 2004년 아테네올림픽 같은 경기가 많이 나와야 관중들이 핸드볼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2016년 여자핸드볼 실업팀 삼척시청과 서울시청은 이 말을 현실로 만들었다. 두 팀은 2016년 한 해 동안 모두 7번 맞붙었는데, 만날 때마다 승부를 가리지 못하거나 승부가 나도 모두 1골 차였다. ‘스포츠 라이벌’을 전문적으로 취재하고 연재해온 내가 보기에도 몇 해 동안 모든 스포츠 종목을 통틀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기에 손색없는 최고의 라이벌 매치였다.

무명 남성 지도자 이계청 vs 스타 여성 감독 임오경

두 팀의 감독은 캐릭터부터 대조적이다. 남성과 여성, 스타플레이어 출신과 무명 출신으로 대비되고 성격도 정반대다. 우선 삼척시청은 이계청 감독이 이끌고 있고, 서울시청은 임오경 감독이 사령탑을 맡고 있다.

이계청 감독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반면, 임오경 감독은 원조 ‘우생순’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계청 감독은 부천공고와 경희대를 졸업했는데, 88올림픽이 끝난 뒤 잠깐 국가대표를 지냈다. 남자 핸드볼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낸 뒤 세대교체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계청 감독은 대학 2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무릎 부상 때문에 국가대표 생활은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태릉선수촌을 나와야 했다.

임오경 감독은 여자 핸드볼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다. 전북 정읍여고와 한국체대를 졸업했고,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 그리고 ‘우생순 신화’를 만들었던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은메달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올림픽에 4번 출전해 금메달 1개, 은메달 2개를 일궈낸 한국 여자 핸드볼의 대표적인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다.

두 감독 모두 은퇴 후 신생팀 창단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우선 이계청 감독은 2004년 2월, 삼척시청 창단과 함께 초대 감독을 맡아 숱하게 많은 우승을 일구면서 삼척시청을 명문 구단 반열에 올려놓았다. 핸드볼큰잔치 3번, 슈퍼리그 2번, 핸드볼코리아리그 2번 등 큰 대회에서만 7번 우승을 차지했고, 전국체전 2번 등 12년 동안 큰 대회에서만 모두 열세 차례나 정상에 올랐다. 삼척시청의 좋은 성적은 삼척시를 핸드볼의 ‘메카’로 만드는 기폭제가 됐다. 이 감독은 특히 2014년 세계여자주니어핸드볼선수권대회 사령탑을 맡아 여자 주니어 핸드볼 사상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세계 정상으로 이끌었다.

임오경 감독도 서울시청 창단 감독이다. 2008년 7월, 서울시청 창단과 함께 초대 사령탑에 올라 2017년 현재 10년째 팀을 이끌고 있다. 신생팀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서서히 성적을 내다가 4~5년 전부터는 정상급 팀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2015년까지는 번번이 준우승이나 3위에 머물면서 우승에 목말라 있었다.

2016년 당시 두 팀의 주축 선수들을 보면, 우선 삼척시청은 세계적인 라이트윙인 우선희 플레잉 코치를 비롯해 정지해, 유현지, 심해인 등 전·현 국가대표가 팀을 이끌었다. 서울시청은 2012년 런던올림픽 주포로 활약했던 에이스 권한나를 비롯해 2004 아테네올림픽 ‘우생순의 주역’인 노장 최임정과 송해림 등 역시 전·현 국가대표 선수들이 팀의 주축이었다.

두 팀 골키퍼도 라이벌이다. 삼척시청은 박미라, 서울시청은 주희가 골문을 지키고 있는데, 박미라는 1987년생으로 핸드볼코리아리그에서 2012년부터 2017년까지 6년 연속 골키퍼 부문 베스트7에 오를 만큼 국내 최정상의 골키퍼다. 하지만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는 노장 오영란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고 간간이 출전했다.

주희는 1989년생으로 박미라 선수보다 2년 후배지만 2012년 런던올림픽 대표팀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박미라에 밀려서 아직 핸드볼코리아리그에서 골키퍼 부문 베스트7에 오르지 못했다.

2016 코리아리그 맞전적 2승 2무 2패, 148득점 148실점

두 팀의 2016시즌 맞대결 결과는 놀랍다. 핸드볼코리아리그에서 6번 맞대결을 펼쳤는데, 결과는 2승 2무 2패였다. 더욱이 승패가 갈린 4경기는 모두 1골 차로 웃고 웃었다. 6번 맞붙는 동안 두 팀의 골득실도 당연히 148득점 148실점으로 똑같다.

핸드볼코리아리그의 정규리그에서는 3번 맞붙었다. 두 팀의 2016시즌 첫 대결은 2월 12일 삼척시청의 홈코트인 삼척실내체육관에서 열렸는데, 첫 경기부터 23 대 23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삼척시청은 심해인이 7골로 공격을 이끌었고, 서울시청은 권한나가 10골을 넣으며 두 팀 최다 득점을 기록했다. 삼척시청은 40퍼센트가 넘는 방어율을 기록한 골키퍼 박미라가 팀을 패배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팀이 2016시즌 이렇게 치열한 승부를 펼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 여자 핸드볼은 리우올림픽 때문에 한동안 경기가 없다가 정규리그 2차전과 3차전은 리우올림픽이 끝난 뒤 열렸다.

정규리그 2차전은 8월 28일 서울시청의 홈코트인 서울 SK올림픽핸드볼경기장에서 열렸는데 2차전 역시 28 대 28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 경기에서는 서울시청 송해림과 권한나 쌍포가 똑같이 8골씩 넣으며 팀 공격을 이끌었고, 삼척시청은 심해인이 3골로 부진했지만 정지해가 9골을 터뜨리며 서울시청과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정규리그 마지막 3차전은 2차전이 끝나고 닷새 뒤인 9월 2일 의정부 실내체육관에서 중립 경기로 펼쳐졌다. 삼척시청이 23 대 22로 이기면서 두 팀의 맞대결 3경기 만에 비로소 승패가 갈렸다. 이 경기는 두 팀 골키퍼인 삼척시청 박미라, 서울시청 주희의 선방이 돋보였는데 박미라는 42퍼센트, 주희는 38퍼센트의 높은 방어율로 상대 공격을 차단했다.

이로써 삼척시청은 서울시청과의 정규시즌 맞대결에서 1승 2무로 근소하게 앞섰다. 그러면서 정규리그 성적은 삼척시청이 1위, 서울시청이 2위를 차지했다. 승점도 5점 차이에 불과했다. 삼척시청은 16승 4무 1패(승점 36점), 서울시청은 14승 3무 4패(승점 31점)였다. 정규리그 우승팀 삼척시청은 챔피언 결정전에 직행했고, 정규리그 2위 서울시청은 3위 인천시청과의 플레이오프에서 35 대 24로 가볍게 물리치고 챔피언 결정전에 합류했다.

챔피언전은 3전 2선승제로 개천절 연휴였던 10월 1~3일 펼쳐졌다. 역시 숨 막히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핸드볼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가 사흘 내내 벌어진 것이다.

우선 1차전에서는 정규리그 2위 팀 서울시청이 정규리그 1위 팀 삼척시청을 28 대 27로 물리치고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올 시즌 전적도 1승 2무 1패로 균형을 맞췄다. 이 경기는 경기 종료 1분 전까지 27 대 27로 맞서다가 종료 30초 전 서울시청 송해림의 결승골로 서울시청이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챔피언 결정전 2차전은 벼랑 끝에 몰린 삼척시청이 반격에 성공했다. 23 대 24로 뒤지던 종료 1분여 전 서울시청 송해림과 권하나의 잇따른 2분간 퇴장을 틈타 정지해의 동점골과 우선희의 역전골로 25 대 24, 1점 차의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완성했다.

1승 1패에서 맞선 마지막 3차전은 혈전이었다. 사실 서울시청은 2014년과 2015년 2년 연속 챔피언 결정전에서 져 준우승에 머문 한이 있었고, 삼척시청도 2013년 이후 3년 만의 우승 도전이라 두 팀 모두 우승을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3차전은 두 팀의 이런 절박함 속에 진행됐는데, 역시 또 1골 차로 희비가 엇갈렸다. 결국 서울시청이 삼척시청을 23 대 22, 1점 차로 이기고 2008년 창단 이후 아홉 시즌 만에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삼척시청은 정규리그 우승, 서울시청은 챔피언전 우승을 나눠 가진 셈이 됐다.

이로써 두 팀은 2016년 핸드볼코리아리그에서 6번 맞대결을 펼쳐 2승 2무 2패를 기록했고, 승패가 갈린 4경기는 모두 1골 차 승부였다. 맞대결 골득실도 같을 수밖에 없는데 두 팀이 똑같이 148득점 148실점으로 똑같았다.

 

두 팀의 마지막 승부, 전국체전 결승전

이게 마지막이 아니었다. 2016년 10월 13일, 충남 일원에서 열린 제97회 전국체육대회에서 두 팀의 2016시즌 진짜 마지막 승부가 펼쳐졌다. 이때까지 2승 2무 2패로 맞선 두 팀이 전국체전 결승에서 ‘진짜 결승전’을 펼친 것이다.

천안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이 경기는 정규시간까지 전후반 21 대 21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만약 코리아리그 정규시즌처럼 연장전이 없었다면 다시 무승부로 끝날 뻔했다. 하지만 전국체전은 올림픽처럼 메달 색깔을 가려야 했다. 결국 승부는 연장전으로 접어들었고, 엄청난 접전 끝에 또다시 1골 차로 희비가 엇갈렸다. 삼척시청이 25 대 24로 앞선 종료 직전 서울시청 송해림이 동점을 노린, 2차 연장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슛을 날렸지만 삼척시청 골키퍼 박미라가 막아내면서 삼척시청이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삼척시청은 코리아리그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내준 마지막 3차전 패배의 아픔을 딱 열흘 만에 설욕했다. 삼척시청은 유현지가 부상으로 뛰지 못하는 악재 속에서 정지해가 두 팀 최다인 10골을 넣으며 활약했다.

이로써 2016년 두 팀의 맞대결 전적은 삼척시청이 7전 3승 2무 2패로 1번 더 이겼다. 마지막 일곱 번째 경기 연장전이 없었다면 2승 3무 2패가 될 뻔했다. 승패가 갈린 5경기는 모두 1골 차 승부였다. 득점수를 보면, 삼척시청이 173골, 서울시청이 172골로 삼척시청이 불과 1골 앞섰다.

핸드볼코리아리그는 2017년 시즌에도 SK 슈가글라이더즈와 서울시청이 명승부를 펼친 끝에 SK가 창단 첫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2016년만큼의 역대급은 아니었지만. 핸드볼은 경기장에서 직접 관전하면 훨씬 더 박진감이 넘친다. 그것이 라이벌 대결이라면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흥미롭고 재미있다. 관중들이 국내 핸드볼 경기장을 꽉 채울 때, 다가오는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다시 한 번 금빛 영광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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