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니스 킹은 갓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암살 소식을 들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68년 4월 4일 오후 7시 1분, 멤피스의 한 모텔에서 총에 맞았다. 버니스가 잠자리에 들 무렵이었다. 버니스 킹은 결국 이 비극적인 소식을 다음 날에야 듣게 됐다. 킹 목사의 아내인 코레타 스콧 킹은 다음날 애틀랜타로 돌아왔고, 버니스를 비롯한 자녀들은 공항에서 어머니를 만나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빠와의 저녁 식사는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아빠에게 뽀뽀를 퍼붓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버니스는 그렇게 ‘죽음’을 처음 접하게 됐다. 스콧 킹에게
버니스 킹은 최근 허프포스트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그 순간 내게 죽음에 대처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그제야 ‘아빠가 돌아가셨어. 아빠는 관 안에 누워 계실 거야. 너에게 말을 걸 수 없지. 아빠의 영혼은 신의 곁으로 갔단다’라고 설명하셨다.”라고 말했다.
킹 목사가 암살된 지 5일째 되던 날, 고인을 기리는 장례식이 열렸다. 이날 코레타는 자신의 남편이 불과 두 달 전, 에벤에셀 침례교회에서 했던 설교의 한 부분을 재생했다. 마치 자기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한 내용이었다. 킹은 자신의 장례식에서도 시기적절한 연설을 할 수 있었다.
코레타는 딸을 안아주며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빠는 신의 곁으로 가셨으니 앞으로 대화를 나누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장례식장에서는 킹 목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버니스는 장례식장을 둘러보며 아버지를 찾기 시작했다.
과거 암살 시도, FBI의 감시, 끊임없는 위협 때문에 킹은 어쩌면 자신이 암살당할 것을 예측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마틴 루터 킹의 가르침은 그 시절부터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기적절하고 유효하다.
킹이 지금의 세상을 본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하는 의문은 이미 논의의 주제가 된 지 오래다. 그 의문은 최근 들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주 제기됐다.
마틴 루터 킹이 살아남았다면 지금 이 세상을 보고 뭐라고 말했을까?
버니스 킹은 아버지가 살아생전 그 대답을 했다고 말했다.
버니스는 허프포스트에 ”킹 박사는 빈곤, 인종차별, 군국주의를 ‘해악’이라고 부르며 이에 맞서 싸웠다. 우리는 지금도 이 해악을 겪고 있다. 우리는 그가 우리와 함께 있었을 때 알려주려 했던 것들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라고 전했다.
버니스의 말 대로, 킹은 생전에 여러 가지 싸움에 참여했다. 그가 미국 남부에서 인종차별에 맞서 벌인 연좌 농성이나 행진 등은 이제 ‘킹의 비폭력주의’라고 불린다. 킹은 이런 시위에 10년 이상 참가했으며, 시민 평등권과 투표권 관련 법 제정에 큰 역할을 했다.
킹을 그저 몽상가라고 생각했다면 오해다. 그는 일 년에 연설만 약 450번 정도 했으며, 책을 다섯 권이나 썼다. 특히 사망하기 전 3년 동안은 사회주의, 반군국주의(베트남전 당시), 시민 평등권을 위한 전 세계적 혁명에 대해 급진적인 사상을 밝히는 등, 많은 기록을 남긴 바 있다.
권력을 무척이나 중요시했던 사람들은 킹을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의 영향력이 억누르기 힘들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킹의 가족은 제임스 얼 레이가 킹을 죽인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이뤄진 암살이었다고 믿는다. 1999년 열린 재판에서는 배심원 전원이 킹의 암살이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킹의 암살 당시 버니스에게 죽음은 낯선 개념이었다. 하지만 버니스는 곧 죽음에 익숙해졌다. 그다음 해 삼촌인 A.D. 킹이 수영장에서 사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몇 년 뒤에는 할머니가 교회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버니스 킹은 결코 견디기 쉽지 않은 비극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족을 하나로 묶어 버티게 해준 건 어머니였다고 밝혔다. 코레타는 킹이 그랬듯, 계속 흑인 인권 운동에 참여했고, 개인적인 트라우마에 힘들어하면서도 매일 평등을 위해 싸웠다.
어머니는 진정한 슈퍼우먼이었다. 미국의 성장을 돕고, 지속되어 온 폭력을 막으며 네 아이를 길렀다. 아버지가 살해당한 뒤에는 폭동이 일었지만, 아버지가 이끌기로 했던 4월 8일 멤피스 행진에 어머니가 대신 나서 했던 발언이 긴장 해소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버니스는 이어 ”아버지는 당시 많은 증오를 받았다. 암살 당시에는 사실 미국에서 가장 증오받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 중 하나다. 그건 매일 같이 노력한 어머니 덕이다”라며 코레타 스콧 킹에게 공을 돌렸다.
버니스는 어머니가 ‘킹’이라는 이름의 무게에 대해 부담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네 아버지나 내가 될 필요가 없다. 그저 네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네가 되어라”라는 조언과 함께 말이다.
그렇지만 버니스는 부모님이 하던 일을 계속 이어갔다.
네 남매 중 막내인 버니스는 어린 나이로 성직자의 길을 선택했다. 에벤에셀 침례교회에서 목사로 임명된 두 번째 여성이 되었고,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남부 그리스도교도 지도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SCLC)의 의장으로 지명되었으나 거절했다.
코레타가 설립한 킹 센터의 CEO인 버니스는 지금도 자신의 아버지가 전했던 비폭력 메시지를 지키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어머니가 논의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버니스는 5살 때 어머니에게 배운 교훈을 지금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실천하고 있다.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활동가들에게 찬사를 보냈고, 최근에는 총기 반대 운동인 ‘다시는 안된다(Never Again)’ 운동을 지지한 바 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킹 목사의 교훈은 지금도 유효하다.
아버지는 분쟁과 양극화에 대처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다. 비폭력에 대한 아버지의 가르침은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긴장이 고조된 상태다. 분열이 더욱 심해져 되돌리지 못할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우리가 전 세계 인류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버니스는 킹 목사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증오와 어둠을 사랑과 빛으로 밀어내려 한다. 그는 킹 목사가 정의한 3대 해악에 맞서려면 사랑과 빛, 그리고 법적 조치가 필요하다는데 사람들이 공감하기를 바란다.
버니스 킹은 끝으로 ”당신의 가장 강한 지지자와 적 역시 인류의 일부라는 것을 늘 기억하라. 그들에게 단점이나 힘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인류의 일부다. 진실과 정의를 지키는 과정에서라도 그들을 해치지는 마시라. 인간의 삶을 신성하게 지키는 것이 당신 삶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가르침이다.”라고 말했다.
허프포스트US의 ‘Bernice King Believes It’s ‘Critical’ To Heed Martin Luther King’s Lessons Today’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